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위기』에서 초월론적 주관의 상호주관성을 통한 생활세계의 필연적인 보편성 확보
- 후설 현상학에서 절대적 진리와 보편적인 목적성의 이념, 그리고 이를 추구하는 인간적 사랑을 위하여
0. 서론
세계는 그 있음(Dasein)과 어떠함(Sosein)에 있어서 비합리적 사실(Faktum)이고, 이것의 사실성(Faktizität)은 오로지 동기 연관들의 견실함에 기인한다. (...) [하지만] 존재를 정초하는 힘은 경험이 진행될수록 커지고, 경험과학이라는 형식으로 합리화(Rationalisierung)가 진행될수록 커진다. 합리화는 모든 예외를 규칙에 재편입시키고, 모든 비존재에게 어떤 존재에 속하는 가상을 배정한다. 그리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경험의 힘은 (이성 권력인) 압도적 권력(Gewalt)으로 커져서, (...) 실재하는 세계의 비존재로 나아갈 가능성은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비이성적이고 근거 없는 가능성(바로 공허한 가능성)이 된다. (Hua XVI 『사물과 공간』, 289-290)
『사물과 공간』 결어에서 후설은 사물과 세계 통일체가 이성에 따라 규칙적으로 구성되고, 이에 따라 우리는 “존재를 선언할 권리”를 지니지만, 그럼에도 이 힘은 언제든 더한 반발 아래 제압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지 지금까지 조화롭게 정립되었을 뿐인 사물과 세계가 언제나 그러한 통일성 속에서 우리에게 현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후설 현상학에 필연적인, 존재에 대한 흄적 회의일 것이다. 그는 불변하는 객관적 사물들의 세계도, 선험적인 직관 형식도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한 한 종래 정초된 모든 사물적인 것에서 나아가 우리에게 ‘조화로운 사물의 세계가 실재해야만 한다’는, 인류가 사라지기 전까지 영원할 이 약속은 이성적 필연성 밖에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무한히 감소시키며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즉 ‘이렇게 통일적으로’ 정초되는 세계를 계속적으로 경험하고, 학문화하면서 그 합리적인 구조와 견고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실재하는 세계의 비존재라는 가능성은 점차 근거 없는 공상들 속으로 밀어넣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은 정말 그러한가? 후설 현상학은 다만 우연적이고 잠정적인 사물과 세계의 통일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우리의 모든 학문은 그러한 제한적인 합리성과 보편성의 지반 위에 그리고 이러한 불안감을 몰아내려는 끊임없는 시도 속에 존립하는가?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와 보편성의 이념 아래 세계와 의식의 필연을 발굴하고 그로부터 결국 인간의 삶이 집행해야 할 당위들을 이끌어내는 것이 적어도 기초 학문들의 목적은 아니던가? “학문적 인식 그 자체는 객관적 인식 – 즉 모든 사람에 대해 절대적 보편성에서 타당한 인식의 기체(Erkenntnissubstrat)를 향한 인식이 아닌가?”(Hua VI, 126, 강조는 필자) 이 글에서 나는 초기 저작 『사물과 공간』의 결어가 통일적 세계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불가피한 회의를 보여주는 바와 달리, 후기 후설 현상학에서 비로소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세계의 보편 구조가 필연적인 것으로 정립됨과 그 이유, 그 이론적 및 실천적 함의를 『위기』를 중심으로 밝히겠다.
이를 위하여 본고는 우선 (1)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을 이론적으로 근거짓기 위해서는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가 확보되어야 하는 문제를 다루겠다. 그 후, (2) 『위기』에서 생활세계 아프리오리의 존재가 증명 없이 전제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는 사실 (3) 초월론적 주관성의 타자 지향성과 역사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존재타당성을 부여받는 것이며, 또한 그로써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생활세계의 보편 구조가 확보될 수 있음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4) 초월론적 주관의 근본적인 상호주관성과 그 대상극으로서 필연적인 보편성의 세계가 가지는 이론적 및 실천적 함의를 이야기하고, (5) 결론 및 의의와 한계점에 대해 논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1.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의 이론적 타당성을 근거지울 수 있는가?
