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하게 아무도 모르는 이 글을 조우하신 분께
이 글은 당신이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데 끔찍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멀스멀 당신의 머리를 파고들어 분리할 수 없이 결착되고 완전히 망쳐놓을 수도 있습니다.
애원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유령이 출몰하는 숲처럼, 언제나 상당한 날조에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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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공법과 그 체계 그리고 법/권리(Recht) 개념의 참된 실현으로서 영원한 평화
칸트,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 §§43-62 발제
조금 긴 서론:
칸트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의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Rechtslehre)」에서
공법(öffentliche Recht)에 이르는 체계 개괄
우선, 윤리형이상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로부터 왜 법이론이 나오고, 왜 우리는 그의 최종장으로서 공법을 논의하게 되는가? 이를 위하여 나는 극히 오래되었지만 또한 여전히 극히 고동치는 어떤 개념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즉, 우리들의 삶이다.
칸트에게서, 욕구 능력이란 자기의 표상들을 통해 그것들이 표상하는 대상들의 현실성의 원인이 되는 한 존재자의 능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 능력의 법칙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이 바로 생(生)이다(MS, AB1; KrV, A16-17). 그리고 우리들의 의사(Willkür)는, 대상들을 만들어내는 자기의 행위 능력에 대한 의식과 결부된 욕구 능력으로서 생을 만들어간다(MS, AB5 참조). 어떻게 그러한가? 바로 단지 개념이면서도, 스스로 대상의 가능 근거가 되는 ‘목적’을 세움으로써 그러하다. 그리고 (보편적인 절차의 원칙들을 준수하며 일어나는) 이러한 목적의 실현이 바로 실천이다(TP, A201). 이때 만일 ‘순수 이성’이 의사를 그 홀로 충분하게 규정할 수 있다면, ‘순수 실천 이성’은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당위의 개념을 함유하는 도덕법칙에서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유일한 가능 근거로서 의지(Wille)의 속성인 자유는 인식될 수는 없고 다만 추론되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실천’ 법칙 속에서 그의 객관적 실재성을 증명하고 또 증명해낼 것을 숭고한 목소리로 명령하고 있었다.
즉, 실천이성비판은 경험적으로 조건 지어진 ‘실천 이성’을 넘어 의사를 온전히 규정하고자 하는 ‘순수 실천 이성’의 존재를, 그러므로 자유 법칙의 존재와 그에 따라 행위해야만 하는 인격에서의 인간성을 함께 입증했다. 따라서 이제 이 순수 실천 이성은 그 자신으로부터 나와 경험에서의 실천을 겨냥한 하나의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 분명하며, 그에 대한 탐구가 바로 일체의 경험적 영리함을 도외시한 채 ‘어떻게 행위해야만 하는가’를 다루는 윤리성(Sittenlichkeit)/도덕성(Moralität)의 이론, 다시 말하여 의사의 규정 근거로서 단적으로 필연적이고 선험적인 실천 법칙들의 체계인 윤리형이상학이다.
자유라는 개념이 소극적으로는 감성적 충동으로부터 의사 규정의 독립성이고, 적극적으로는 실천적인 순수 이성의 능력 그 자체라고 한다면, 실천 법칙들은 곧 자유의 법칙들이다. 이러한 자유 법칙들을 자연의 법칙들과 구별하여 도덕적/도덕학적(moralisch)이라 일컫자. 자유 법칙 내지 도덕 법칙들의 체계는 다시 그 법칙수립의 방식에서 두 하위 구분지를 갖는다. 어떠한 외면적인 행위들을 의무로 만들면서, 의무의 이념 외에 다른 정념적 동기를 허용하며 단지 행위들의 합법칙성과만 상관하는 그러한 법칙수립 내지 법칙은 법학적/법리론적(juridisch)이다. 한편, 어떠한 내/외면적인 행위들을 의무로 만들면서, 또한 그러한 의무의 이념 자체를 동기로 만드는 그러한 법칙수립 내지 법칙은 좁은 의미에서 윤리학적/윤리론적(ethisch)인 것이다. 법법칙이든 덕법칙이든, 실천 법칙은 ‘필연적인 자유 행위’라는 책무[구속성]를, 그리고 그러한 구속성의 질료로서 구체적 내용을 갖는 의무를 낳는다. 이 중에서 이제 우리의 당면한 관심사는, 그에 대한 외적 법칙수립이 가능한 법칙들의 총체로서 ‘법이론’이고, 상술한 바에 따라 이러한 법법칙은 구속력을 가지면서도 또한 외적 법칙수립이 가능한 법의무를 낳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법이론이 행위의 외적인 합법칙성에만 상관한다면, 법법칙의 지시명령이 갖는 책무성은 본래적으로 한 인격과 다른 인격이 갖는 외적이고 실천적인 관계까지만 그 효력이 미치고, 그들의 의사가 갖는 목적에 관해서는 논외이다. 따라서 법이론에서 물어지는 것은 다만 양쪽 의사의 관계에서의 형식, 즉 서로의 행위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서로의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가이고, 그러므로 법이란, “그 아래서 어떤 이의 의사가 자유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다른 이의 의사와 합일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MS, AB33)이고,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법법칙은 “너의 의사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법의 개념과 법법칙은 윤리형이상학의 일부로서 무엇이 정당한/법적인/옳은 것인가를 최초로 교설한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순수 수학에서 그 객관의 속성들을 (이를테면 삼각형과 같은) 개념으로부터는 직접적으로 도출할 수 없고, 단지 순수 직관에서 저 개념의 선험적인 현시, 즉 개념의 구성을 통해서만 드러내 보일 수 있듯이, 법 개념 역시 그 개념의 구성에서 비로소 자신을 현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작용/반작용의 동등성 법칙 아래 있는 물체들의 운동과 유비되는 ‘교호적 강제’다. 작용의 방해와 달리, 저항은 오히려 작용의 촉진이자 그 작용과 화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약 모종의 자유 사용 자신이 자유의 방해, 즉 부당한/불법적인 것이 된다면, 이에 대립되는 강제는 오히려 방해의 저지로서 자유와 화합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정당한/법적인 것이다. 즉, 모순율에 따라 자유가 동시에 방해로서 자유 아닌 것일 수 없다면, 작용이 반작용과 결합하듯이 자유는 불법적인 것의 저지로서 강제하는 권한과 결합한다. 따라서, 이제 법은 다시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화합하는 교호적인 강제의 가능성”으로서 현시된다. 즉, 이 초월적 지대에서 법 개념은 실천 법칙이라는 지위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흘러나왔던 의무 개념을 씨앗으로 삼아, 경험 속에서 타인에게 의무지울 수 있는 능력으로서 권리/법(Recht) 개념으로 개화할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이렇듯 올바른/옳은/정당한 것에 따른 교호적 강제는 곧은/똑바른 것에 의한 강제로서 다시금 굽은 것, 기울어진 것 양측과 대립하는 선험적 직관으로도 현시되는데, 전자는 직선, 후자는 수직선으로서 이를 통해 공간을 오차 없이 정확하게 똑같은 여러 면으로 분할하는 직관을 표상한다. 여기서의 유추는 즉, 선험적 직관에서 현시된 성질들이 우리의 경험적 세계를 구성하면서 타당하게 적용되듯이, 법 개념은 필연적으로 각자에게 자기 것이 정확하게 분할되는 것, 다시 말하여 분배적 정의로 우리 인간을 이끌고 갈 것임을 그 개념의 구성 속에서 선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 교호적 강제라는 개념은 그러한 개념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근거, 즉 자유를 품수한 동물로서 ‘인간’이라는 오로지 바로 그 힘에 의해 귀속되는 권리를 형이상학적으로 가장 먼저 비춘다. 이는 즉 태어난 순간부터 보편적 법칙에 따라 교호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타인에 의해 구속받지 않을 독립성, 즉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인간의 질적 특성을 이른다. 이러한 인간들 사이의 본유적인 평등으로서 본유권[생득권]은 ‘너 자신을 타인의 한갓된 수단으로 만들지 말고, 그들에게 동시에 목적이 되어라’[1], 즉 법/권리 개념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정당한, 법적인 인간이 되어라(권리주체로 자신을 제시하라)’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순전히 인격에서의 인간성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책무로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유 행사는 언제나 제한되어야 함을 뜻하는 보호적 정의(iustitia tutatrix)와 자연법의 토대를 이룬다.
다시, 이러한 본유권은 내적이고 형식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가능케 하는 상위 법/권리 개념 아래의 한 구분지이면서도 동시에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법/권리 개념을 정초하는 자유의 원리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까닭에, 법이론에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 즉 선천적으로는 가질 수 없는 취득권이다. 사법이 주요하게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질료가 개입된 외적인 권리, 즉 인격들 사이의 교호적인 거래에서 무엇이 법적인가/정당한가 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법의 원리 및 원칙들이 칸트 법이론 체계의 제1편을 구성한다. 이때 의사는 외적 대상과 관련하여 크게 물권, 대인권, 그리고 여기에서 논의하기는 어려우나 칸트가 자신의 이론에서 특유한 것으로 내세우는 대물적 방식의 대인권을 가질 수 있는데, 공법에 대한 논의로 달려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은 왜 이러한 사법의 상태는 공법으로 나아가야만 하며, 또한 나아갈 수밖에 없는가이다.
칸트는 발생적 의미에서 그로부터 의사의 다른 모든 외적인 대상에 대한 권리주장이 뻗어나오는 ‘근원적 취득’은 특히 현상에서 가장 실체적인 것으로서 그 위를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되는, 토지에 대한 일방적 의사의 표시, 즉 선점으로부터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데, 형이상학적으로 물권은, 물건이 나에게 권리나 의무를 질 수는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물건에 대한’ 나의 권리일 수는 없으며, 오직 “물건의 어느 점유자에게도 대항하는 권리”(MS, AB80)로서 대인권으로부터 존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토지를 점유한다는 것도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스스로 그의 점유를 거부한’ 토지에 대한 관계를 의미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교호적으로 그것의 사용을 금지하면서 결합해 있는 모든 이들의 근원적 합동 점유(물론 이때 점유는 물리적 점유일 수는 없으며, 시공간을 도외시하고도 나와 ‘구별되면서’ 여전히 나의 의사의 가능한 대상으로서 ‘세력 안에’ 놓이는 것을 의미하는 선험적-예지적 점유[2]로 전제되어야만 한다)로부터 일정 부분의 토지를 시공간적으로 ‘선점’하면서, 그러한 물리적 점유취득으로부터 경험적 권원을 얻어 이제 다른 인격의 물리적 점유는 침해로 규정되고, 따라서 이러한 침해에 대항하는 권리를 얻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근원적 합동점유가 전제되는 까닭은, 한편으로는 애초에 내 손에 든 사과처럼 물리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은 ‘외적인’ 것에 대해서 나의 것이라고 권리주장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러한 취득의 조건으로서 나에게도 어떠한 점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단지 ‘일방적 의사’만으로는 타인으로 하여금 어떤 물건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한 사용을 삼가도록 하는 구속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속력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법칙수립, 즉 모든 사람의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에 의한(보편적 이성에 의한) 법칙수립으로써만 가능하며, 말하자면 근원적 취득에서 그 의지는 물리적 선점을 사적 사용의 조건으로 둔 것으로 전제된다(그렇지 않으면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은 도대체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의 상태는 곧 시민적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사법의 상태는 아직 상위의 의지로서 주권자를 놓고 입법하는 법적 상태가 아니고, 따라서 근원적 취득으로부터 다만 각자의 의사 합일로서 진행되는 사적 의사들 간의 계약에 이르기까지, 형식적으로는 인격들이 그렇듯 자연적/관습적으로 ‘무엇이 법적인가’를 규정하는 사법[3]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고 어떠한 강제로 서로를 위협한다고 해도, 각자에게 자기의 권리를 확정하는 공적 정의가 부재하므로 그 자체로는 전혀 불법적/부당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단지 그 자체로 교호적으로 타당한 기준을 끊임없이 다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은 폭력과 대치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법/권리 개념을 완전히 앗아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은 다만 잠정적으로만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이 취득되고 언제든 부정될 가능성이 있는 사법의 상태 내지 자연 상태에서, 공적 정의를 대표하는 도덕적 인격인 법정에서 무엇이 법적인가/권리 있는가 판정되는 공법의 상태 내지 법적 상태로 이행하기를, 외적인 것에 대한 확정적 권리주장의 가능 조건으로서 그들에게 선험적으로 내재한 법 개념에 따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즉 “시민적 체제[헌법]는, 비록 그 현실성이 주관적으로는 우연적이지만, 그럼에도 객관적으로는, 다시 말해 의무로서는 필연적이다”(MS, AB86). 그러므로 자연법의 보호적 정의(iustitia tutatrix)와, 사법의 교호적인 취득적 정의[교환적 정의, iustitia tutatrix]를 거쳐, 인간은 비로소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 아래서 구속력을 가지고 각자에게 자신의 권리/모든 취득을 유일하게 확정시킬 수 있는 분배적 정의(iustitia distributiva) 상태에 들어가기를 서로에게 요청, 달리 말해 정당하게 강제한다.[4] 이상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 『윤리형이상학』을, 다시 윤리형이상학이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를 낳고 이 법이론이 자연법에서 사법을 거쳐, 공법의 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개괄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의 법칙수립 아래 구성원들 각자의 권리/모든 취득을 구속력 있게 보장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서 공법의 원리와 원칙들, 그로부터 분여되는 체계(국가법, 국제법, 세계시민법) 각각과, 이러한 법 개념의 최종 귀결에 이르러 이념으로서 자유가 그의 법칙들, 특히 외적 법칙수립을 통하여 의사를 규정함으로써 다다르고자 했던 궁극목적을 왜 생각해야만 하고 왜 그것으로밖에 생각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들 및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들에 대해 보다 내밀하게 들여다볼 것이다.
