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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리브리스

주네, 《꽃피는 노트르담》

 

 
(말하면서 꿈꾸는 사람, 눈앞에 있는 나를 관통하거나 우회하여 어딘가 먼, 장소 없는 장소와 맞닿아가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적확하게는, 사랑할 수밖에 없게 이끌려 간다. 그는 아폴론의 신탁을 향하여 품을 열어젖혀 눈먼 예언자, 가끔 얼굴을 찡그리곤 지상으로 스러진 말들을 엮을 때는, 촛농이 흐르는 손으로 잠자코 밤의 능선을 건너가는 순례자. 그리고 모든 작가들은, 모든 사람들이 대상의 현존을 위하여 초월적 객관의 들뜬 속삭임과 비밀스럽게 입술을 얽듯이(이러한 물자체, 초월, 종교성은 정말 수수께끼이다), 그들 문장 너머의 무엇인가와 관계한다. 그리고 주네가 황홀경 속에서 몸을 섞는 그것은 이 한 문장 속에 집약될 수 있겠다. '그는 (...) 허옇고 길쭉한 촌충들이 고리처럼 구불구불 감아오른 반파된 기둥들의 그리스풍 배경과 더불어 꿈에 어울리는 광휘를 두르고 있었다.' 관계 직후에 끓어오르는 가래침. 신성함과 경멸스러움의 완벽한 악몽 같은 직조, 끔찍하게 아름다운 혐오감과 허덕임. 흐드러진 구토 속에서의 법열, 세상의 모든 오물을 애욕하며 타오르는 불길. 그의 글 앞에서 나는 소돔 120일의 책장과 관계할 때만큼이나 망설인다. 이 신탁을 위해 감히 눈멀 수 있을까? 개처럼 기면서 웃고, 아니, 보다 강렬한 쾌락을 위해 울 수 있을까? 지라르가 말한 바대로, 희생양은 성스럽지만 희생됨으로써 비로소 성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생되어야지 자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네의 글을 마주했을 때 우리의 지성은 머리채가 붙잡힌 채 울어야 한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되 주인을 탐하는 노예일 때, 채찍질 속에서 보다 비참하고 수줍게,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꽃핀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 앞에서 나는 계속, 이제 막 초조를 맞이한 어린아이처럼 불행하고도 달큰한 예감 속에서 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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