후설은 저작 『위기』(Hua VI)에서 객관성의 이념이 실증학문을 지배하고, 실천적 삶의 주관성 및 상대성은 다만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사태를 비판하며,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은 소위 객관적 학문이 가진 명증성도 결국 구체적인 생활세계적 경험 속의 명증성에 토대함을 역설한다. 즉, ‘실증’ 학문들이 경험하는 것은 결코 의식과 독립적인 ‘객관적’ 자연이 아니며[1], 오히려 그들은 근본적으로 “선학문적으로 인류[인간성, Menschentum]에 대해 존재하는”, “선논리적인 타당성(vorlogische Geltung)”(Hua VI, 127)으로부터 그 이론적 진리의 기초를 얻는다. 그러므로, 후설은 말한다. “생활세계(Lebenswelt)는 근원적 명증들의 영역(ein Reich ursprünglicher Evidenzen)이다.”(Hua VI, 130)
직관적으로, 우리의 감각과 의식 속에서 생생히 경험되는 이 세계와 삶으로부터 학문성 역시 싹튼다는 것은 자명하다. 삶이 없으면 학문도 없고, 우리는 ‘상황적 진리’들의 경험으로부터 비로소 ‘보편적 진리’로 나아가기를 희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객관적 학문이 생활세계로부터 정초된다’는 언명이 의미하는 바는 필연적인 발생적 선후 관계, 단지 그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위기』에서 후설은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을 기초짓는 다양한 양상을 짚어보고 있고[2], 그 안에서 “학문 일반은 인간의 정신적 작업수행”(Hua VI, 120)으로서, “서로 함께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삶의 작용(Aktleben)”(Hua VI, 125)이라는 말과 같이 생활세계에서의 학문 및 학자 공동체 수립이 실증 학문 이론들의 ‘발생적 가능 근거’라는 점도 지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넘어, 후설은 생활세계가 또한 ‘객관적 학문의 이론적 타당성을 정초’한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그는 생활세계의 주관적-상대적인 것이 “이론적-논리적인 존재의 타당성을 궁극적으로 정초”(Hua VI, 128)하고, 객관적-논리적인 이론들이 “자신의 전제들과 자신의 명증성의 원천을 주관적-상대적인 것 속에”(Hua VI, 136, 강조는 필자)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 이 ‘원천’이 의미하는 바로, 이를테면 수학적 통찰의 명증성은 “생활세계의 명증성 속에 자신의 의미(Sinn)의 원천과 권리(Recht)의 원천”(Hua VI, 144, 강조는 필자)을 갖는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모든 이론적 성과는 생활세계에 대해 타당하다”(Hua VI, 134)는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 및 그 이론들의 타당성과 명증성에 ‘발생적으로 선행’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가진 타당함과 명증함이라는 ‘권리(Recht) 자체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분명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에 대해 발생적일 뿐 아니라 ‘정적인 정초’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의 이론적 타당성을 근거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가능한가? 후설은 “객관적 학문이 주목하고 실행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해 절대적 보편성에서 타당한 인식의 기체(Erkenntnissubstrat)”(Hua VI, 126), “모든 주체에 대해 절대적으로 타당한 객체에 대한 진리라는 목표”(Hua VI, 268)임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만약 생활세계가 “근원적 명증들의 영역”(Hua VI, 130)이라는 것이 즉,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의 이론들에게 이렇듯 ‘모든 주체에 대해, 절대적 보편성에서 타당함’이라는 권리 역시 부여할 수 있는 원천임을 뜻해야 한다면, 결론은 이것이다. “모든 이론적 성과는 생활세계에 대해 타당하다”(Hua VI, 256)라는 말이 밝히는 바와 같이, 모든 이론적 성과는 생활세계로 되돌아와 적용됨으로써 그 타당성을 검증받을 수 있다. 그런데 객관적 학문이 궁극적으로 검증받기를 요구하는 이 이론적 타당성은 모든 주체에 대해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타당성이다. 그러므로, 발생적으로 객관적 학문을 낳는 주관적-상대적인 생활세계가 또한 이러한 이론적인 보편적 타당성을 검증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생활세계 또한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객관적 학문들이 밝히기를 목표하는 바라는 전제 하에서이다. 즉, 객관적 학문의 이론적 타당성이라는 말은 객관적 학문의 이념에 의해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의미에서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생활세계가 이러한 타당성이라는 이성적 권리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타당한 구조의 담지자여야만 한다. 그로써 객관적 이론들의 명증성과 타당성을 확증해 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후설 현상학에서 의식 독립적인 객관도, 모든 주관이 가진 동일한 직관 형식도 전제되지 않을 때, 각 주관들이 경험하는 주관적-상대적인 세계는 절대적으로, 다시 쓰자면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모든 인간 주체’에게 타당한 ‘세계의 필연적인 보편 구조’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다음 장은 후설 『위기』에서 ‘주관적-상대적인 생활세계’와 동시에 ‘아프리오리한 보편 구조를 가진 생활세계’ 사이의 이러한 긴장을 다룬다.
2. 주관적-상대적인 생활세계에서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Apriori)는 확보될 수 있는가?
『위기』에서 후설은 생활세계의 주관-상대성과 선험적인 보편성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우선 전자에 대해, 그는 “‘주관적-상대적’인 생활세계”(Hua VI, 133), “선학문적인 세계 삶에서의 단순히 주관적-상대적인(subjektiv-relativ) 직관”(Hua VI, 125), 그리고 “객관적-논리적 이론”이 자신의 원천을 “주관적-상대적인 것”(Hua VI 258) 속에 갖고 있다는 것, “객관적으로 참된 세계가 생활세계가 역설적으로 상호 의존”(Hua VI, 134)한다는 것 등의 서술로 드러낸다. 결국 이렇듯 주관적-상대적인 생활세계에 객관적 학문이 토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이’ 세계, 즉 모두에게 공통적인 세계”가 “끊임없는 타당성의 토대(Boden)이자, 우리가 실천적 인간이든 학자이든 항상 준비된 자명성들의 원천(Quelle)”(Hua VI, 125)이라고 역설하며, “‘추상적으로 표본화할 수 있는 세계의 핵심(Weltkern)’, 즉 단적으로 상호주관적 경험들의 세계”(Hua VI, 137)”, “생활세계가 그 모든 상대성 속에 자신의 보편적 구조(allgemeine Struktur)를 가진다”(Hua VI, 142) 등의 서술을 통해 주관적-상대적이지 않은 후자의 생활세계, 즉 “보편적인 순수한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의 이념”(Hua VI, 144, 강조는 필자)을 명시한다.