공법(öffentliche Recht)
제1절 국가법(Staatsrecht)
§§ 43-44(44-43) 사법적 상태에서 공법적 상태로의 이행의 (이성) 필연성, 공법의 체계와 국가
외적 법칙수립에 의한, 권위 있는 법적인 강제를 필연적이게 만드는 것은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행실(Tat), 즉 단지 비교적인 필연성만을 증명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공법의 상태에 들어서게 만드는 것은 객관적인 이성 필연성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인간들이 아무리 자유를 품수한 동물이고 그 이념에 의해 자연적으로 그러나 스스로 추동되어, 자연법과 사법의 권역에서 법/권리 개념을 전개시킨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는 언제든 관습법을 붕괴시키는 폭력을 저지할 상위 강제력으로서 보편적 의지의 외적 입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자연 상태다. 심지어 각자 자신이 옳거나 선하다고 믿는 바에 의해서 자유의 공존은 배반당하고, 그럼으로써 자유 개념은 스스로 붕괴할 수 있다[5]. 즉, 사법적 상태는 ‘도대체 무엇이 법적인가/권리 있는가’에 대한 잠정적 해답을 내놓지만, 그 해답은 선의나 악의 어떤 것에 의해서든 불시에 폐기되어 교호적인 폭력으로 변모할 수 있고, 이는 본질적으로 비-법적일 수밖에 없다. 법/권리(Recht)란, 바로 이러한 사태의 방지로서 자유의 사용이 그 기반인 자유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형식적 규정, 즉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어느 누구와의 자유와도 화합하는 전반적이고 교호적인 강제’(MS, AB35-36 참조)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 따라서 자유의 이념으로부터 법/권리 개념을 낳은 이성은 그 개념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역사적으로는 모든 취득의 현실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각자에게 자기의 권리를 확정하는 공법의 상태를 요청한다. 스스로의 법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달리 말해 자신의 권리,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의 취득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7], ‘누구나 자기의 것을 어느 타인에 대항해서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라’는 것은 따라서 하나의 이성적 법의무이다.
그러므로 법적 상태란, 오직 그 아래에서만 자신의 권리를 확정적으로 분유받게 되는(teilhaftig werden) 조건들을 함유하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적 원리가 바로 공적 정의(öffentliche Gerechtigkeit)라고 일컬어진다. 물론 사법적 상태도, 인간은 서로 자유를 제한하여야 한다는 자연법의 보호적 정의와 사적인 인격들 간 의사 합일을 통하여 계약하도록 하는 사법의 교환적 정의를 통하여 잠정적으로나마 각자에게 자기 것을 규정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규정은 상술하였듯 언제든 새로운 강제 내지 폭력을 통하여 깨질 수 있고, 외적 법칙수립만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구속성[책무]과 강제력을 통하여 각자에게 자신의 권리/모든 취득을 확정적으로 배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자연 상태의 것이었다. 이제, 공적 정의로서 이러한 분배적 정의만큼은 오로지 국가형식 아래서만 실현될 수 있다. 국가가 바로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의 외적 법칙수립을 통하여 다수 인간들이 하나되는 것이고(자기강제), 또한 오직 이로써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권리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외적 강제).
1) 공법의 정의와 구분: 바로 이러한 국가 혹은 국가들의 것으로서, 법적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의 행위로 여겨지고 여겨져야만 하는 일반적 공포(Bekanntmachung)를 요구하는 법칙[법률, Gesetz]들의 총체가 공법이다. 이러한 개념 아래서 공법은 한 국민[민족, Volk]으로 합일된 다수 인간들을 위한 것이거나(국가법), 또한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법칙[법률]들의 체계로 구분될 수 있다(국제법, 세계시민법).
2) 한 국가 자체에 관해: 한 국가에서, 이러한 공법으로써 권리를 분유하기 위해 그들을 합일시키는 의지 아래의 법적 상태에 있음을 들어, 헌정 체제/헌법(Verfassung)을 가진다고 한다. 이러한 법적 상태는 또한 개인들의 측면에서 시민적 상태(der bürgerliche Zustand)라고도 일컬어지며, 이 개인들의 [합일된] 전체가, 시민 혹은 신민이기도 한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는 바로 국가다.
3) 국가들 서로에 관해: 한편, 이러한 국가는 본질적으로 각자의 취득을 확정하려는 공동의 이해관심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는 형식에서 볼 때는 공동체이기도 하며, 다른 국민들과의 관계에서는 또한 [자신의 권리를 찾는] 하나의 세력(Macht)[하나의 도덕적 인격]이다. 또한 추정적으로 공통의 선조에게서 태어난 자들(MS, B246 참조)로서 국가를 이루는 이들이자 그 통합체 자체로서 민족(Stammvolk(gens))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며, 이에 따라 독일어에서 국제법은 아주 올바르지는 않지만(MS, B246 참조) ‘민족들의 법(Völkerrecht)’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따라서 자신의 권리를 분유받는 인격들 사이의 관계인 법적 관계를 만들어 내기 위한 법칙들의 총체로서 공법의 보편적 개념에 따라, 국가법뿐만 아니라 [각각 자신의 권리를 갖고자 하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으로서] 민족 간의 관계도 생각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의 성질은, 지구 표면이 구면, 즉 폐쇄적인 통일체로서 인간들을 자연 필연적으로 근원적인 전-지구적 공동체로 이끈다는 사실과 함께(MS, AB84 참조)[8] 국제법과 세계시민법의 이념으로 인간을 이성-필연적으로 이끈다. 이것이 법적 상태의 가능한 세 형식(국가법, 국제법, 세계시민법)이며, 이 중 하나만에라도 외적 자유를 제한하는 이성적 원리가 결여되어 있다면, 자유의 이념에 따라 통일된 질서 속에 세워져야만 하는(그렇지 않다면 이는 원리들의 능력이자 “그 자연본성상 건축술적인”(KrV, A474=B502) 이성의 체계가 아닐 것이다) 법/권리 개념의 체계 역시 불완전한 것으로 결국 붕괴하고 말 것이다.[9]
§§ 45-49 이념으로서 국가와 그 필연적 형식(근원적 계약, 정치적 삼위일체)
국가란, 법법칙들(Rechtsgesetzen) 아래에서의 다수 인간들의 통일체(Vereinigung)이다. 이 법법칙들이 실정법적인 것이 아니고, 법/권리 개념으로부터 선험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인 한, 이러한 국가도 국가 일반의 형식을, 즉 순수한 법원리들(Rechtsprinzipien)에 따라 존재하는 이념에서의 국가를 표상한다. 따라서 이 이념은 하나의 공동체로의 어떠한 현실적인 합일에서도 내적 규범이 된다.
이때 순수한 법원리들 내지 법법칙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추정될 수밖에 없는데, 앞서 법 개념은 ‘그 아래서 어떤 이의 의사가 자유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다른 이의 의사와 합일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MS, AB33)로 정의되었으며, 이에 따라 법의 보편적 원리는 ‘행위가 또는 그 행위의 준칙에 따른 각자의 의사의 자유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각 행위는 법적이다/권리가 있다/옳다’(MS, AB33)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보편적 법법칙은 ‘너의 의사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법 개념은 다시 작용-반작용의 법칙 아래 물체들의 상호작용에 유비되어 선험적인 직관에서 자신을 현시함으로써(개념의 구성) 경험에서의 구체적 적용 방식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필연적으로 화합하는 교호적 강제의 법칙”(MS, AB37)이었다. 이것이 바로 타인에게 ‘의무지움’을 특유하게 포함하는 법/권리(Recht) 개념이다. 또한 그것은, 굽지도 기울어지지도 않은 직선들에 의한 공간의 분할로써, 즉 각자에게 자기 것이 정확히 분할되는 ‘분배적 정의’로서 자신을 드러냈다[10]. 그리고 이러한 분배적 정의의 요구는 자연법(‘정당한 인간이 되어라’)과 사법(‘누구에게도 불법을 행하지 말라’)의 명령의 결합이었고, 이를 위해 ‘각자에게 자기 것이 얻어질 수 있는, 타인들과 함께하는 그러한 사회에 들어가라’는 명령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법/권리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이념에서의 국가’는 보편적 법칙들에 따른 전반적이고 교호적인 강제를 통하여, 분배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어떤 형식을 가진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칸트는 그러한 ‘법의 정신’이 지시명령하는 형식이 크게 두 가지,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를 상위의 입법자이자 주권자로 세우고 그 아래서 자유롭게 강제되는 1) ‘근원적 계약’과, 그 필연적 구현 체계인 2) ‘정치적 삼위일체’라고 본다.
1) 근원적 계약이란 무엇인가? 개별 인격들은 인접 거주 등의 자연적 조건과 함께, 각자의 취득을 확정하려는 공동의 이해관심 하에 한 ‘국민(Volk)’으로서 결합되고자 하고, 이를 위한 오직 유일한 가능 조건은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화합하는 보편적인 강제 아래 모두가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교호적인 강제’이기 위해서는, 자유롭다는 의미에서는 개별 의사의 자기강제이면서도(의사의 자유를 타인의 강요하는 의사로부터의 독립성으로 보았을 때), 보편적으로 교호적이라는 의미에서는 개별 인격들의 차원을 벗어나 전방적인 구속성[책무]으로 자유의 사용을 정당하게 저지할 수 있는 외적 강제여야만 한다.
여기서 두 가지 중간 결론이 따라나온다. 1. 이러한 구속력은 오직 보편적 이성의 법칙만이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자유로운 자기강제와 외적 강제가 무모순적으로 조화되기 위해서는, 앞선 자기강제의 의미는 단지 ‘타인의 강요하는 의사로부터의 독립성’에서 ‘감성적 충동으로부터의 독립성’이자 ‘실천적인 순수 이성의 능력에 의한 의사 규정’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즉, 단순한 ‘임의’가 아니라, 이성적인 자기강제라는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로 재규정되어야 한다. 2.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재규정이 미치는 범위는 한정되어야 한다. ‘교호적인 강제’가 가능한 것은, 오직 자유의 사용으로서 외적 행위 내지 그러한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준칙뿐이기 때문이다. 내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오직 자기강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호적인 강제 권한으로서 법은 오직 외면적인 법칙수립에만 관여한다. 그렇다면 다시 이 두 가지 결론으로부터 최종 결론이 따라나온다. 3. 이렇듯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교호적인 강제를 가능케 하는 입법자는, 한편으로는 개별 인격들에게 내재한 실천이성이면서, 한편으로는 외재하는 것으로서 합일된 의지(Wille)라는 보편적 실천이성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실천이성의 지배력은 단지 외적 법칙수립에 제한된다.
이제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하나다. 왜 이러한 국가 구성 행위는 ‘계약’인가? 4. “자기 소유를 타인에게 이전하는 것이 양도이다. 그것에 의해 일반적으로 어느 자의 자기 것이 타자에게 넘어가는, 두 인격의 합일된 의사의 행위가 계약이다.”(MS, AB98) 근원적 계약에서, 국민이 되고자 하는 개별 인격들 모두는 자신의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자유”(MS, A169)를 전적으로 포기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가 종속되는 타자는 보편적 실천이성이기 때문에, 그는 이를 통해 국민이자 시민으로서 자유를 곧바로 되얻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존성은 그 자신의 법칙수립적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MS, A169) 이것이 근원적 계약의 특유성이다. 즉 자유가 넘겨지지만 또한 넘겨지지 않는 이 계약에 의해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는 구성원들의 입법자이자 주인이 되면서도, 또한 그 의지가 보편적 실천이성 자체임에 의하여 구성원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따라서, 이렇듯 법칙수립을 위해 합일된 사회의 구성원은 한편으로 공동의 이해관심 속에 합일된 의지에 의해 각자 자신의 취득을 확정짓는 하나의 국민[민족]을 이룬다. 또 한편으로, 이 국가 구성원들은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에 대해 지시명령자-복종자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신민(Untertan)의 지위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의 외적 입법 아래에서 각자 자신의 권리를 분여받는 법적 상태에 들어간다. 이것이 시민의 지위다. 따라서 시민의 본질은 세 가지이다. 자신의 이성으로 동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법률 외에는 어떤 법률에도 따르지 않을 법률적 자유, 입법자이자 주권자로서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 외에는 상위자를 인정하지 않는 시민적 평등,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타인이 아니라 각자의 권리와 주인됨에 힘입어 실존하는 자립성(Selbständigkeit)[11]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성립이, 이념으로서의 국가를 위해 선험적으로 전제되는 근원적 계약이다.
