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33)
칸트 『윤리형이상학』 공법 발제 (2024) 불운하게 아무도 모르는 이 글을 조우하신 분께이 글은 당신이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데 끔찍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오히려 스멀스멀 당신의 머리를 파고들어 분리할 수 없이 결착되고 완전히 망쳐놓을 수도 있습니다.애원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유령이 출몰하는 숲처럼, 언제나 상당한 날조에 주의하세요.  -국가, 공법과 그 체계 그리고 법/권리(Recht) 개념의 참된 실현으로서 영원한 평화칸트,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 §§43-62 발제  조금 긴 서론: 칸트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의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Rechtslehre)」에서 공법(öffentlic..
2021년 2월의 여는 글 우연의 궤적 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동방엔 퀴퀴한 책더미와 라이터와 어둑한 창가가 쌓였고물론 텅 빈 술병과 말뿐인 플롯도 함께였다어쩌면 낮과 밤을 쓰고 웃고 산책하는 데 바치는 꿈이었지사랑할 때는, 아끼지 않고… 그건 어른들의 지혜 사시사철 책장은 별과 불길에 젖어허술한 피그말리온들은 병과 열을 달고 살았다 투명한 욕망이라 쓰여야 하는 말들을 부르면매주 교정엔 흐린 환희처럼 글이 숨은 방, 불이 켜졌다우리는 취기와 질투와 펜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며입술은 어느 때보다 불온과 슬픔을 야기하고어린 축제가 바다에 잠기는 꿈을 꾸어도 두렵지 않았다 한번쯤 죽어도 좋아, 새벽잠에 들 때마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언어는 나의 궤도와 창문을 벗어나 타오르고설익은 광기가 삶의 비밀을 공전하여도우리는 모든 ..
서늘한 여름 사랑이 있는 폭력 그를 정말이지 사멸하는 자들은 날개 달린에로스(에로스 포테노스)라 부르지만,불사자들은 프테로스(날개 달린 신)라 부르네.날개를 기르는 필연으로 인해. 0.그들은 한참을 비 오는 날의 살갗으로 달렸다. 두 소년의 손발은 늘 찼다. 한 소년이 언젠가 코끝에서 책장을 팔락거리며 숨을 들이쉴 때, 다른 소년의 희고 여윈 손가락이 책등을 넘어 들어와 가냘픈 그림자로 활자를 지웠다. 빈 교실 창가는 회청빛이었고 어딘가 먼 농토에서 불어오는 듯한 풀썩 마른 잿더미 냄새가 났다. 그리고 학교는 비가 오기 직전의, 온통 몸을 숨긴 뱀처럼 뼈대가 서서히 녹슬고 있는 듯한 비릿한 냄새… 방해받은 소년은 손을 밀쳐내며 한 페이지를 훑고는 작게 탄성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깃털의 싹은 열망과 함께 안에서..
모티브 임시 저장 실낙원 -퇴락한 유원지의 잔해 위에 안개처럼 세워진 그 마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술래처럼 잊혔다. 풍랑이 거센 동쪽 바다 어딘가를 더듬거리는 그 섬의 영혼들은 해무海霧의 휘발성을 타고나, 이른 나이에 육체를 버리고 비가 내릴 때 어머니 바다 품으로 돌아간다고들 했다. 그리고 달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바다가 밤에 뜨는 눈... 그러므로 그들은, 여름 장마철 가장 작고 가냘피 휘어진 채 웃는 손톱달이 뜨는 밤에 영혼을 땅에 길들였다. 약동하는 피와 사라지는 이름 속에서, 신이여 사랑받으소서... 한데 그러한 밤이면 어김없이 바다의 날카로운 큰 바위나 뭍으로 올라온 듀공들이 목이 부러진 천사 혹은 아름다운 세이렌처럼 괴이한 비명을 질러댔는데, 이 의례가 시작되면 검은 수도복을 뒤집어 쓴 순례자들은 불이 타..
주네, 《꽃피는 노트르담》 (말하면서 꿈꾸는 사람, 눈앞에 있는 나를 관통하거나 우회하여 어딘가 먼, 장소 없는 장소와 맞닿아가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적확하게는, 사랑할 수밖에 없게 이끌려 간다. 그는 아폴론의 신탁을 향하여 품을 열어젖혀 눈먼 예언자, 가끔 얼굴을 찡그리곤 지상으로 스러진 말들을 엮을 때는, 촛농이 흐르는 손으로 잠자코 밤의 능선을 건너가는 순례자. 그리고 모든 작가들은, 모든 사람들이 대상의 현존을 위하여 초월적 객관의 들뜬 속삭임과 비밀스럽게 입술을 얽듯이(이러한 물자체, 초월, 종교성은 정말 수수께끼이다), 그들 문장 너머의 무엇인가와 관계한다. 그리고 주네가 황홀경 속에서 몸을 섞는 그것은 이 한 문장 속에 집약될 수 있겠다. '그는 (...) 허옇고 길쭉한 촌충들이 고리처럼 구불구불 감아오른 반파된 ..
일기 1 -선생님. 우리는 먼 늦여름의 행위를 기억한다. 동생의 진도는 한참 더뎠고, 사실 나는 그 꽃뱀花蛇을 벌써 한 번 익힌 적 있다. 높고 반투명한 창가에 저물녘이 어른거릴 때, 노랗고 따뜻한 나의 침실과 하얀 간이 탁자 곁에서. 눈을 감자 건너편의 선생님은 잠잠히 발화하였다.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당신의 음성은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미약하고도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리고 나는 오싹한 열병에 걸렸다. 모든 일이 뉘앙스로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그날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사위가 고요하였다. 께느른한 주황빛 파동만이 먼지와 함께 우리의 거처를 기어 다녔다. 지독한 예감. 떨면서 실눈을 뜨자 그는 팔짱을 낀 채 흐릿하게 힐난하였다. 그것은 맨발로 유리를 밟지 말라는 따위의 무력한 경고였다. 이내 ..
흄 발제 (2024) 한순간 명멸했던 사유는 발화하려는 순간 나의 몸을 꿰뚫어 산란하면서 갈가리 찢어버리는 말들로 바스라지고 한때 진리의 기관들을 꿈꾸던 이 '가차 없는 장소'에는 불구의 지체들이 썩어가는 더러운 피만이 울컥거린다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에 관하여, 혹은 흄의 형이상학/인식론, 심리학 및 윤리학에 관한 소개 - 흄의 생애에 관해서 오늘은 제가 접해본 철학자 중 가장 달콤씁쓸한 이성주의자라 명명하고 싶은 흄(David Hume, 1711-1776)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흄은 1711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무려 12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해 법률을 공부합니다. 물론 이때 그는 지금도 수많은 어..
후설 세미나 (2023) 후설 『위기』에서 초월론적 주관의 상호주관성을 통한 생활세계의 필연적인 보편성 확보- 후설 현상학에서 절대적 진리와 보편적인 목적성의 이념, 그리고 이를 추구하는 인간적 사랑을 위하여 0. 서론세계는 그 있음(Dasein)과 어떠함(Sosein)에 있어서 비합리적 사실(Faktum)이고, 이것의 사실성(Faktizität)은 오로지 동기 연관들의 견실함에 기인한다. (...) [하지만] 존재를 정초하는 힘은 경험이 진행될수록 커지고, 경험과학이라는 형식으로 합리화(Rationalisierung)가 진행될수록 커진다. 합리화는 모든 예외를 규칙에 재편입시키고, 모든 비존재에게 어떤 존재에 속하는 가상을 배정한다. 그리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경험의 힘은 (이성 권력인) 압도적 권력(Gewalt)으로 커져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