궁극에 후설은 “주관적-상대적인 아프리오리”(Hua VI, 144)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이르는데, 설령 후설에게서 ‘아프리오리(Apriori)’가 논리적 필연성 개념과의 연관 하에 있는 전통적인 선험성과 달리 다만 “논리상 경험에 앞서며, 인식상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이종훈, 1999)는 뜻을 실제로 가진다 하더라도,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에 붙는 ‘공통적’, ‘핵심적’, ‘상호주관적’과 같은 수식어는 적어도 그것이 경험적인 확증의 근거로서 ‘보편성’을 지님을 분명히 한다. 심지어 이로부터 나아가, 생활세계에 보다 엄격한 의미의 보편성, 필연적인 보편성마저 요구하는 듯 보이는 후설 자신의 서술도 존재한다. 객관적 학문에 대한 판단중지 이후 생활세계 존재론이 심문하는 “자연적 태도 속의 생활세계의 불변적인 구조(lebensweltlich invariante Struktur)”(Hua VI, 176, 강조는 필자), “모든 상대적 존재가 결합된 이 보편적 구조는 그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구조를 그 보편성에 주목하면서 신중하게 살펴보면, 단연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접근할 수 있게 확립할 수 있다”(Hua VI, 142, 강조는 필자), 와 같은 그의 서술들은 후설이 마치 생활세계의 이러한 ‘절대적인 보편적 아프리오리’의 존재를 자명하게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적어도 세계에 관한 초월론적 설명을 시도하는 후설 현상학에서, 각 주관에게 상대적으로 구성되는 생활세계가 또한 ‘모두에게 동일하게 접근 가능한’ 보편적 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자명하게 확립될 수 있는가? 그러한 절대적인 보편성은 무엇으로부터 확보되는가? 후설 그 자신이 『사물과 공간』 결어에서 보편적으로 통일적이고 조화로운 사물 및 세계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불가피한 회의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물론, 공시적인 인간 공동체, 혹은 인류 전체에 대해서든,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공간성과 그에 따른 통일적인 사물의 현출 같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쉽게 바뀌지 않는 세계 구조가 있을 것임은 직관적으로 자명해 보인다. 이 글이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러한 직관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후설 현상학에서 그러한 ‘세계의 절대적인 보편 구조의 존재’를 초월적으로 연역하는 아래로부터의 설명이다. 또한, 이는 이미 세계 속에 구성된 인간들 사이 상호주관성의 차원 역시 넘어선다. 보편적인 생활세계의 구조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통념적으로 일인칭적 주관에게 보다 특권적으로 여겨지는 감각질(qualia)이나 운동감각(kinesthetics, Kinästhese) 등의 존재마저 구체적인 생활세계 속에서는 “두 주체 사이의 쌍방향적인 지향적 작용이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나-너-관계”(die Ich-Du-Beziehung, Hua XIV, 166 ff.)”(이남인, 2013)에 기초한 의사소통의 공동체 속에서 반복적으로 승인되면서, 혹은 “선술어적 차원에서는 타인의 신체적 표현을 매개로”(박지영, 2016) 상호주관적 명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고, 현실적으로 그러하다. 하지만 이렇듯 존재타당성에 대한 ‘상호 인정’을 넘어, 현상학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생활세계의 보편 구조가 존재한다는 확증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로써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을 이론적으로 정초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초월적 근거가 필요할 터이다. 후설 현상학은 일상적 직관에 호소하지 않고도 언제나 주관적-상대적인 경험 속에서, 모든 인간 주체 즉 인류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으로 확증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정당한 이성적 기반이 있는가?
그런데 어쩌면 현상학적 심리학의 지평에서도, 우리는 생활세계에 대하여 ‘본질 직관(Wesensanschauung)’하기를 의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상적 환원(eidetische Reduktion)을 “어떤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개별적 대상을 상상 속에서 산출해 나가면서 저 모든 개별적 대상들에 공통적인 보편적 속성으로서의 본질을 파악하는 과정”(이남인, 2004)이라 정의한다면, 우선 ‘세계’가 형상적 환원이 적용되는 권역 하에 있는지 의문시될 것이다. “세계는 어떠한 존재자처럼, 어떠한 객관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유일성(Einzigkeit) 안에서의 존재자이다. 세계에게 복수(Plural)는 무의미하다.”(Hua VI, 146) 즉, 세계의식(Weltbewußtsein)과 사물의식(Dingbewußtsein)은 불가분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여, 세계에 대해서는 형상적 환원을 위해 ‘본질을 구현하는 무수히 많은 개별적 대상’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의사소통적이거나 선술어적인 공동체 속에서 인간들의 상호 인정을 넘어, 유일성으로서 세계에 대한 본질 직관이 어려운 상태에서도, 어떻게 전 인류에게 적용되는 생활세계의 본질적 혹은 보편적 구조의 존재가 후설 현상학에서 확증되고 객관적 학문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부터 이 글은 결론적으로,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생활세계가, 이미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의미에서 상호주관성을 지닌 초월론적 주관의 대상적 상관자로서 존재함을 바탕으로, 앞선 의문들에 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문제의 해소: 초월론적 주관의 ‘타자 지향성’과 ‘역사성’을 통한 생활세계의 필연적인 보편 구조
3.1. 세 가지 층위의 생활세계 개념
이를 위하여, 우선 세 가지 층위의 생활세계를 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 후설은 『위기』에서 다양한 의미의 생활세계를 구분할 수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그는 “때에 따라 더 좁게나 넓게 파악된 생활세계의 고유한 존재의미(Seinssinn)”(Hua VI, 242)가 있으며, “‘생활세계’라는 명칭은, 비록 본질적으로는 서로 관련되었더라도, 아마 서로 다른 학문적 과제들을 제기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며, 그러한 일을 요구한다”(Hua VI, 246)라고 서술한다. 또한 그 후, 이에 따라 생활세계를 주제화하는 두 가지 근본적 방식 역시 존재함을 논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계에 곧바로 향한 소박한 자연적 태도와 생활세계와 그 객체들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주관적 방식들의 방법에 대한 일관적 반성적 태도의 이념”(Hua VI, 146)이다.