2) 정치적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이렇듯 보편적 법칙들에 따른 전반적이고 교호적인 강제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것인, 근원적 계약을 선험적으로 상정하여 성립되는 ‘국가’는 또한 건축술적인 이성의 이념으로서 분배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필연적 구현 체계를 갖는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로부터 나오는 세 지배력[권력, Gewalt][12]이자 삼중의 인격(Person)이다. 이러한 세 지배력은 체제의 완벽성을 위해 병렬되어 서로를 보충하는 것이다. 한편, 이들은 또한 각자 고유의 원리를 통해 서로를 보조하는 동시에 월권을 견제하면서 상호 종속하는데, 그럼으로써 하나의 상위 인격의 지시명령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동일 본질(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을 갖는 세 위격(hypostasis)으로서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적 삼위일체이다.
구체적으로, 첫째는 법칙수립자[입법자]의 인격 안의 주인권(주권), 둘째는 법칙[법률]들에 따르는 집정자의 인격 안의 집행권, 마지막으로는 법칙[법률]에 따라 각자의 자기 것을 승인하는 재판관의 인격(‘정의를 대표하는 도덕적 인격으로서 법정’(MS, A140)) 안의 재판권이다. 이러한 체계는 하나의 실천적 이성추론(삼단논법)을 이룬다. 즉, 입법자는 의지(Wille)의 법칙을 내용으로 갖는 대전제를(모든 사람은 죽는다), 집정자는 그러한 법칙에 따라 어떠한 대상을 그 법칙의 조건 아래 포섭하는 소전제를(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리고 재판관은 그 대상에게 법칙의 술어를 부여하는(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즉 무엇이 ‘법정에서’ 권리 있는 것인가 하는 판결을 내리는 결론을 표상하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 이때 집정자 내지 통치자(Regent)는 그 도덕적 인격에서 볼 때 정부(Regierung)로, 관료들을 임명하고 법칙에 따르는 여러 규칙들, 즉 훈령들과 같이 법칙과 달리 변경 가능한 명령들(Befehle)을 내림으로써 구성원들로 하여금 사례를 법칙 아래 ‘포섭시킬 수 있도록’ 만든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재판이란 국가행정관(재판관 내지 법정)과 국민의 대리인(배심원)이 함께, 그럼으로써 (오히려) 국민 자신이 집행권을 매개로 하여 법률을 적용하고, 각자에게 자기 것이 분여되도록 하는 분배적 정의의 개별적 행위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법정은 사법적 상태에서 개별 인격들이 희구하는 분배적 정의의 최종장이다[13].
보편적으로 합일된 의지를 함유하는 것으로서 이 세 지배력은 각자에게 특유한 존엄성을 갖는다. 즉,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과 관련하여 법칙수립자의 의지는 비난할 수 없는 것[책임 없는/의무지지 않는, irreproachable]이고, 최고명령자의 집행-능력은 저항할 수 없는 것(irresistible)이며, 최상위 재판관의 판결은 변경될 수 없는 것[번복될 수 없는, irrevocable]이다. 왜 그러한가? 대전제는 그 자신이 모든 법칙의 수립자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는 결코 임의적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며 ‘법칙’이기 위해서는 합일된 국민의지의 자기결정이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 국민이 그러한 법칙에 합치한다는 것이 모순되지 않기만 하면’(TP, A254) 어느 누구에게도 불법을 행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즉 인간에게 그는 마치 ‘순정히 권리만 갖고 의무는 없는 어떤 존재자(신)에 대한 관계’(MS, AB50)처럼 여겨지는 것으로, 비난하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소전제의 역할로서 정부는 사례를 포섭하도록 하여 그러한 법칙에 실질적 효력을 부여하는 국가 권력으로서, 그에 대한 내부의 저항을 진압하는 강제력 없이 법적 공동체의 존속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므로, 구성원들은 이에 저항할 수 없다. 그리고 이로부터, 불법을 행할 수 없는 입법자와 그 자신 법률에 따라 실질적으로 강제하는 자인 집정자에 대해서는 형벌이 가해질 수 없음이 따라 나온다. 이렇듯 두 권력에 대해 상술된 결론들은 후에 저항권 논의에서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성추리에서 대전제가 지성으로서 규칙을 표명하고, 소전제가 판단력으로서 법칙 아래 사례를 포섭하고, 마지막으로 결론은 앞 두 가지에 의한 필연적 귀결로서 이성에 의한 선험적 규정을 천명하듯이(KrV, B95-101(미정-확정-명증(필연)으로서 이성추리), B360-361 참조), 법률들 및 명령들을 적용하여 내려진 판결은 번복 불가능한 귀결로 상정된다[14].
의문은 왜 이러한 세 특수한 인격이 분할될 수밖에 없는가이다. 칸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에서 답한다. 첫째, (좁은 의미의) 지성이 규칙들의 능력일 때, 판단력은 규칙들 아래에 사례를 포섭하는 판별의 능력으로서 기능상 구분되듯이, 법칙수립자는 동시에, 동일한 인격에서 통치자가 될 수는 없다. 통치자는 입법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법칙[법률] 아래에 서 있는 자로서, 상위 인격으로서 주권자, 즉 타자에 의해 법률을 적용하도록 의무지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입법자와 집행자가 재판관일 수 없는 이유이다. 재판은, 신민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것을 분여할 어떠한 권력도 없는 구성원에 대해 행해지는 것으로 상정되며, 만약 입법자나 집행자 두 권력이 재판권까지 가져간다면, 이때는 그 자신 역시 국가의 성립을 위하여 의지를 합일한 자로서 근본적으로는 입법자이기도 한 시민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만 수동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분여받는 신민에 대해 판결하는 것이므로 (자기결정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불법을 행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재판관(법정)은 그 자신 행정관/관료일지라도 집권자와는 다른 인격으로서 분배적 정의를 대표하여야 하며, 또한 그에게 귀속하는 집행권을 매개로 국민이 그의 대리인으로서 배심원을 통해 함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지배력[권력], 즉 삼중의 인격을 통해서만 국가는 (실천이성으로서) 자유의 법칙들에 따르는 자율성을 가지고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답변에서는 이들이 다른 ‘도덕적 인격’이면서 같은 ‘물리적 인격’일 수는 없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51-52에서 보다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정치적 삼위일체를 통한 국가의 유지가 의미하는 ‘안전’은 국가시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행복은 전제적 정부나 자연 상태에서 훨씬 더 소망함직하게 나타날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해 오던 방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자율이 의미하는 안전은 다만 헌법이 법원리들에 최대로 합치하는 상태로서, 일찍이 이성의 법/권리 개념 자신이 그의 실현을 위해 책무 지우던 바로 그것이다.
§§51-52 전제정, 귀족정, 민주정과 참된 공화국의 이념
넓은 의미의 공화국(res publica)에서 나오는 세 권력은, 합일된 이성에서 선험적으로 기원하는 국민의 통합된 의지의 세 관계일 뿐이다. 이는 결국 국가원수라는, 객관적-실천적 실재성을 갖는 하나의 순수 이념을 이룬다. 그러나 주권자로서 이 국가원수는, 최고 국가권력을 표상하고 또한 실질적으로 국민의지에 이 이념의 효력을 미치는 물리적 인격이 없는 한에서는 단지 전체 국민을 표상하는 하나의 관념물일 뿐이다.
이제 이러한 인격, 즉 국가원수와 국민의지의 관계는 세 가지 방식으로 개념화될 수 있다. 즉, 1인이 만인을, 또는 서로 간에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소수가 여타 모든 이를, 또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지배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국가형식은 전제적이거나, 귀족제적이거나, 민주제적이다. 이때 전제적(autocratic)이라는 말 대신 군주제적(monarchist)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군주는 단지 최고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하지만, 전제군주는 그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전제군주는 그 자신이 주권자이고, 군주는 단지 주권자를 대표한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전제정은 가장 단순한 형태로서 1인 즉 왕과 국민의 관계로만 구성되고, 1인만이 입법자이다. 귀족정은 이미 이 두 관계로부터 복합적으로 나온 것이다. 즉 이 국가형식은 입법자인 귀족들이 우선 주권자를 구성하고, 이 주권자가 국민과 맺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민주정은 가장 복합적인 형식으로, 먼저 하나의 국민을 형성하기 위해 [공동의 이해관심 하에] 서로의 의사를 통합하고[15], 그 후에 하나의 국가(공화국)를 형성하기 위해 국가시민들로서 의지를 합일하고, 그 다음에 이 통합된 의지가 주권자로 놓여야 한다.
법의 운용의 측면에서 [실용적으로] 생각해 보면 물론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법/권리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것은 쉽게 폭압적인 정치(독재정치)를 부른다는 점에서 국민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다. 국민 모두가 수동적으로 상위자 한 명에게 순종한다는 이러한 단순성이 강제법을 통해 국민을 합일하는 기구에서 합리적인 준칙인 것은 맞지만, 이 경우에 국가시민으로서 신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군주가 선하다면, 군주정이 가장 좋은 국가 체제’라는 격언은 국가의 행정관이 최고의 통치자로 만들어지는(군주가 통치자일 때, 그가 선한) 체제가 바로 최선의 국가체제라는 단지 동어반복적인 참말로서, 즉 어떤 국가형식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로서, 국민의 헛된 위안일 뿐이다.
그러나 여하간의 통치 체제에 대해서 그 역사적 증거를 탐색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야만인이 법에 종속되었다는 문서를 작성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게다가 우리는 인간의 자연본성을 고려할 때 어떠한 사회/공동체가 폭력과 함께 발생했을 것임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더하여서, 현재 존재하는 헌법을 강제로 즉 폭력적으로 바꾸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는 일은 처벌받을 만한 일이다. 이러한 변혁은 분명 입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터이고, 오히려 폭동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법칙수립적 이성의 부정으로써 모든 시민적-법적 관계를, 모든 법을 전복시키는 일이고, 이는 시민적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해체를 불러올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새로운 근원적 사회계약이 상정되어야만 할 것이다(이러한 연유로, 또한 만약 일단 혁명이 성공한다면, 아무리 그 혁명이 부당했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새로이 대두된 주권자에 대하여 순종하여야만 한다. 국가를, 그럼으로써 모든 법과 실천이성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주권자에게는 만약 현존하는 국가체제가 근원적 계약의 이념 즉 국민이 하나의 국가를 이룩하는 데 본질적인 그러한 형식과 잘 조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변경하는 일이 책무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 변경은 국가가 헌법을 앞선 전제정, 귀족정, 민주정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단순히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주권자는 전체 국민 의지가 결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결정할 수가 있다. 심지어 민주제로의 변경도 상황에 따라서는 국민에게 불법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국가형식은 시민적 상태에서 본래 다만 입법의 문자(littera)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것이든] 오랜 습관에 의해 주관적인 필연성과 타당성을 가진다고 여겨지는 한에서는,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근원적 계약의 정신(anima pacti originarii)은 주권자로 하여금 통치방식을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유일하게 적법한 헌정인, 순수 공화국의 체제에 그 작용결과에서(in its effect) 합치하도록 하고, 단지 국민의 신민성을 낳는 데 사용되었던, 즉 국민을 그저 굴복시켰던 저 오래된 제정법규적 형식들을 근원적인 이성적 형식으로 해체할 책무성을 지게 한다. 이러한 근원적 형식만이 자유를 모든 강제의 조건으로 삼으며, 어떤 특수한 인격에 의존하지 않고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하게 지속적인 국가체제이다. 이는 저 국가형식들이 단지 수에서만 다르게 모든 권력을 입은 도덕적 인격들을 대표하는 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이때 국가의, 그러므로 모든 이의 권리는 단지 잠정적일 뿐이며 시민 사회의 절대적-법적 상태는 인정될 수가 없다.
모든 참된 공화국은 국민들이 모든 국가시민에 의해 합일된, 자신들의 대표자를 통하여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민의 대의제이다. 그러나 국가원수가 국왕이든, 귀족 계급이든, 또는 전체 국민이든 간에, 인격으로서 국민 자신을 대표하게 하자마자, 그 합일된 국민은 한낱 주권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권자 자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 합일된 국민 안에 근원적으로 최고 권력이 놓이고, 순전한 신민으로서 개인의 모든 권리는 이러한 합일된 의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강제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16].
시민연합체의 본성에서 나오는 법적 작용결과들에 대한 일반적 주해[17]
A 저항권에 관하여
최고 권력의 근원은 그 권력 아래 구성원들에게 실용적인 의도에서, 아직 의심할 수밖에 없는 권리인 것으로 탐구되어서는 안 된다. 근원적 계약의 정신이 말해주듯이, ‘최고의 국가권력’이라는 것에 대해 ‘법적으로 효력 있게’ 판단하기 위해서 국민은 이미, ‘보편적으로 법칙수립하는 의지 아래에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상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이념으로서 국가의 필연적인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성이 제시하는 선험적인 필연성이고, 따라서 근원적 계약과 같은 것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찾을 필요도 없고, 찾아서도 안 된다. 법칙은 마치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보편적 실천이성 자체, 최고의 흠 없는 법칙수립자로부터 나온 것으로 표상되고, 그런 한에서만 국가는 그 개념상 존속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의심하여 그 효력을 일순간 정지시키는 것만으로도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위자는 신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명제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현존하는 법칙수립적 권력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그로써만 공동체가 존속하고 자신의 권리가 확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실천적 이성원리를 언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지배자는 [신이 그러하듯] 순정히 권리들만을 가지고, 의무를 갖지 않는다는 명제가 귀결된다. 이 또한 국가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근거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를테면 ‘지배자의 기관’인 통치자가 설령 과세 등에서 평등의 법칙과 같은 법칙[법률]을 위반한다고 해도, 신민은 그 부당함에 대해 [펜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lodging a complaint), 결코 [강제력으로] 저항해서는 안 된다[18].