일견 전자는 객관적 학문이 취하는 태도를, 후자는 객관적 학문들에 대한 판단중지를 수행한 이후이면서도 아직 ‘항상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의 세계’를 자각하고 세계에 대한 의식의 초월론적 구성 작용에 주목하지는 못한 생활세계 존재론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후설은 전자의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은 (…) 세계의 지평에 들어가 사는(Hineinleben)”, “그때그때 주어진 객체들을 곧바로 향한 일상적 삶”(Hua VI, 146)이며, 후자는 “사념들의 변화에서도 어떻게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타당성으로서의 세계, 즉 ‘이’ 세계가 우리에 대해 성립하는가”(Hua VI, 147)에 대한 관심을 세우는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여, 전자는 오히려 생활세계에 대한 객관적 학문의 태도와 더불어 여전히 ‘세계 속에 들어가 사는’ 자연적 태도에서 주제화된 생활세계, 즉 생활세계 존재론의 태도 역시 의미할 수 있으며, 후자는 어떻게 이 세계가 우리에 대해 성립하게 되는지를 탐구하는, 즉 초월론적 현상학에서도 주제화되는 생활세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초월론적 주관성의 상관자(Korrelat)”로서 환원된 “초월론적 현상인 ‘세계’”(Hua VI, 155)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세계는 다음과 같이 세분화될 수 있다. 1) 객관적 학문에 의해 대상화된 것으로서 생활세계, 2) 실천적 삶의 지평이자, 생활세계 존재론이 주제화하는 생활세계, 3) 초월론적 주관성의 상관자로서 생활세계. 실제로 여러 학자들 역시 생활세계 개념이 구체적으로 분류되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한다. Mohanty(1974)는 경험적인 ‘생활세계 1(LW 1)’과 아프리오리한 ‘생활세계 2(LW 2)’를 구분하며, Welter(1986) 또한 사회적,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변양되는 세계를 ‘환경세계(Umwelt)’로 보고, 그러한 변양의 밑바탕에 있는 근본 구조를 ‘생활세계(Lebenswelt)’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이종훈(1992) 역시 생활세계를 ‘경험세계’와, 보편적 구조를 지니고 초월론적 주관성의 상관자가 되는 ‘선험세계’로 나눌 필요성을 제시한다. 이 글의 분류는 이종훈(1992)의 것과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구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음에도, 어떻게 보편적 구조를 지닌 생활세계가 초월론적 주관의 상관자인지,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심층적인 함의를 묻지는 않았다.
위의 세 가지 분류에 따라, 이제부터 우리가 나아가 주목할 점은 생활세계 존재론이 심문하는 “자연적 태도 속의 생활세계의 불변적인 구조(lebensweltlich invariante Struktur)”(Hua VI, 176) 외에도, 초월론적 주관성의 상관자로 탐구되는 세계 역시, 단지 한 주관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으며 비로소 타당하게 되는,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세계일 뿐 아니라, 또한 이미 “통일적이고 보편적인”(Hua VI, 147) 타당성의 세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묻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결국 초월론적 주관에서도 여전히 함께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지탱할, 그 타당성을 담보할 타자가 요청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유일한 존재, 가령 신만이 존재한다면, 다른 것들 중에서의 하나를 뜻하는 개별성과 마찬가지로 그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을 뜻하는 보편성 역시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초월론적 주관에서도 타자에 대한 지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또한 초월론적 자아의 일부로서 그의 다른 극인 세계의 필연적인 가능 조건임을 의미한다. 즉, 세계는 필연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계’, ‘우리의 세계’, 그리고 이를 위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규정 가능한 이 세계’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초월론적 주관성의 영역에서부터 확보된 생활세계의 보편적 구조만이 다시 자연적 태도에서의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로 주목되고, 결국 객관적 학문들의 이론적 진리를 이성적으로 근거지울 수 있을 터이다.
3.2. 초월론적 주관의 근본적인 ‘타자 지향성’
그렇다면 위의 주장을 위한 선결 과제는, 초월론적 주관의 권역에서 타자존재의 정립 여부가 될 것이다. 실제로 초월론적 주관은 결코 유아론적 주관이 아니다. 후설은 명시적으로, “주관성은 상호주관성 속에서만 그 본질, 즉 구성적으로 기능하는 자아”(Hua VI, 175)임을 역설하고, “세계를 ‘모두에 대한 세계’(Welt für alle)로 구성하는 초월론적 상호주관성”(Hua VI, 188)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또한, 그는 “나로서의 나는 나에 대해 존재하는 타자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이러한 타자들은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지향적으로 짜여 있음이란 초월론적 공존의 필연성”(Hua XV, 209)이라고 적시한다. 이렇듯 분명한 사례들을 통하여 우리는 적어도 텍스트적으로, 후설이 초월론적 주관의 지향성이 곧 ‘타자에 대한 지향성’ 역시 함축한다고 여겼음을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월론적 주관이 타자존재에 대해서 판단중지하지 않는 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후설은 『위기』의 ‘생활세계를 통한 환원’에서 객관적 학문에 대한 판단중지 이후 두 번째 판단중지인 자연적 태도에 대한 판단중지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즉, 그것은 세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자연적으로 현존하는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언제나 “미리 주어진 세계가 끊임없이 타당하다고(Geltungsvollzug) 정립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타당하다고 정립하는 것을 끊임없이 억제하는 것”(Hua VI, 151)이다. 다르게 말하면, “‘세계 그 자체가 미리 주어져 있다’”(Hua VI, 151)는 사실 자체를 표면화, 주제화하면서 ‘그렇다면 이렇듯 타당하다고 정립하는 주관성이란, 그리고 이에 의해 정립되는 세계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의 선타당성이 괄호에 넣어짐은, 후설 자신이 명시하듯이, 세계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무화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판단중지가 일관되게 철저히 수행되는 가운데 세계에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성-이것의 타당성을 통해 세계는 어쨌든 존재한다-의 상관자로서 순수하게 우리의 시선 속에 위치한다.”(Hua VI, 155) 즉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에 대해 미리 존재하지 않고, 초월론적 주관의 상관자로서 ‘다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는 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초월론적 주관의 영역에서 ‘타자’가 우리의 자연적인 삶에서처럼 시공간적인 세계 속에 구성된 어떠한 개체로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세계의 존재를 정립하기도 전에 그것을 전제하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계가 초월론적 주관의 대상적 상관자로서 다시 드러나듯이, 초월론적 주관의 타자 역시 개별적인 초월론적 주관에게서 판단중지되지 않은 타자 지향성의 상관자로 함축된 것으로서, 즉, 그와 동등한 초월론적 주관으로서 여전히 다시 주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론적 주관의 타자 지향성은 결국 초월론적 주관의 차원에서도 근본적인, 공시적인 상호주관성을 밝혀주는 것이다.
또한 덧붙여, 이는 데카르트적 환원의 길을 통해 도달한 초월론적 주관에서도 예외적이지 않다. 실제로 이남인(2001)은 데카르트적 환원은 “초월적 주관의 영역 중에서도 나에게 명증적인 직관의 양상 속에서 주어지는 나의 반성적인 초월적 주관의 영역”을 비춰주지만, 이 경우에도 “나의 초월적 주관의 영역에 이미 다른 초월적 주관이 지향적으로 함축”되어 주어지기 때문에, 초월론적 주관은 이미 초월적 상호주관성의 영역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렇듯 ‘생활세계를 통한 길’과 ‘데카르트적 길’을 통해 도달한 초월론적 주관에 공통적인 상호주관성은, 후설이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후에도 “‘타자’라는 의미, 그리고 타자와 관련된 모든 의미를 주제로 삼는 영역에서 배제함”(박지영, 2019)을 의미하는 ‘원초적 환원(primordiale Reduktion)’을 추가적으로 수행해야만 한다고 본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3.3. 초월론적 주관의 근본적인 ‘역사성’
더불어, 이러한 초월론적 주관은 또한 이미 역사적이다. 텍스트적으로 이는 “모든 자아(ego)는 자신의 역사를 가지며, 그 역사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 역사란 절대적 존재의 강력한 사실(Faktum)”(Hua VIII 『제일철학』 2권, 506)이며, “습관(Habitus)은 경험적 자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자아에” (Hua IX 『현상학적 심리학』, 111) 속하는 것이고, “자아는 역사를 가지며, 이 역사로부터 자신에게 습득적이며 동일한 자아로서 남아 있는 것을 산출한다”(Hua IX, 211)와 같은 후설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은 개별적인 초월론적 자아의 자기동일성 확보가 역사성에 근거한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자아의 자기동일성 확보를 위해서는 자연스럽게도 자아의 인칭 변경, 즉 자기의식 가능성이 필요하다. 이때 후설은 ‘반성되는 자아’가 아닌 ‘반성하는 자아’가 선반성적으로 그러한 자기 자신을 근원적으로 의식할 때를 지시하기 위해서, 근원자아(Ur-Ich) 개념을 도입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원자아는 원칙적으로 다시 ‘반성되는 자아’와 ‘반성하는 자아로서 또 다른 근원자아’로 무한히 분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설은 “근원자아가 그 자체로 인칭 변화를 시킬 수 있다”(Hua VI)는 특성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틈은, 바로 이러한 반성하는 자아와 반성되는 자아 사이에 생기는 시간적 간극이다. 후설은 “자아가 시간화된 것으로서 자신의 지나간 자아 그리고 지금 존재하지 않는 자아와도 어쨌든 교제할 수 있고 이러한 자아와 대화할 수도 있다”(Hua VI, 175)고 말하며, 자아는 이렇듯 “자신의 여러가지 시간양상들을 통해 구성되면서 지속하는 자아가 되는”(Hua VI, 175) 것이라 말한다. 