그러므로 어떠한 헌법도 최고명령자가 법칙을 위반한 경우에 그를 제한할 권력을 국가 내에서 가능하게 할 조항을 함유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국민들이 그의 법칙수립적 권한에 힘입어 그의 의회 대의원들을 통해 정부에 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한다면, 개념적으로 이들은 그러한 제한으로써 제한받는 자보다 동등하거나 더 큰 위력을 가져야 할 텐데, 따라서 신민들에게 명령하고 그들을 방호하며 법적으로 효력 있는 판결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럴 경우에는 이들이 최고명령자일 것이며 이는 자기모순이다. 한편 실질적으로 이러한 대의원들은 그렇게 위임받은 저항의 권력으로부터 자신의 이해관심을 충족하고자 할 것이고, 결국 그러한 저항권은 법이 아니라 단지 국민에게 반항의 가상을 심어주는, 일부 대의원들을 위한 영리한 원리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저항이 조금이라도 가능할 수가 있다면, 그것도 어디까지나 스스로 집행권의 행위를 저지르는 능동적인 저항이 아니라, 단지 의회에서 정부가 요구하는 바를 순순히 따르지 않는 소극적인 저항, 거부권만이 겨우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칙수립적인 국가원수에 대한 국민의 적법한 저항도 가능하지 않다. 그의 보편적-법칙수립적인 의지에 의해서만 법적 상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에 대한 어떠한 반란의 권리도 없다. 이러한 권리는 공적 법칙수립 자체를 절멸시킬 권리로서, 그 자체로 모순이다. 어떻게 신민인 국민이 동일한 인격에서 주권자가 되는 규정이 ‘공적 법칙수립’으로서 가능할 수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항권을 통해서 국민과 주권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재판받아야 한다면, 국민 자신이 또한 공적 정의로서 재판관까지 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거의 견딜 수 없게 여겨지는 최고 권력의 오용조차도 견뎌내야만 하는 국민의 법적인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만일 결함 있는 국가체제를 변경하고자 한다면, 이는 결코 정당하게는 입법권에 관련한 일일 수는 없고, 주권자 자신에 의한 집행권의 개혁으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군주의 폐위가 일어날 수 있다면 이는 자원한 퇴위로서 그의 권력을 국민에게 반납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최고 인격에 대해서는 훼손 없이 그를 해임하여 사적 인격으로 되돌려 놓은 것으로 생각되어야만 하겠다. 이때 이를 강요한 국민의 범법은 그 자체로 (이미 이 개념이 법이론에서 예외적인 위치이기는 하지만) “나 자신의 생명을 잃을 위험한 경우에 나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은 타인의 생명을 탈취한 권한”(MS, AB41)으로서 긴급권의 구실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군주에 대한 공식적인 처형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법칙[법률]에 대한 모든 위반은 범죄자의 준칙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감성적 충동에 이끌려 행위한 것일 터인데, 그렇다면 자유로운 존재자라 할 수 없을 것이고, 그에게 귀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19]. 이때 이러한 위반은 단지 법칙에 대한 예외로서, 법칙의 권위를 회피하면서 일탈하여 발생할 수도 있고, 혹은 도리어 법칙의 타당성을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그러한 법칙의 권위를 거부하고, 법칙에 의도적으로 반하여 행위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극도의 사악성이 어떻게 인간에게서 (개념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지는, 이것이 자연 기계성에 따른 일은 아니기 때문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군주에 대한 공식적인 처형은 바로 이러한 일로, 주권자와 국민 사이의 관계의 이성적 원리들을 의도적으로 온전히 전도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 자신이 주권자의 지배자가 되고, 법이 아니라 폭력이 가장 신성한 것이 되는데, 이는 마치 ‘국가에 의해 가해진 자살’과도 같은 이해 불가능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혁명이 일단 성공하여 새로운 체제가 만들어졌다면, 물론 이는 시작과 완수에서 부당성을 지니고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부당성이 신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질서에 복종하는 책무까지 무화시켜 버리는 것은 아니다. 신민들은 그들이 신민이고, 공동체에 속하고, 국가시민의 신분을 가진 이상 현재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공권력의 법칙수립적 권위를 존중하고 성실하게 순종해야 한다. 이때 만일 국가시민의 신분으로 되돌아간, 폐위된 군주가 왕위를 회복하려 하든 그렇지 않든, 전자라면 이미 그를 추방한 반란이 불법적이었던 까닭에 비난할 수 없을 것이고, 후자라면 이전의 업무수행에서 그는 입법자이자 주권자로서 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므로 (순전히 그럴 권리 있는 자로서) 책임 추궁이나 형벌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어떠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혁명 즉 범죄를 좌시하지 않고 폭력으로 되돌려 놓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은 국제법에 속하는 것이다(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국제법이 어쨌든 자연 상태라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B 지배자는 토지의 최고소유자(Obereigentümer)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면 국민에 대한 최고명령자(Oberbefehlshaber)로서만 간주되어야 하는가?
토지는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갖는 유일한 가능 조건이다. 그리고 외적 물건들의 가능한 점유와, 그에 따른 사용은 최초 취득의 권리를 형성한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권리는 군주(Souverän)이자 영주(Landesherr)인, 정확히 말하면 최고소유자인 주권자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 최고소유는 또한 단지 시민연합체의 이념으로, 부분들에서 전체로의 경험적 진전인 집합의 원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로부터 법개념에 의한 토지 분할이 나올 수 있는 필연적이고 형식적인 원리에 따르기 위한 것이다. 이 원리가 하나의 공적이고 보편적인 점유자 아래의 필연적 통합 즉 주권자가 최고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최고소유자의 이념에서 주권자가 여느 토지를 사적 소유할 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라 (그의 권리를 분유받은) 하나의 사적 인격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이렇듯 최고소유자가 사적 용도를 위해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자 한다면, 국가의 토지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한계를 넓혀 나갈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신민은 자기의 것을 가지지 못하는 농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소유자로서 주권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명이 타당하다. 그는 아무것도 점유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다른 이와 더불어 국가 안에서 자신의 것을 갖는다면,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법이 나오는 까닭에,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재판관은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모든 것을 점유한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국가 내에서 모든 외적인 물건들이 구성원 각자에게 자신의 것으로 정당하게 분할되도록 하는 명령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구성원에게도 영속적으로 어떠한 토지를 소유할 권리는 없다는 결론도 함께 따라 나온다. 국가는 언제든 그들이 소유자로 존속할 수 있었던 법규들을 폐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지의 최고소유자의 권리에 최고명령자의 권리가, 그럼으로써 조세 내지 부역을 요구할 권리, 국가경제 및 경찰행정의 권리, 또한 국가의 안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결사에 대한 감찰의 권리와 같은 여타의 많은 권리들이 의거한다.
§50 조국과 외국에 대한 시민의 법적 관계에 대하여
그 주민들이 헌법에 의해, 다시 말하여 특별한 법적 행위 없이도 출생에 의해 특정 공동체의 공동시민이 되는 땅을 조국(Vaterland)이라 한다. 한편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땅은 외국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국이 지배지역의 일부를 이루면, 이를 속주(Provinz)라 일컫는다. 속주는 공동시민들의 본거지로서 나라(국토, 주권이 미치는 범위, Reich)의 통합된 일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지배국의 영토를 모국(Mutterland[20])으로서 숭배해야(verehren)만 한다.
1) 시민은 이민 가는 권리를 갖는다. 그는 물건들이나 동물들처럼 국가의 ‘소유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군주/영주에게는 토지에 대한 신민들의 사적 소유가 축소되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이민과 정주를 후원할 권리가 있다.
3) 군주/영주는 신민이 공동체를 위협하는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 그를 어떠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누리지 못할 외국의 속주로 추방할 권리를 갖는다.
4) 또한 군주/영주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신민을 국외추방할 권리를 갖는다.
C 최고명령자가 국민에게 과세할 권리, 그리고 국가와 교회기관의 관계
최고명령자는 간접적이지만 국민의 의무를 인수한 자로서, 국민 자신의 유지를 위하여 과세할 권리를 가진다. 보편적 국민의지는 영구히 유지되어야 할 하나의 인격, 하나의 사회로 합일된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의해, 개별 구성원들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신민들의 유지를 위하여 내부 국가권력[지배력]에 복종해야만 한다. 따라서 국민은 국가를 이루기 때문에, 정부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조차 채우지 못하는 이들의 유지 수단을 조달하기 위해 재산가들을 강요할 권한을 갖는다. 그들의 실존 자체가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조치와 보호를 제공하는 공동체에 복종하는 하나의 행위이다[21]. 그들은 이러한 행위에 책무지고 있고, 따라서 국가는 자신의 유지를 위하여 다시금 그들의 동료시민들을 유지시키는 데 그들의 것을 기여하게 할 권리 근거를 가진다. 이러한 일은 국가시민들의 소유나 상거래에 대한 과세, 혹은 그를 통해 설립된 기금과 이자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이는 오직 국민의 필요를 위해서 실행되어야 한다. 주의할 것은, 지금 여기서 다루는 측면은 한낱 ‘자원한 기여’가 아니라 법적 강제에 의한 세부담이라는 것이다. 이는 첫째로 우리가 논의하는 것은 국가의 국민에 대한 ‘권리’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실질적으로 복권과 같은 자발적인 기여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 것이고, 기부나 재단을 통한 복지는 게으른 사람들의 생계 유지 수단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법적 강제는 각 세대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부양하는 방식 등을 통하여 부당한 세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시민적 권력의 작용권 밖에 있는 내적 마음씨로서 종교와는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되는, 교회기관에 대한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원리를 가진다. 1) 교회기관은 불가시적으로 신민들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으로서, (통합된 것으로서) 국가의 참된 필요가 된다[22].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는 외적 법칙수립을 위해 설립되었으므로, 교회기관에 대해서는 공공의 평안에 해가 될 수도 있는, 가시적으로 정치적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억지하는 소극적 권리만을 갖는다. 즉 그가 교회기관을 국가에 이익이 된다는 판단 하에 설립하고, 마음대로 신앙이나 제례 형식을 지시규정할 수는 없다. 2) 또한, 다음은 이 사안뿐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일을 통틀어 적용되는 일반적 원리로, 전체 국민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법칙수립자 또한 국민에 관하여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하나의 교회가 신앙을 변경 없이 유지하고 스스로 개혁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규정을 세우는 것은 공권력/당국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다. 어떠한 국민도 신앙과 관련한 자신의 통찰 내지 계몽에서 결코 더 전진하지 않을 것을 결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D 국가에서 최고명령자의 권리는 관직과 작위의 배분, 그리고 형벌권에도 상관한다
말한 바처럼, 국민의 합일된 의지가 결코 결정하지 않을 것은 국가원수 또한 그에 관해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주권자는 자신이 하나의 관직을 부여했던 이로부터, 그가 어떠한 범법도 하지 않았음에도 임의대로 그 관직을 다시 빼앗을 권리를 갖지 못한다. 또한, 신민들이면서도 또한 다른 신민들에 대한 태생적인 명령자인 귀족에 대해서는, 그것이 공적에 선행하는 세습적 신분으로서 주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자유를 그러한 근거 없는 특권 아래에 내던져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주권자와 국민의 구분만이 남을 때까지, [국가의 안녕을 위협할 큰 요동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본래 이어져 오고 있던 작위를 칭호상으로는 존속시킬 잠정적인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아무런 작위[존엄] 없이는 국가 안에 있을 수는 없다. 적어도 그는 국가시민이라는 작위는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것을 상실한다면, 그는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타자(다른 국가시민이나, 심지어 다른 국가)의 의사의 한낱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는 오직 판결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일단 이렇게 된 자는 예속자(Leibeigener)로서, 타자는 그의 실존을 쥐고 있는 주인(Herr)일 뿐 아니라, 그의 소유자(Eigentümer)이기도 하다. 즉, 시민적 인격성을 상실한 그는 물건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다루어진다. 따라서 이 타자는 그를 양도할 수도, 임의대로 (인격에 수치를 주지는 않는 목적들에) 사용할 수도 있으며, [인간으로서는 여전히 존엄한] 그의 목숨과 신체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힘(Kräft)들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23].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하나의 계약에 의해서, 인격이기를 중단할 그러한 종속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오직 인격으로서만 하나의 계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용계약은, 성질상으로도 정도상으로도 일정하게 규정된 노동만을 하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힘을 완전히 고갈시키는 일은 사실 그를 소유물로 매도하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러한 ‘계약’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격성을 손실시키지 않고 자신의 노동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심지어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예속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러한 신분은 오직 자신의 인격의 탓으로 초래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상속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소유자에게서 예속자의 후세 교육에 들어간 비용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 교육은 부모의 절대적인 자연의무이고, 부모가 예속자라면 소유자는 이러한 예속자를 점유함과 함께 그들의 의무들도 넘겨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E 형벌권과 사면권
1) 형벌권에 대하여: 형벌권/형법이란, 명령자가 복종자에게, 그의 범죄로 인한 고통을 부과하는 권리/법이다. 따라서 국가의 최고위자는 형벌을 받을 수는 없고, 사람들은 단지 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공적 법칙[법률]의 위반은 그것을 저지르는 자가 국가시민이 되지 못하게 만들고, 이를 단적인 범죄, 즉 공적 범죄라고 일컫는다. 횡령과 같은 사적 범죄는 민사재판에 회부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도와 강도 등 그로 인해 한낱 개별 인격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위태롭게 될 경우, 그것은 공적 범죄이다.