즉 초월론적 자아로서 우리는 시간적으로 펼쳐져 있음으로써, 즉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그것들을 반성함으로써만 비로소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월론적 주관의 역사성은 후설에게서 비단 한 개별적 자아의 자기동일성, 즉 “시간의 연속성 속에 동일한 자아, 존재하고 존재했고 자신의 미래를 자신에 앞서 갖는”(Hua VI, 175) 한 자아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토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나는 나이다’라는 말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주어의 ‘나’와 술어화된 ‘나’가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의식되지만 늘 익명적으로 남아 있는 근원자아에게, 그 대상으로서 반성되는 자아에 대한 지각은 “최초의 대상영역, 즉 원초적 영역”, “생소한 지각”(Hua VI, 188)으로서 최초의 타자성, 최초의 초월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자아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상호주관적임으로써 비로소 타자들과 세계를 구성하는 초월론적 주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설은 “근원적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리고 자신 속에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을 구성”(Hua VI, 188)하는 사태를 언급한다. 자아가 자신의 역사성으로부터 이러한 최초의 대상 영역을 발견함으로써만 초월론적 주관은 비로소 앞서 논의한 타자 지향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로써 역사성이라는 시간축이 논의 영역으로 들어왔기에 초월론적 주관의 타자 지향성에 대한 주장은 이제 공시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후설은 “우리-종합(Wir-Synthesis)” 역시 “하나의 시간화 즉 자아 극의 동시성이라는 시간화”이며, 우리 모두의 역사성은 마침내 동시적이지 않은 자아들을 포함하는 “모든 자아주체의 ‘공간’”(Hua VI, 175) 즉 모든 초월론적 주관 공통의 지평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보편적 사회성으로서의 인류”(Hua VI, 175)의 구성이다. 즉 후설의 현상학에서, 초월론적 주관의 타자 지향성과 역사성의 직조(織造)는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 자체를 ‘역사적 공동체’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근원자아의 인칭 변화 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초월론적 주관의 근본적인 역사성과 그에 기반한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타자 지향성은 성숙한 초월론적 주관의 인류에 대한 상호주관성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또한 이렇듯 근본적으로 침전된 역사성을 갖는 초월론적 주관이 구성하는 세계 역시 “그 자체로 역사적”(Hua XV, 139)인 삶의 장으로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세계는 후설 현상학의 차원에서도 결코 한 유아론적 주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든 그 순간부터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인류 공동체 모두의 것이다. 역사적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이 세계는 따라서 모든 초월론적 인간 주체에게 정립 가능한, 나아가 소통 가능한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를, 적어도 인류가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함유해야 한다.
3.4. 초월론적 주관의 인류에 대한 상호주관성이 담보하는 생활세계의 필연적인 보편 구조, 그리고 ‘절대적 진리와 보편적인 목적성의 이념’
결국, 초월론적 주관은 그의 근본적인 타자 지향성과 역사성에 의하여,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창이 있는 모나드’로서 성립한다. 다시 말하여, 초월론적 주관은 다만 나와 다른 초월론적 주관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이미 인류와, 인간 현존재 자체와 지향적으로 관계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상호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이면서도 항상 개별적이지 않은 목적성을 짊어지고 있는 이러한 초월론적 주관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구성하는 세계는 그 자체 필연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계, “‘모두에 대한 세계’(Welt für alle)”일 수밖에 없으며, 오직 그러한 한에서 모두에게 공통적인, 모든 초월론적 주관이 정립 가능한 “통일적이며 보편적인”(Hua VI, 147) 구조가 담보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또한, 이러한 보편적인 구조의 존재에 의하여 객관적 학문은 생활세계에 이성적, 이론적으로 근거 지어지며, 근거 지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는 후설 현상학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후설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성(Vernunft)은 인격적 활동이나 습득성 속에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의 종적 특성”(Hua VI, 272)이며, 이러한 이성이 “역사의 의미(Sinn)”(Hua VI, 45)를 구성한다.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의 “인격적 삶은 발전의 끊임없는 지향성 속에 끊임없이 [무엇이] 되어가는 것(Werden)”(Hua VI, 272)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한 신체 안에 구획된 자연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인류, 인간 현존재 자체와 지향적으로 관계맺는, 상호주관적인 초월론적 주관이다. 그리고 세계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절대적인 상호주관성 속에서 구성되기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모든 주관에게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학문은 진리의 이념을 확고하게 가진 채 이론적으로는 세계와 의식의 보편적인 존재방식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실천적으로는 인류 공동체로서의 보편적인 목적성을 밝히기 위해서도 나아갈 수 있다. 앞선 서론의 말을 다시 쓰자면, 우리는 적어도 ‘절대적인 진리와 보편성의 이념 아래 세계와 의식의 필연을 발굴하고 그로부터 결국 인간의 삶이 집행해야 할 당위들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다시, 후설은 말한다. “이념을 사랑하고 산출하며 이 이념에 의해 삶을 규범화함으로써 공동체의 것이 된 공동체의 정신적 삶은 그 자신 속에 무한한 미래지평을 포함한다.”(Hua VI, 323) 초월론적 주관의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상호주관성과 세계의 필연적인 보편 구조가 초월철학에서도 확보되는 한, 이러한 그의 언명은 단지 공상적인 낙관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현존재 모두의 역사적 삶이 펼쳐지는 장으로서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의 공동 소유자 즉 타당성의 공동 담지자로서, 그리고 언제나 함께 그 속을 살아가는 실천적 행위자로서 확신 아래 진리의 이념을 추구하며, 또한 보편적 목적론(Teleologie)의 의무를 진 채, 무한한 가능성 속에 있는 우리의 생활세계를, 그로써 인간성을 조형해 간다.
4. 근본적으로 ‘상호주관적인 초월론적 주관’과 ‘필연적으로 보편적인 세계’의 함의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렇듯 보편적 구조를 지닌 생활세계가 근본적으로 상호주관적인 초월론적 주관의 상관자라는 사태의 실천적 및 이론적 함의 두 가지를 정리할 것이다.
1) (객관적) 학문의 가능성과 필연성. 인류에 대해 상호주관적인 초월론적 주관과 필연적인 세계의 보편 구조는 객관적 학문을 가능적인 것으로 만든다. 보편적 구조를 지닌 생활세계가 근본적으로 상호주관적인 초월론적 주관의 상관자임은, 다시 “초월론적 자아가 자신을 객관화한 것(Selbstobjektivation)”(Hua VI, 190)으로서 자연적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를 가능케 하고, 결국 그에 이론적으로 토대한 객관적 아프리오리를 추구할 가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월론적 주관의 상호주관성이 공시적인 타자 지향에만 한정되지 않고 역사적인 타자들로 뻗어나감에 따라, 우리에게는 또한 인류이자 실천적 행위자로서 세계와 의식 현상의 이러한 아프리오리한 진리를 추구하여 역사와 진정한 인간성의 의미를 끊임없이 구성해 갈 ‘보편적인 목적성’이 부여되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후설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진리 그 자체’라는 이념은 인간을 새로운 단계로 고양하는, “새로운 역사성(Historizität) 속에 인간성의 삶을 고양하게 소명을 받은 것”(Hua VI, 271)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개별 초월론적 주관이 인간 현존재 모두에게 공통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는, 또한 진리를 열망하는 (객관적) 학문의 태동과 발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보편적인 목적성의 이념을 위해 필연적인 것으로 명령한다.
2) 데카르트주의를 위한 헌신. 이하영(2022)은 후설의 후기 발생적 현상학이 결코 데카르트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역설한다. (1) 모든 인식의 엄밀한 정초라는 공동의 목표, (2) 가설적 세계 무화를 통한, 필증적으로 존재하는 주관으로의 귀환, (3) 자연적 인식의 근원이 되는 초월론적 인식으로 되돌아가기를 열망. 이 글은 앞선 세 가지 이유가 충족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겠지만, 적어도 후설의 데카르트주의적 헌신의 양상을 한 가지 더하고자 한다. 초월론적 주관의 인류에 대한 상호주관성, 그리고 이에 따른 세계의 필연적인 보편 구조는 ‘인류 공동체’와 ‘모두를 위한 세계’라는 말을 성립시킴으로써, 인간 현존재가 생활세계 속에서 어떠한 “규범양식으로서 끊임없는 [새로운] 역사성과 발전을 이룩”(Hua VI, 329)해 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역사성은 사태 그 자체로 다가서는 현상학적 태도와 “인간성의 철학적 심층까지 도달하는 판단중지”, 이를 통해 도달한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 삶에 대한 자기해석적 작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따라서, 후설이 『위기』에서 보여준 초월론적 주관의 인류에 대한 상호주관성은 “‘현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생시킨”(Hua VI, 82) 데카르트적 판단중지의 근본주의 정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던 “총체적인 현상학적 태도와 이 태도에 속한 판단중지”(Hua VI, 140)가 어떠한 근원적인 목적성을 지니는지 밝혀낸다. 이 글은 초월론적 주관이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상호주관성을 지님으로 인해, 판단중지의 최종적인 목적이 “인간성의 철학적 심층까지 도달”하여 “인간성 자체를 철저하게 변화[개정, Änderung]”(Hua VI, 154)시키는 것임을 천명할 수 있게 됨으로써 동시에 데카르트주의의 심층부에 도달하여 실천적 함의를 드러내었음을 주장한다. 이로써 후설은 데카르트주의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데카르트주의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5. 결론: 모두를 위한 세계에서, 보편성의 이념을 희구하는 인간적 사랑을 위하여
이로써 비로소, 본론의 초반부에 제시되었던 질문들은 답변되었다. 우선, 주관적-상대적인 생활세계에서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Apriori)는 확보될 수 있는가? 그렇다. 후설 현상학이 드러내는 초월론적 주관에는 근본적인 타자 지향성과 역사성이 존재하고, 그로부터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인류에 대한 상호주관성이 초월론적 주관에 내재한다. 그리고 이렇듯 인간 현존재 모두에 대하여 상호주관적인 초월론적 주관의 대상적 상관자로서 세계가 구성됨으로써, 세계는 그것이 존재한다면 언제나 그 자체로 ‘함께 살아가는 세계’, ‘모두를 위한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이로써 초월론적 주관의 차원에서도 필연적으로 모든 주관에게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를 지닌 생활세계가 구성되고, 이로부터 자연적 태도에서도 생활세계 존재론의 대상인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가 확보된다. 두 번째로, 생활세계가 객관적 학문의 이론적 타당성을 근거지울 수 있는가? 그렇다. 앞서 말한 상호주관적인 초월론적 주관의 대상적 상관자로서 필연적으로 보편적인 세계 구조가 확립되고, 이에 따라 자연적 태도에서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가 확고히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될 수 있다면, 이로부터 객관적 학문 역시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절대적 보편성에서 타당한”(Hua VI, 126) 진리의 이념을, 객관적 아프리오리를 추구해 갈 가능성을 얻으며 또한 그 이론적 타당성을 생활세계의 보편 구조로부터 검증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본고 주장의 의의와 한계를 짚어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먼저, 서론에서 밝힌 것처럼 이 글은 초기 저작 『사물과 공간』의 결어가 통일적 세계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불가피한 회의를 이야기하는 바와 달리, 후기 후설 현상학을 보여주는 『위기』에서 비로소 공시적이자 통시적인 세계의 보편 구조가 필연적인 것으로 정립될 수 있는 이유를 초월론적 주관에 근본적인 인류에 대한 상호주관성을 바탕으로 논의하였다. 이는 의의이자 동시에 한계점일 수 있는데, 바로 이 글이 후설 현상학이 필증적인 명증을 중시하는 ‘데카르트적 길’을 넘어 초월론적 주관의 보다 풍부한 내용을 열어 보여주는 ‘생활세계를 통한 길’을 다시금 제시한 이유 중 하나를 재구성한 것일 수 있지만, 동시에 후설의 전기와 후기 사유 간 모종의 사상적 단절을 보여주는 단초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후설 현상학에서 세계의 아프리오리, 즉 세계의 필연적인 통일적, 보편적 구조가 확보되는 혹은 확보되지 않는 다른 이론적 근거들과 그 시점이 보다 탐구되기를 요청한다.