주의할 것은, 사법적 형벌은 시민 사회나 어떤 다른 선을 촉진하기 위한 한낱 ‘수단’으로 가해질 수는 없으며, 오히려 어떠한 인격이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항상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그에 합당한 책임으로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그의 생득적인 인격성(혹은 여기서는, 법/권리 개념)으로 인하여 타인의 물권의 대상으로 완전히 전락할 수는 없다. 만약 사형수가 공동체에 유익한 실험들을 견뎌내는 대가로 사형을 면제받기로 한다면, 인간의 이성적 법 개념으로부터 전개된 공적 정의는 정의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이는 전체 국민이 멸망하는 일과 다름없다.
이러한 공적 정의가 그의 원리와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신민들 자신의 자유와 평등이 말해주듯] 오직 동등성[평등]의 원리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국민 가운데 잘못 없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다면 그는 자신에게도 해악을 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도적질을 한다면 그는 모든 이의 소유를 안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소유/취득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의 인격이 의욕하고자 한 바에 책임을 지도록 노예 상태로 만들어, 그를 부리는 타인에게 실존을 내맡기게 해야 한다. 오직 보복법만이 법정의 심판대에서 형벌의 질과 양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이 ‘평등’은 문자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는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게 벌금형이 똑같은 무게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타인을 살해한다면 그는 이로써 자기 자신도 살해하는 것이고, 고통이 가득한 생이라 해도 생과 사 사이에는 어떠한 동종성도 없으므로, 이때 주어질 수 있는 형벌은 오직 사형밖에 없다. 이러한 사형은 범죄자의 내적 사악성에 비례해서도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최상의 균형자이다. 이를테면 살인을 했거나, 명했거나, 그에 협력했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는 국사범(정치범)들에게 사형과 징역형 중 선택의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고 해 보자. 이때 사형을 택하는 자는 명예를 알고 있으며, 징역형을 선택하는 자는 그조차도 모르고 인격에 대한 중대한 수치를 선택하는 것이다. 상당히 명백하게도 전자의 형벌이 더 적은 것이 합당해 보이고, 이때 둘 모두에게 사형이 내려진다면 그들은 내면의 사악성에 비례하여 정비례적으로 처벌받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사형이 내려져야 할 범행의 공범자의 수가 너무 많아 국가 자신이 신민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면, 이러한 비상사태에는 주권자가 스스로 재판관의 역을 맡아 국민 다중을 유지할 다른 형벌을 채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공적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다만 예외적인 대권 행사로서 사면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베카리아는 사형이 근원적인 시민 계약에 포함될 수 없음을 들어, 모든 사형의 부적법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단지 인도주의적 동정심에 다름 아니다. 1. 누구도 그가 형벌을 의욕했기 때문에 형벌받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의욕한 것을 받는 것은 애초에 형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 형벌 자체가 아니라 형벌을 받을 행위를 의욕했기 때문에 오직 그에 대한 책임으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근원적 계약에서 ‘나는 여타의 모든 이들과 함께 국민 중에 범죄자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형법률이 될 법칙[법률]들에 복종한다’는 것은 공동입법자로서의 자신이 자기명령한 바이며, 그러한 자신은 순수한 법칙수립적 이성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성이 범죄자와 동일한 인격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이성은 예지체 인격으로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로서의 현상체 인격을(신민을), 시민연합체 중의 다른 모든 이와 함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형법률을 제정한 것은 입법자이고, 사형을 명하는 것은 법정이며, 어느 쪽도 범죄자의 인격이 아니다. 2. 그러므로 또한 사형을 받기 위해서도, 사회계약 중에는 애초에 자신의 생명을 처분한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사형을 위해 범죄자가 형벌받기를 의욕해야 한다면, 이는 범죄자가 동일한 인격에서 자기 자신의 재판관이 된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렇듯 법의 판결과 집행이 범죄자의 동일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형이 마치 ‘자살하려는 의지의 결단’인 것처럼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2) 사면권에 대하여: 범죄자에 대해 형벌을 경감하거나 면제하는 이 권리는, 주권자의 모든 권리 중에서도 가장미묘한 것이다. 이것은 주권자의 위대성을 증명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통해 고도의 불법을 행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는 신민들의 서로에 대한 범죄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 이 경우 형벌면제는 다른 모든 신민들에 대해 최대의 불법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권리는 단지 주권자 자신에 대해 일어난 침해의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만약 그러한 형벌 경감/면제로 인해 국민 전체의 안전에 위험이 생길 수 있다면 사용할 수 없다. 이 권리는 통치권 중 가장 큰 대권(위엄의 권리, Majestätsrechts; right of majesty)이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유일한 권리이다[24].
공법
제2절 국제법(Völkerrecht)(Staatenrecht)
§§53-59 국제법이란 무엇이고 어떤 요소를 가지는가?
어떠한 체계로 구분되는가(전쟁으로의, 전쟁 중의, 전쟁 후의 권리)?
자연적 의미에서, 원주민들(Landeseingeborene; natives)로서 국민(Volk)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는 관계없이 공통의 선조를 가지는 자들로 표상될 수 있다. 한편 지성적-법적 의미에서 이들은 공화국이라는 공통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한 가족(gens, natio)이다. 따라서 그 구성원들(Glieder) 즉 국가시민(Staatsbürger)들은 모두 대등하다. 하지만 그 밖의 국가를 이루지 않고 무법적 자유 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민족집단(Völkerschaften)에 대해서는 차등을 두고 교류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제 생각해 볼 것은, 그렇다면 대등한 국가들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이다. 이는 민족들의 법(Völkerrecht)이라 다소 잘못 불리고 있는, 국제법(Staatenrecht)이라는 이름 아래서 고찰된다. 이때 국가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으로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자연 상태, 달리 말해 영속적인(beständig) 전쟁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국가들 간의 법/권리는 전쟁으로의 권리, 전쟁 중의 권리, 한편으로는 (현실적이거나 잠정적이거나) 전쟁 상태를 벗어나도록 상호 강요하여 평화를 확립하고자 할 권리, 다시 말하여 전쟁 후의 권리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이 모두 자연 상태에서, 법적 상태에 근접해 가는 상태를 설립하기 위한 권리라는 것이다. 한편 개인들 간의 자연 상태와 국가들 간의 자연 상태의 유일한 차이는, 국제법에서는 한 국가와 다른 국가의 관계뿐 아니라 한 국가 내의 개별 구성원과 다른 국가의 개별 구성원, 그리고 다른 국가 전체에 대한 관계도 다루어진다는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국제법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국가들은 서로에 대해 본성상 비-법적인 상태에 있다. 2) 현실적 전쟁이나 반목이 없다고 해도, 이러한 상태는 전쟁 상태이며, 그 자체로 이성의 법/개념에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최고도로 불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서로 이웃해 있는 국가들은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할 실천적 이성 필연성, 즉 책무를 진다. 3) 근원적인 사회계약의 이념에 따라 하나의 국제연맹이 창설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개인의 내적 목적 수립에 외적 법칙수립이 간섭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서로에게 내정간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부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4) 하지만 이 결합체는 시민적 체제가 그러했던 바와 같이 주권적 권력이 아니라, 단지 동료관계(Genossenschaft)(연방관계)만을 가지고, 때때로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국가들 간 현실적 전쟁 상태로의 이행을 막기 위한 권리이기도 하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법의 체계에 관해 논하자[25].
1) 전쟁으로의 권리: 그런데 근원적으로, 어떻게 국가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신민들을, 그들의 재산과 심지어 그들의 생명을 소모하도록 하면서, 타 국가와의 전쟁에 내보낼 권리를 갖는가? 어떠한 법률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든 자기가 실체적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당연한 소유권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지고는 자신의 의사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제, 어떠한 지역에 각자에게 확정적 취득을 보장해 주는 국가가 없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그곳의 주민들은 그토록 많은 작물들, 가축들과 같은 자연생산물들을 생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이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토록 많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대부분의 신민들은 국가의 생산물이다. 주권자는 신민들을 전장에 내보낼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근거는 인간의 ‘소유물’일 수 있는 작물들이나 동물들에 대해서는 타당해도, 인간, 특히 함께 입법하는 성원으로서 한낱 수단이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자신을 제시하는 국가시민에게는 결코 타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선전포고든 전쟁 수행 자체든 국가시민이 자신의 자유로운 동의를 표했다는 제한 조건 하에서만 주권자는 시민을 전쟁에 내보낼 수 있다. 국민이 자기의 동의를 표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만을 처분받을 수 있다는 것, 이는 달리 말해 국민에 대한 주권자의 의무[26]이자, 국민이 주권자에 대해 가지는 권리이다. 여기서 국민은 현실적으로는 그저 인내하는 자일지라도, 이성적으로는 자기활동성, 주권자 자체의 표상이다.
여하간 국가들의 ‘자연 상태’에서 전쟁으로의 권리는 허용될 수밖에 없다. 한 국가는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믿을 때 (법적 상태처럼 소송이 아니라) 자신의 강제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제시한다. 침해로 느껴질 수 있는 적대행위에는 능동적 침해 외에도 전쟁 준비, 두렵게 증대하는 세력과 같은 상태를 통한 위협도 포함된다.
2) 전쟁 중의 권리: 무법적인 전쟁 중에도 무엇이 권리 있는가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국가들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법적 상태에 들어서고자 하는 것이 언제든 가능하도록 하는 원칙들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권리/의무여야만 할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징벌전쟁, 섬멸전쟁, 정복전쟁의 금지가 있다. 첫째는 국가들 간에는 상위자와 복종자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와 셋째는 한 국가의 도덕적 말살은 서로 권리 있게 되고, 의무지기 위한 기반으로서 외적 자유의 원리들에 따른 대립관계를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쟁하는 국가에게 대부분의 방어수단이 허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국가의 도덕적 인격성을 의심스럽게 만들어 그 국가의 신민들을 국가시민일 수 없게 하는 수단의 사용은 금지된다. 이와 같은 것은 암살자, 독살자 등 지속적인 평화의 확립에 필요한 신뢰를 파기하고야 마는 비열한 수단들이다(ZeF, AB12 참조). 마지막으로, 제압된 적에게 공출과 군세를 부과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개별 인격들을 정당하게 ‘약탈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국가가 ‘국민을 가지고서’ 전쟁을 이끌었지, 국민 자신이 전쟁을 이끈 것 그러므로 적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전쟁 후의 권리, 평화의 권리: 전쟁 후의 권리란, 평화 조약 체결 시점 및 그 결과와 관련한 권리를 일컫는다. 이때 승자는 패자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가상의[자칭, vorgeblich] 피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불문에 부치고 오직 자신의 지배력(Gewalt)에 의거해서만 평화 조약의 조건들을 만든다. 따라서 승리자는 전비의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적의 전쟁이 ‘부정의’한 것임을 주장해야 하고, 이는 곧 그 전쟁이 징벌 전쟁이었다는 선언으로, 여전히 하나의 인격체인 패전국에 모욕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쟁 후의 권리에는 포로를 대가 없이 교환하는 것, 그리고 그 교환되는 수의 동등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그들은 모두 그 자체 목적인 인격이므로).
더불어, 패전국 및 그의 신민들은 국토가 정복당했다고 하여 국가시민의 자유를 잃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패전국은 단지 식민지로, 신민들은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 자체로 모순인, 징벌 전쟁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패전국이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헌법, 법칙수립, 토지를 갖기는 하는 속주(Provinz)로 인정될 수 있다. 승리국은 이러한 속주에 대하여 최고 집행권을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타국이다. 마찬가지로 징벌 전쟁을 상정하지 않고는 패전국의 신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가장 불법적인 것은 세습 노예제이다. 누군가의 범죄는 그 개별 인격 자신의 행위에 부여된 죄과이고, 그것이 승계된다는 것은 도대체 이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60 국제법상에서 ‘부정의한 적’에 대하여
더하여: 부정의한 적이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사실 자연 상태에서 부정의한 적이라는 표현은 그저 중복적이다. 자연 상태는 실질적으로는 그 자체로 부정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법적 상태에서도 무엇인 법적인가/권리 있는가가 논의되었듯이) 여하간 부정의한 적이 인정될 수 있다면, 그러한 적은 (사법적 상태에서도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공존할 수 없는 자유의 사용은 제한을 강요당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듯이) 공적으로 표명된 그의 의지가, 만약 그 준칙이 보편적 규칙이 된다면, 국민들(국가들) 사이에 어떠한 평화 상태도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준칙을 노정하는 그러한 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것으로는 공적인 계약의 침해가 있겠고, 이러한 국가에 대해서는 다른 제 국민들이 그 비행을 할 힘을 빼앗도록 촉구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하나의 국가를 소멸시키도록 촉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제법상의 대립 관계에 설 권리, 즉 결속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자기의 근원적 권리를 가진 민족에 대한 부정의일 것이기 때문이다.
§61 국가들 간의 자연 상태는 각 국민들의 권리를 여전히 잠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비록 영원한 평화는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일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국가들의 자발적인 연합을 통하여 국제공법의 상태를 향하여 연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권리), 그러해야만 한다(의무).
각 국가들의 자연 상태는, 개별 인간들의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법적 상태’에 들어서기 위해, 이성 필연성에 따라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의무인 그런 상태이다. 이 말은 즉, 국가들이 법적 상태에 들어가기 전에는 각 국민들의 모든 권리와, 국가들이 취득하는 모든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은 여전히 순전하게 잠정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 국민이 국가가 되는 것에 유추하여, 오직 보편적인 국가통합[국가연합, 국가합일, Staatenverein]에서만 모든 국민들의 권리가 확정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참된 평화 상태가 도래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러한 ‘다민족국가(Völkerstaats)’가 매우 크게 확장되고 나면 그 국가의 안정적인 통치는 사실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고, 결국 다시 그 안의 다수 조합(Korporation)들 간 전쟁 상태가 초래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전체 국제법의 최종 목표인 영원한 평화가, 하나의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로의 연속적인 접근에 공헌할 것인, 그러한 국가 간의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 및 국가의 의무, 나아가 교호적인 의무의 켤레 개념으로서 권리에 의거한, 여전히 실현될 수 있는 과제이다.
이를 위해 (UN과 같은 국제기구의 원형으로서) 상설 국가 회의(permanente Staatenkongreß)와 같은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면 여기서 ‘회의’란 단지 여러 국가의 임의적인, 해소 가능한 회합을 뜻하는 것으로, 미합중국과 같이 하나의 헌정 체제에 기초한, 그러므로 해체될 수 없는 그러한 결합(Verbindung)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만, 국민들(민족들) 간의 분쟁을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방식이 아니라, 말하자면 소송[재판, Prozeß]과 같은 시민적 방식으로 결론 내리는 국제공법(öffentlichen Rechts der Völker)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공법
제3절 세계시민법(Welterbürgerrecht)
§62 세계시민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설령 선한 의도를 가진다고 해도 법 개념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음에 대하여
서로 유효하게(wirksam) 관계 맺을 수 있는 모든 국민들(민족들)의, 우호하지는 않을지라도 평화적인 보편적 공동체의 이성이념(Vernunftidee)은 박애적인 것이 아니라, 실로 하나의 법적 원리이다. 자연은 구면인 지구를 통하여 이들 모두를 폐쇄적이고 유한한 경계 내에 함께 두었으며, 따라서 지구상의 거주자가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점유는 그곳이 어디든 언제나 전체의 일부로서 그들 모두가 근원적으로, 예지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것에 대한 취득으로 보아야 한다. 즉 제 국민 모두가 근원적인 토지 공동체 안에 있으며, 이는 점유의 법적 공동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러한 지구가 예지적으로 의사의 가능한 대상으로서, 모두의 세력(Macht) 안에 있었다는 의미에서 물리적 상호작용의 가능한 공동체(commercium, 교역[상업] 공동체) 안에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당하게/법적으로, 그들은 서로 교류를 시도할 권리를 가지며,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적어도 정당하게는) 이 때문에 서로 적대적으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권리를 세계시민법(ius cosmopoliticum)이라 부를 수 있다.
물론 이는 단지 일시적 교류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타 국민의 토지에 정주할 권리를 위해서는 특별한 계약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어떤 국민이 이미 자리를 잡은 지역에 이웃하여 인접거주하거나, 그 토지에 대해 점유취득할 권리는 있는가? 개척이 선주민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 어느 때도 서로의 토지 사용이 침해받으리라 예상되지 않는다면, 이 권리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토지의 근원적 취득은 선점으로 일어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약 선주민이 유목민이나 수렵민이어서 생계를 광대한 토지에 의존하고 있다면, 저 권리는 폭력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무지를 이용하지 않은 계약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무릇 상대가 국가를 이루지 않은 자들이라 해도 서로를 목적으로 존중하는 자연법과, 사법까지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설령 미개 국민들을 개화시킨다거나, 타락한 인간들을 자기 땅에서 제거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 소위 선한 의도를 근거로 한다고 해도 이것이 그를 위해 사용된 수단들의 부정의함을 씻어낼 수는 없다. 이는, 국가체제가 부패해 있을 때 폭력으로 법적 상태의 확립을 시작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국민에게 한 번은 부정의할 권리가 있다’는 구실이 저렇듯 이성적으로 규정된 법조건을 폐기하지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론:
국가, 공법의 체계, 그리고 법 개념의 참된 실현으로서 영원한 평화
“이제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실천적 이성이 “어떠한 전쟁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저항할 수 없는 거부권을 표명한다. (…) 그리고 설령 이러한 의도의 완성에 관한 최종적인 것이 언제나 경건한 소망에 머물러 있다 해도, 우리는 확실히 그를 향해 간단없이 노력한다는 준칙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다.” (MS, B263)
우리는 왜 영원한 평화를 희망할 수 있고, 희망해야 하며, 따라서 그를 향해 평생을 바쳐 노력해야만 하는가? 태어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우리는 우리의 장난감을 빼앗는 어떤 다른 ‘인간’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내 거야!” 여기서 이 단순명료한 명제 자체가 이미 함의하고 있는 바는 내가 나 외적인 것의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주체라는 것이고, 타인은 그에 대해서는 자유를 제한하기를 의무지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목소리라는 형식이 담고 있는 바는 이러한 언명을 듣는 존재가 그러한 함의를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정말로 그에 의무지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권리주체일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특별한 여타 조건 없이도 오로지 그의 인간성에 힘입어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기를 요구하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부분적으로 토대짓는 자연법/권리이다. 그로부터 인간은 국가 없이도 보편적이고 교호적으로 강제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잠정적으로 정립하는 사법적 상태를 발전시켜 왔고, 마침내 서로의 권리를 확정적으로 결론짓기 위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법칙적 권위를 가지고 실질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존재로서 주권자를 세웠다. 이것이 국가이고, 또한 공법의 탄생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과정은 자신의 안정적인 실존을 보장하려는 자연적 필요요구 충족의 족적일 수도 있고, 여타 다른 목적과 이상을 위해 피 흘린 자들의 수렴적 결과일 수도, 아니면 전혀 다르게 조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성적으로 볼 때, 이러한 인간의 역사는 법 개념의 실현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교호적인 강제를 가능케 하는 참된 의미의 법/권리는 다른 어떤 우연적인 것들로부터도 분쟁 없이 나올 수 없고 실천이성으로부터 분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련의 절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의식하든 그렇지 않았든 이러한 법치의 상태를 실현함이 인간의 외적 행위들에 있어 그 자신이 명령한 의무였음을 이성은 지금 우리에게 현시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성을 통하여 그러한 것을 선험적인 의무로 세우고 또 그 아래 선다.
이제, 칸트에 따르면, 법칙수립자 그리고 그것의 집행자이자 재판관으로서 보편적 실천이성을 대변하는 주권자 아래의 공동입법자로서 삶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부족함을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이제 별로 없다. 물론 이때도 개별 인간으로서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돈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나의 물리적 실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지는 않을 뿐더러, 나는 주어진 사회경제적 체계 내에서 내 손에 닿지 않는 저 아름다운 자원을 끌어오도록 노력한다면 안타까운 나의 실존 상태 역시도 충분히 나아질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표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렇듯 이제 법 개념의 실현 과정을 파악한 이성은 도덕적 인격으로서 나의 실존에는 아직 무언가 부족하다고, 더 ‘도야되어야 한다’고 자꾸만 소리친다. 칸트의 말을 믿는다면 법/권리는 우리에게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을 확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 개념에서 하나의 국가가 그 구성원들 전체의 합일된 의지로서 보편적 실천이성으로 믿어지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이고, 각 국가는 아직 공법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주지했을 때, 그는 여전히 우리의 권리 상태가 불안정함을, 따라서 그의 궁극목적은 아직 도달되지 않은 저 너머에 있음을 필연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 궁극목적이란 무엇인가?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이, 즉 모두의 권리가 완전히 확정적으로 보장되고 보장될 수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바로 영원한 평화다. 즉, 우리로 하여금 도야되도록 촉구하는 저 목소리는 한편으로는 실천이성이, 한편으로는 법 개념이 자신을 실현하라는 요구다. 그리고 이러한 법 개념의 실현은 달리 말해 자신을 영원한 평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구현하라는 명령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유가 그의 법칙들, 특히 외적 법칙수립을 통하여 의사를 규정함으로써 인도하려던 궁극목적은 그 불완전한 실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보다 선명히 빛나고 있으며, 그것은 법 개념 자신이자 달리 말하면 영원한 평화로 생각될 수밖에 없고 생각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제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이 보장되지 않아 물리적 실존이 위협받던 시대는 거의 지나갔다. 이는 여전히 누군가 혹은 어떤 국가들에게 잔인한 말일 수 있겠지만,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이 바로 그 잔인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리적 안온함을 누리고 또 오히려 그로 인하여 더 큰 안온함을 누리기 위해 매달리며 그것에도 충분히 소진되는 상황에서, 저러한 법 개념의 실현은 확실히 이성이 노정한 의무로서 가장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미약해 보인다. 이 측면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자연적인 필요요구였고, 이제 그것이 알게 모르게 이성의 충실한 종복이었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목적에서 자연적 필요요구와 이성의 이러한 겹쳐짐,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연에서의 신의 섭리’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자연은 그가 이성의 소유가 되기를, 즉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안배했다.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연적 측면에서 보면 물리적 가능성, 이성적 측면에서 보면 권리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점유의 개념에서 한 데 겹쳐진다. 법 개념은, 자연에 힘입어, 자신이 본래 경험에서의 현실성을 겨냥하는 실천적 개념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제 자연의 그러한 추동은 희미해졌지만, 만약 신도 자연도 인간이 살아있는 한 그의 무한함과 무한한 연쇄를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그 길은 우리가 이 현실에서 영원한 평화로 계속 나아가야만 하고(의무), 나아갈 수 있으며(권리), 그것도 자연에 위배되지 않는 방식으로(물리적 가능성) 그러하다는 것에 대한 자체적인 증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갈 길은 가장 반자연에 가까운 자연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의 실현 불가능한 이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근거 있게 희망한다.
“이제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실천적 이성이 “어떠한 전쟁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저항할 수 없는 거부권을 표명한다. (…) 그리고 설령 이러한 의도의 완성에 관한 최종적인 것이 언제나 경건한 소망에 머물러 있다 해도, 우리는 확실히 그를 향해 간단없이 노력한다는 준칙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다.” (MS, B263)
[1] 여기서 법/권리가 ‘타인에게 의무지울 능력’에서 그 특유성을 갖는 까닭에, (좁은 의미의) 윤리학에서 가장 보편적인 덕법칙이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GMS, B66)로 정식화되던 반면, 법/권리를 가능케 하는 자연법의 정식은 ‘너 자신을 타인의 한갓된 수단으로 만들지 말고, 그들에게 동시에 목적이 되어라’, 즉 인간들 서로가 자유를 제한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상호 권리주체이자 의무주체로 서라는 것임에 주목하자.
[2] 법적으로-나의 것임은 “타인이 나의 동의 없이 그것을 사용하는 일이 나를 침해하는 것이 되게 나와 결합되어 있는 그러한 것”(MS, AB55)이고 사용 일반의 주관적 조건이 바로 점유이다. 그런데 이때 이성은 ‘외적인 나의 것’ 개념과 관련하여 이율배반을 마주한다. ‘외적인’ 나의 것은 한편으로 그것을 점유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즉 나(이때 칸트는 인격이 신체까지 포함하는 통일체임을 전제한다)와 물리적으로 결합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외적인 어떤 것을 나의 것으로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점유가 사용의 조건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내가 그것을 점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 외적인 어떤 것을 나의 것으로 갖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외적 대상에 대한 객관적 취득 그러므로 사법의 체계가 무모순적으로 가능해야 한다면, 물리적 점유와 다른 의미의, 외적 대상에 대한 점유가 가능한 것으로 상정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다면 다시 말하여 시공간 조건을 도외시하고도 여전히 나와 ‘구별되는’ 어떤 것이 또한 나의 ‘세력(Macht) 안에’, 즉 의사의 가능한 외적 대상으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예지적 점유가 가능한 것으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여기서 칸트가 사용하는 사법/공법 구분이 (적어도 나에게는) 조금 특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그는 사법 개념을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민법이나 상법 등 개인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것(윤리형이상학에서 사법 영역의 목차를 참고하라)으로 사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공법의 원형’ 자체, 즉 국가 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 무엇이 여하간 법적인가를 느슨하게 구분하는 관습법들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이로부터 칸트가 자연법론자인가 (특히 이후 저항권 논의를 참고하면) 법실증주의자인가 하는 논의도 파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4] 그러므로 ‘정당한[법적인] 인간이 되어라’가 자연법의 근본적 명령이었다면, 이어서 ‘누구에게도 불법[부정]을 행하지 말라’는 사법의 명령이며, ‘각자에게 자기 것이 얻어질 수 있는, 타인들과 함께하는 그러한 사회에 들어가라’(‘누구나 자기의 것을 어느 타인에 대항해서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라’)는 이전 두 명령의 실현을 위해 공법으로 우리를 이끄는 법 개념의 최종적-근본적 명령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상이 법의무들의 상위 분류 체계(자연법, 사법, 공법)를 세운다.