더하여, 이 글이 생활세계의 필연적인 보편 구조를 밝히기 위해, 인류 전체, 인간 현존재 자체를 지향하는 초월론적 주관의 근본적인 상호주관성을 드러낸 것은 동시에 후설이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목적성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 목적으로 새로운 역사성과 인간성의 고양을 이야기한 것이 자칫하면 다만 공허한 낙관으로 여겨지도록 놓아두지 않고, 이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인류에 대한 초월론적 주관의 근본적인 상호주관성을 초월론적 주관의 타자 지향성, 역사성, 그리고 더하여 근원자아의 인칭 변경 가능성으로 해명하면서도 어째서 이 모든 주관의 성격들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미처 해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주요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타자 지향성과 역사성을 가지는, 다르게 말하면 최초부터 ‘초월의 가능성’을 지니는 존재인가? 물론, 근원을 향한 물음은 분명 한계에 다다르는 어느 시점에 멈춰야 한다. 다만 나는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한갓된 추측이나마, 바다에 돌을 던져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키는 마음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남겨두려 한다. 후기에, 후설은 “하나의 공동체적 인격성”으로서 인류의 규범성, “도달될 수 있는 것 중에서 최선의 것(das Beste)”(Hua XXVIII, 356)(박인철, 2001에서 재인용.)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이름한다. 물론 이때 후설이 말하는 사랑은 원초적 본능의 차원이 아니라 타인과 어떠한 당위의 실현을 ‘함께 추구’하는 ‘의지(Wille)로서의 사랑’이다. 하지만 동시에 후설은 이러한 숭고한 공동체적 결합 역시 본능적 지향성 수준의 사랑이라는 작은 씨앗으로부터 발원한다고 말한다. “나의 어머니와의 결합이 모든 결합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Hua XV, 511) 언제나 모두를 위한 이 세계에서, 육체를 가진 내가 태어나자마자, 그 최초의 순간부터 어머니-타자와의 마주침은 시작된다. 그리고 비록 수동적 차원에서일지라도 이러한 타자 지향, 다르게 말하자면 본능적인 사랑의 지향성은 태초에서부터 초월의 가능성을, 초월론적 주관의 발생을 예언한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 이 글은 인류에 대한 초월론적 주관의 근본적인 상호주관성과 그에 의해 확보되는 필연적인 세계의 보편 구조를 논했다. 만약 이 글의 논의가 정당하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뚫고 들어오는 하나의 명령과 의무를 의식할 수 있다. 그것은 이 글에서 세계의 필연적인 보편 구조를 논함으로써 결론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확립하고자 했던, 절대적 진리와 보편적 목적성의 이념이다. 이는 어쩌면 밤하늘 한쪽에 빛나는 별 하나에게 맡겨지는 우주의 운명처럼 가혹하고 막막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가면서 버티는 것조차 힘든 이 세계에서, 이 글의 목적처럼 도대체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보해서 무슨 의미가 있고, 또한 후설이 주창한, 인류 공동체로서 새로운 역사성과 인간성을 추구하는 짐을 우리가 어째서 짊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앞서 타자 지향성과 역사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한갓된 추측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명령의 다른 이름은 또한 우리의 존재 자체로부터 내적으로 발원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개념에는 물리적 고려가 없다.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위하여, 우리의 의지는 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향해서도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러한 한에서, 모든 학문들과, 보편적 진리에 가닿으려는 개별적인 우리의 이 모든 노력은 필연적인 세계의 보편 구조,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됨과 동시에 언제나, 적어도 인간 현존재에 대한 사랑의 발화로서 그 모든 어려움에도 행해지고 행해져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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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한한 것’이 이념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원리적으로 “객관적인 것은 결코 그 자체로 경험될 수 없다”(Hua VI, 131).
[2] 이 양상들의 구체적인 분류에 대해서는 이하영(20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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