[5] 이러한 ‘법리적 자연 상태’에 대한 서술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윤리적 자연 상태’에 대한 서술과 상당히 흡사함에 주목해 보라. 칸트에게서 법과 윤리의 관계가 간과되어서는 안 될 탐구 주제임을 다시금 알려주는 대목이다. “법리적 자연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의 상태인 것처럼, 윤리적 자연상태는 악에 의한 부단한 반목의 상태이다. 악은 그 안에서 그리고 모든 타인 안에서 마주쳐지는 바, 이들은 서로 교호적으로 그들의 도덕적 소질을 부패시키고, 또한 선의지에서조차도 저 개인들은 그들을 통합시키는 원리의 결여로 인해, 마치 악의 도구들인 것 같이, 그들의 불일치들로 인해 선의 공동체적 목표로부터 멀어지고, 서로를 다시금 악의 수중에 떨어지는 위험 속에 밀어 넣는다.”(RGV, B134, 강조는 필자)
[6] 그러므로 법/권리는 ‘강제로서의 자유 자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강제는 (결과적으로는 인간이 이성을 품수한 한에서 자기강제이기도 하지만,) ‘교호적인 강제’로서 타인을 외적으로(그 사람이 무슨 마음을 먹는지는 도대체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제하고 나 또한 그에 의해 외적으로 강제된다는 데 놓인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자유의 사용 자신이 그 기반에 자유가 놓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자유의 사용이 그 가능 조건으로서 자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를테면 나의 자유의 사용이 타인의 자유 사용을 강제로 방해하는 것, 그럼으로써 인격으로서 인간성 안에 보편적으로 놓여 있는 자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보다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면, 도대체 이때 ‘자유’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칸트는 ‘본유권은 오직 하나뿐’임을 밝힌 절에서(MS, AB45) 자유를 1) ‘타인의 강요하는 의사로부터의 독립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또한 그에 앞서 의사의 자유란 2) 소극적으로는 “감성적 충동에 의한 의사 규정의 독립성”이자 3) 적극적으로는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인 순수 이성의 능력”으로 규정되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MS, AB5-6). 1)만으로는 여전히 임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새긴 자의(Willkür)를 포함한다. 그런데 자유의 강제가 단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의의 임의적인 조정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강제’는 유명무실해지지 않을 수 없다. 언제든 마음대로 지키지 않고 폭력적으로 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교호적인, 진정한 의미에서 강제는 오직 유일하게 인간을 ‘의무지울 수 있는’ 이성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강제의 원리가 되는 이 자유는 2), 3)의 의미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법적 상태로 이어지는 이러한 강제가 결론적으로 야기하는 사태는 무엇인가? 바로 자유의 사용(행위)을 규제하는 외적 강제를 통한, 무엇이 진정 ‘자유의 사용’일 수 있는지 달리 말해 ‘이성의 자기강제’의 한계선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다. 말하자면 이는 인간이 자율로서의 자유를 실현하는 험난한 과정에서 어떠한 자유의 사용까지가 자유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필연적 형식을 경험에서의 적용으로 이끌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법이론의 권역이 아닌, 무엇이 목적이어야만 하는지, 그 내적인 ‘동시에 의무이자 목적인 것’(덧붙여 이러한 목적은 의사의 대상으로서 질료적인 것이다)에 대해서는 덕의무가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법이론은 윤리형이상학의 한 구분지이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왜 법적 공동체가 윤리적 공동체에 선행하여야만 하는지는 여전히 더 논의되어야 할 다른 문제임에 주의하라).
[7] 이 지점에서 칸트가 개인들의 사적 소유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를 요청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그의 논리의 핵심은 외적으로 타인들과 교호적으로 관계 맺으며 일어나는 모든 외적 권리와 의무의 확정을 위하여, 즉 법/권리 개념 객관적 실재성 및 현실적 타당성 자체를 위하여 국가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는 데 있다. 어쩌면 (권리와 의무가 켤레 개념이므로 물건에 대한 권리는 어불성설이라는 논리 외에도(덧붙여 이와 거의 유사한 논리는 피히테의 ‘자연법의 토대’나 헤겔 법철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권이 ‘모든 점유자에 대항할 권리’로서 대인권을 경유하여 규정되었던 일도 이러한 목적을 잘 뒷받침하는 것일 수 있겠다.
[8] 세상에, 너무 재미있는 생각이 아닌가? 지구가 구면이라는 것과 근원적인 전 인간 공동체(및 세계시민적 공동체)를 연결짓는 대목은 (ZeF, AB40)에서도 등장했었고, 윤리형이상학에서도 전 법이론 부문에 걸쳐 꽤 여러 번 등장한다. 칸트의 생각은 지구는 무한한 평면이 아니고 폐쇄적인 둥근 통일체이기 때문에, 그 위의 인간도 이러한 자연의 안배에 의하여 이성적 의미에서 근원적인 전 지구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칸트에게서 이러한 토지의 근원적인 공동 점유가 최초 취득, 즉 모든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권리의 시작을 근거짓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 모두가 토지를 예지적으로 점유(모두와 구별되면서, 모두의 가능한 의사의 대상임)하면서 또한 전체의 합일된 의지로서 물리적 선점을 사적 소유의 조건으로 둔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점유는 사적 사용의 조건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점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토지가 외적으로 나의 것이거나 너의 것임을 확정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나아가 법/권리 개념의 실현조차) 애초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토지인가? 여기가 또 매우 재미있는 부분이다. 요약하면 토지는 현상 중에 가장 ‘실체적인 것’이고, 그 위를 움직이는 것들은 실체와 우유성의 관계에 유추하여 실체에 내속하는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토지의 취득 권리 위에 여타 모든 물건의 취득이 기초한다). 그런데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그 위에서 모든 동시적임과 잇따름이 표상될 수 있는 무한하고 하나인 기체로서 ‘시간’을 말한 바 있다(제1유추 실체 고정불변성의 원칙 참조). 그런데 다시 시간은 그 자체로 지각될 수 없고, 선의 도상과 같이 공간적으로만 지각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실체로서의 시간의 가장 원본적인 표상- 그것은 바로 토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의 근원적 공동 점유는 약간 멀리 나가자면 이렇게 다시 쓸 수도 있다. 인간 모두는 시간을 공동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토지를 나눠 가짐으로써 인간 공동체 및 권리/법은 시작된다. 나는 분명 이러한 연결이 칸트에게서 상호주관성이나 여타 다른 멋진 의미를 더 줄 수 있다고 직감하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일지까지는 탐구하지 못했다.
여기서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칸트에게서 시공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하고 치밀하게 여러 방면에서 얽혀 있다는 것과 심지어 시간과 공간 관계의 유비가 윤리와 법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무릇 이론 철학에서 사람들은, 공간상에는 오직 외감의 대상들만이 있지만, 그러나 시간상에는 외감의 대상이든 내감의 대상이든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양자의 표상들은 역시 표상들이고, 그런 한에서는 모두가 내감에 속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와 똑같이 자유 역시 의사의 외적 사용에서 고찰되든 내적 사용에서 고찰되든, 어쨌든 자유의 법칙들은 자유로운 의사 일반을 위한 순수한 실천적 이성법칙들로서, 동시에 그것의 내적 규정일 수밖에 없다.”(MS, AB7)
[9] 비약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이 대목은 “무릇 자유 개념은, 그것의 실재성이 실천이성의 명증적인 법칙에 의해 증명되는 한에 있어서, 순수 이성의, 그러니까 사변 이성까지를 포함하는 체계 전체 건물의 마룻돌을 이룬다”(KpV, A4)는 실천이성비판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즉, 자유 법칙들의 체계에서 한 축을 이루는 법이론에서의 결함은 순수 이성의 건축술의 무게중심이자 정점의, 질서의 원리가 되는 이념성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가장 빠르고 결정적으로 이성의 체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원리의 결여’가 단지 이론에서만을 염두에 둔 것인지, 현실적인 실천에서의 결여까지 포함하여 고려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만하다.
[10] 이 또한 상당히 흥미로운 서술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르면 법 개념은 마치 이론 명제들처럼 선험적인 직관을 통하여 선험적 종합 명제를 정초할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예지적 점유 개념을 통해 실천이성의 법적 요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실천적-선험적 종합 명제를 귀결시키면서(이에 관해서는 MS, A67-68을 참조하라) 어쩌면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객관적 실재성을 얻게 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11] 칸트는 이 자립성이라는 질적 특성이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을 구분케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는 데 있어 자신이 주인이 아닌 자들, 즉 (국가 자신이 아니라) 단지 타인의 처분에 의해 자신의 실존에 관해 특정하게 강요받게 되는 자들, 이를테면 (범죄로 노예가 된 자들이나 미성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살아가기 위하여 외적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노동)을 거래하는 자들은 투표권 즉 모두가 모두를 결정함으로써 각자 자신을 결정할 권리가 없는 수동적 시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난한 자가 그의 복지를 부자에게 의존하고, 아이는 부모에게 의존하는 등의 이러한 불평등이 인간이자 신민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에 어떠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귀속된 자신의 자유와 보편적 법칙에 따라 공존할 것을 (자연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으며, 또한 공적 법칙들에 따라 각자에게 똑같은 정도로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실정법이 어떻든 간에 그들이 능동적 상태로 상승할 길목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칸트가 「이론과 실천(TP)」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신민으로서의 평등을 논했던 반면, 여기 『윤리형이상학』 B196에서는 법률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 즉 시민만의 자질로서 자유와 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상술한 바와 같이 다시 B197-198에 가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보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서술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물음을 낳는다. 본문에서 서술한 바처럼, 그 자신이 동의한 법률과 상위자에만 종속되는 시민의 자유와 평등은 근본적으로, 공동입법자를 세우는 이념으로서 ‘근원적 계약’으로부터 보장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등하게, 그의 이성의 이름으로 근원적 계약에 참여했던 이들에게서(이를테면 범죄자들에게서도) 그들이 여전히 ‘국가의 부분이면서도’ 시민적 인격이 박탈되는 것이 가능한가? 혹 그들은 시민적 인격을 상실하는 순간 어떠한 의미에서도 국가의 ‘성원’은 아니라고 여겨져야 하는가? 또한, 왜 그 자신의 (특히) 물리적 실존에서 타인에게 예속된다고 해서 공동입법자로서 시민적 인격이 상실되어야만 하는가? 혹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갖기 위한 조건으로서 예지적 인격에서도 어떤 것이 나의 물리적 세력(Macht) 안에 있는 대상임이 고려되었듯이, 그의 내적 힘(Kräft)이 타인에 의해 임의로 사용됨은 예지적 인격에 대한 손상이기도 하기 때문인가?
[12] Gewalt! 앞서 칸트는 『윤리형이상학』의 사법 부분에서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갖기 위한 단계 중, 어떤 것이 그저 의사의 가능한 대상이려면 그것이 나의 물리적 능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기만 하면 됨을 의미할 때는 세력(Mach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러한 의사의 능력을 넘어 실제로 의사의 행위가 동반됨으로써 소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배력(Gewalt)’ 안에 있다는 단어를 사용했다. 자 이제, 국가 구성원들은 주권자의 ‘지배력(Gewalt)’ 하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론 주권자가 신민들에 대해, 특히 국가시민에 대해 물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인격에 대해서는 도대체 그러한 일이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재미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칸트는 사법 부문에서 특유하게도 ‘대물적 방식의 대인권’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권리처럼, “어떤 외적 대상을 하나의 물건으로서 점유하여 하나의 인격으로서 사용하는 권리”(MS, AB105)이다. 이때 이를테면 부모는 그들의 지배력에서 벗어나 있는 자녀의 모든 점유자에 대항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점에서 물권을 행사하지만, 법칙적인 자유에 반하지 않는 한 자녀들에게 그들의 명령을 수행하고 준수하도록 강요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대인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권의 측면에서 인격이 어떤 방식에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그들 자체를 양도하거나 처분할 수는 없게 제한된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대물적 방식의 대인권을 소개할 적에 이것이 이론철학에서 설명되었던 실체, 원인성, 상호성 중 마지막 범주에 대응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전 칸트 수업에서 이행남 교수님께서 아름답게 짚어 주셨듯이) 사물들의 관계의 범주에서 이 ‘상호성’의 원어는 Gemeinschaft, 즉 공통성 혹은 공동체이다. 이제, 다음 대목을 보라. “[대물적 방식의 대인권에서] 이러한 권리에 따른 나의 것과 너의 것은 가정적인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의 관계는 자유로운 존재자들의 공동체의 관계인데, 이 자유로운 존재자들은 (한쪽의 인격의 다른 쪽에 대한) 교호적인 영향을 통해서 외적 자유(원인성)의 원리에 따라서 (공동생활하고 있는 인격들의) 하나의 전체라는 구성원들의 하나의 사회를 형성한다. 하나의 전체를 일컬어 가정이라 한다.”(MS, AB105) 여기까지 확인한다면 한편으로 칸트가 국가라는 공동체를 두고 “공통의 어머니(공화국)로부터 태어난 자로서, 말하자면 한 가족”(MS, A229/B259)이라 한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대물적’ 방식의 대인권을 생각한다면 종종 국가가 신민들을 ‘자신의 것’으로 가진다는 투의 서술들도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국가가 어떻게 ‘그의 국민을 가지고서’ 전쟁에 나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다시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더 미묘한 문제인데, 윤리형이상학 49절을 보면 칸트가 “(시민들을 자녀들로 취급하는) 무엇보다도 가장 전제적인 가부장적(väterlich) 정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적(väterlandisch) 정부”가 바람직하며 시민들은 자녀들과 달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점유하는 자립성을 지닌 국가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는 대물적 방식의 대인권이 성립하는 가정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차이가, 국가는 국민을 전쟁에 내보낼 수 있지만, 또한 군주로 하여금 국민 전체가 전쟁으로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에만 그들을 전쟁에 내보낼 수 있도록 하는 제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55절을 참조하라).
[13] “이러한 곳에서 사람들은 저 법정 자체를 한 나라의 정의라고 부르며, 과연 그러한 정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든 법적인 관심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물을 수 있다.”(MS, AB155)
[14] 그런데 사실 이 마지막 부분은 상세한 설명을 찾을 수 없었던 탓에 들어간 단순 추정이다. 어쩌면 이는 로마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일한 죄로 다시 처벌받지 않도록 함으로써 구성원의 권리를 보장하는 소위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15] 민주정이 가장 복합적인 형태이고 이전의 두 설명에서 추가된 부분이 이 지점이라고 한다면, 이렇듯 만인이 국민이 되고자 의지/의사를 합일하는 단계가 전제정과 귀족정에서는 부재한단 말인가? 전제정과 귀족정에서도 자신의 권리/취득을 확정하고자 하는 국민들이 그러한 공동 이해관심 하에서야 근원적으로 국가에 소속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nämlich den Willen Aller zuerst zu vereinigen, um daraus ein Volk, dann den der Staatsbürger, um ein gemeines Wesen zu bilden, und dann diesem gemeinen Wesen den Souverän, der dieser vereinigte Wille selbst ist, vorzusetzen.) 이 부분에서 하나의 국민(민족)을 형성하기 위해 만인이 자신의 의지를 합일한다는 첫 대목이 사람들을 국가시민 이전의 단계에 놓으면서도 ‘공동의 이해관심 하에 모인다’는 것과는 무언가 다른, 민주정에 특수한 의미를 주어야만 할 텐데, 이것이 무엇일지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16] 이제 여기에서 우리의 과제는 두 가지이다.
1) 민주정도 참된 공화정일 수 있는가? 참된 공화정이 ‘국민의 대의제’이고, 또한 『영원한 평화』에 따르면 입법권과 행정권의 분리라고 한다면, 나는 칸트가 이 질문에 긍정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언뜻 보면 민주정은 칸트 그 자신의 말로 참된 공화정일 수 있는 가능성이 부정된 것 같기도 하다. “민주정체의 형식은 낱말의 본래적 뜻에서 필연적으로 전제주의이다. 왜냐하면 민주정체는 하나의 행정권을 창설하거니와,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찬동하지 않는) 한 사람 위에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에 반하여, 그러니까 아직 모든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의결을 한다. 이것은 보편 의지의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자유와의 모순이다.”(ZeF, AB26) 이 서술만을 보면, 마치 민주정은 ‘다수결’에 의해 결정하기 때문에, ‘전체 국민 의지의 합일’에 의한 결정이 아님이 따라나온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칸트도 국가시민들이 공동입법에 참여하는 투표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투표에서 다수결이 아닌 형태로 어떻게 결정이 나겠는가(그렇다고 입법에서는 다수결이 허용되고 행정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칸트가 여기서 중요하게 본 것은 대표성과 그 의식에 따른 입법권과 행정권의 분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국가형식이 다만 근원적 입법의 문자에 불과하고, 근원적 계약의 정신은 단지 대의제일 것을, 즉 입법자를 대표하는 전체 ‘국민’으로서 도덕적 인격과 함께 “입법자가 동일한 인격에서 동시에 자기 의지의 집행자”(ZeF, AB26)이지 않도록 이 국민이 다른 도덕적 인격에서 집행자를 세우기를 책무지운다면, 이러한 도덕적 인격에서의 삼중적 분립(입법, 행정, 사법)을 의욕함과 동시에 그러한 의욕의 행사에서 각 인격에서 국민의 대표자임에 대한 의식만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우 개념적으로 민주정에서 참된 공화정이 세워지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물론 민주정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입법적인 대표자인 만큼, 그로부터 정당하게 행정권이나 사법권을 분리해 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을 것이고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단지 경험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다.
2) 하나의 물리적 인격이 다수의 도덕적 인격으로서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약간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칸트는 여하간 최소한의 물리적 인격이 있는 한 주권자로서의 이념이 단지 관념물로 남지는 않으며, 입법권과 행정권은 두 다른 ‘도덕적 인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기 때문에, 한 물리적 인격이 이렇게 두 다른 도덕적 인격을 통해 합일된 의지의 작용을 행사하는 국가가 가능한지 어떤지에 관해서는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근원적 계약의 정신이 ‘순수 공화국의 체제에 그 작용결과에서(in its effect) 합치’하기를 요구하고, 이러한 합치에 국가형식에서 최고 권력을 입은 자가 ‘단지 수에서만 다른 것’은 의미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고려해 볼 수 있다. 재판권을 이야기할 때에(45-49절 부분에서), 신민은 입법자 및 집행자와의 관계에서는 다만 수동적이기 때문에, 불법이 행해질 수 있다고 한 부분을 상기하자. 이는 즉 만약 입법자 및 집행자의 인격과 재판관의 인격이 한 물리적으로 동일한 인격 안에서 온전히 구분되지 않는다면, 불법이 일어나기 매우 쉬운 상태일 것임을 추론하게 한다. 더불어 이러한 추론 가능한 어려움으로 인하여 구성원들 자신도 그러한 인격의 분리를 신뢰하기 힘들 것이고, 국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17] “그래서 이 윤리 형이상학의 제1편에는 오직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왜냐하면 응용되는 저러한 경우들을 고려해 볼 때에 체계 자체라기보다는 체계로의 접근이 기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서의)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곧 선험적으로 기획된 체계에 속하는 법은 본문에, 특수한 경험의 경우들에 관련되는 법들은 제법 방대한 주해에 귀속시키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경험적인 법 실천과 그다지 잘 구별되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MS, ABIV)
[18] 사실 저항권을 부정하는 칸트의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거부할 수 없는 실천이성의 권위에 입각해 이미 그의 체계를 세운 ‘철학자’로서의 칸트가, 그에 따르면 전체 의지가 보편적 실천이성 그 자체로서 상위 의지를 세움으로써 법 개념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이 곧 국가의 근원적 성립이며, 따라서 이러한 법칙수립자로 표상되는 국민의 대표자가 곧 주권자라고 고찰한 순간부터 현실적 소망과는 다르게 주장해야만 하는 어떤 것(즉, 저항권의 부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나는 이해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라이프니츠도 모든 것이 모나드라는 주장을 정말 하고 싶었겠는가? 다만 걸리는 것을 한 가지 언급하겠다. 이는 이해할 수 있는 처사이기는 해도 상당히 비겁하다. 칸트 철학이 많은 ‘신자’를 낳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합리적 희망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도덕법칙의 권위를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체계적인 이론으로서 철학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자유의 실재성,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실천적으로나마 근거 있는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도 영원한 평화와 윤리적 공동체를 꿈꾸고 나아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혁명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일단 일어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와 같은 미온적인 태도는 결국 ‘나는 아니지만 누군가 이 폭압을 끝내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씨로 쉽게 귀결되는, 실천적 철학의 이상을 배반하는 극히 회피적인 태도 같다. 과연 실천이성이 혁명이 일어날 바에야 폭정과 같은 부정의의 사태가 지속되기를 의욕하겠는가 한 번의 폭력을 감내하겠는가 묻는다면 물구나무를 서고 생각해 봐도 이것은 참 어려운 문제지 오로지 전자만의 귀결이 가능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칸트가 이러한 진동자체에 대해 무언가 말해주었어야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 이러한 언명과 “그러나 의사의 자유는, (…) 법칙을 좇아서 혹은 법칙에 반해서 행위할 수 있는 선택의 능력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 (…) 자유는 결코, 이성적인 주체가 그의 (법칙수립적인) 이성에 대항하여 싸우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곳에서는 정립될 수 없다. (…) 자유는 이성의 내적인 법칙수립과 관련해서 본래 단 하나의 능력이며, 이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하나의 무능력이다.”(MS, AB27-28)와 같은 논의가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는 칸트 철학의 오래된 난제이다.
[20] 여기서도 그에 대해 ‘지배력’을 가진 국가를 ‘어머니 국가’로 칭하며 가정에 유비하고 있다. 국가와 가정의 유비에 대해서는 12번 각주를 참조하라.
[21] 실존 자체가 공동체에 복종하는 행위라는 것은 어쩌면 지난번 헤겔 법철학 268절을 다룰 때 애국심은 남다른 희생 같은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태나 생활관계에서 공동체를 실질적인 기초이며 목적으로서 안다는 데 익숙해진 마음가짐”이라고 했던 것보다 더 엷게 그러나 동시에 더 보편적으로, 빠져나갈 틈 없이 우리를 구속하는 애국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측면이나 칸트의 전쟁 관련 논의들을 보면 칸트를 마치 (국가가 아니라) 상업적인 시민 사회의 신봉자인 것처럼 소개했던 지난날 몇 개의 논문들이 참 신기하다. 사정은 거의 반대 같다.)
[22] 교회가 내면을, 국가가 외면을 규율하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이와 유사한 논의는 역시 헤겔 『법철학』 270절을 참조하라.
[23] 만약 어떠한 국가 구성원이 범법 등으로 그의 시민적 인격성을 잃음으로써, 거의 물건과 다름없는 노예/예속자로써 사용되게 된다면, 자연법이나 사법적인 상태에서도 행해지던 존중은 어디로 가 버리는가? 물론 그러한 자연 상태에서 폭력의 행사는, 애초에 자연 상태가 비-법적인 상태이자 부정의이므로 (다소 역설적이게도) 형식적으로는 적법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격에 대한 이러한 사물화는 윤리적이지 않기는 하지만, 법적이기는 하기 때문에 괜찮은가? 사실 이 또한 윤리적 인격으로서 괜찮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칸트는 동시에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최고도의 불법이며 따라서 공법으로의 이행이 법의무임을 말했다(MS, AB158 각주 참조). (이러한 사태는 칸트의 법이론은 자유의 법칙에 대한 철학, 달리 말해 실천이성의 윤리형이상학의 일부로, 이성 그 자신의 실천 능력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전개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는 데 기인한다.) 그렇다면 법 개념의 실현을 목적으로 세워진 공법 아래에서 이러한 실질적인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어떻게 허용될 수가 있는가? 여기서 자연법 및 사법의 명령과 공법은 괴리된다. 어쩌면 이러한 논의는 칸트를 도대체 자연법론자로 볼 수 있는지에 관련된 논의로 (다시금) 이어질 수도 있겠다. 더불어, 이러한 논의가 세계시민법 절에서 어떠한 국가가 세력을 넓혀가면서 본래 살고 있던 (미개한) 원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쫓아낼 수 있는가에 관해 그들과 토지 사용에 대한 점잖은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하는 칸트와 잘 이어질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볼 만하다. 도리어 그들은 국가의 부분조차 아닌 ‘밖의’ 사람이니까 말이다.
[24] 이러한 사면권이 전체 국민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법칙수립자 또한 국민에 관하여 결정할 수 없다는 그의 논의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전체 국민이 어떻게 범죄를 저지른 자가 형벌받지 않기를 의욕하겠는가?
[25] 이 절의 서술에서 우리는 칸트가 국가들 간의 자연 상태는 (적어도 헤겔 법철학에서 개별 인격들 간 상호 인정과 국가들 간 상호 인정의 유비가 성립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유사하게) 개별 인격들 간의 자연 상태에 유비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개념적으로 볼 때는 국가들에게도 외적인 나의 것과 너의 것이 확정되기 위해서는 또한 국가들의 국가로 향하여 ‘국제법’이 아니라 ‘국제공법’이 세워지기를 요청해야만 할 것임을 알 수 있다(개념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지는 또 다른 논의이겠지만, 나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전 수업들에서의 논의와, 위의 ‘영속적인 전쟁 상태’, ‘법적 상태에 근접해 가는 상태’ 등의 서술에서 우리는 또한 여러 번 그러한 ‘제 국민국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비춰져 왔음을 안다. 그러므로 사법적 상태가 그러한 것이었듯이, 무엇이 법적인가/권리 있는가에 대해서 국제법 영역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자연 상태에서의 논의로, 앞선 국가법에서의 논의보다는 훨씬 잠정적인 논의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또한 그러므로 여기는 ‘국제공법’의 원리들을 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게 되고, 이것이 어떠한 차이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6] 국민에 대해 주권자는 ‘의무지어질’ 수 있는가? “국가에서 지배자는 신민에 대하여 순정히 권리들만을 가지며, 아무런 (강제)의무를 갖지 않는다.”(MS, A175/B205)는 구절을 상기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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