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는 폭력
그를 정말이지 사멸하는 자들은 날개 달린
에로스(에로스 포테노스)라 부르지만,
불사자들은 프테로스(날개 달린 신)라 부르네.
날개를 기르는 필연으로 인해.
0.
그들은 한참을 비 오는 날의 살갗으로 달렸다. 두 소년의 손발은 늘 찼다. 한 소년이 언젠가 코끝에서 책장을 팔락거리며 숨을 들이쉴 때, 다른 소년의 희고 여윈 손가락이 책등을 넘어 들어와 가냘픈 그림자로 활자를 지웠다. 빈 교실 창가는 회청빛이었고 어딘가 먼 농토에서 불어오는 듯한 풀썩 마른 잿더미 냄새가 났다. 그리고 학교는 비가 오기 직전의, 온통 몸을 숨긴 뱀처럼 뼈대가 서서히 녹슬고 있는 듯한 비릿한 냄새… 방해받은 소년은 손을 밀쳐내며 한 페이지를 훑고는 작게 탄성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깃털의 싹은 열망과 함께 안에서 닫아걸려, 마치 맥박처럼 펄떡거리면서, 각각이 자신의 통로를 찔러 대는 나머지, 혼 전체가 온통 들쑤셔져서… 이세는 책상 너머로 몸을 기울여 재현의 눈을 가리고는 한 차례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열기로 그의 입을 막았다. 마침내 먹구름이 꿈틀거리며 불온한 신음을 내고는 이내 독과 열기로 가득 오른 소년들의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평소에 두 소년은 키 차이를 빼고는 예의 그 냉철함, 단정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타고나서, 그들 스스로도 얼핏 자신과 키스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재현의 손이 약간 망설이다가 헤집고 들어가는 이세의 머리칼은 여름철의 습기를 머금고 조금 끈적해져 있었으나 그 자신의 것은 여전히 퍼석했다. 책 이름이 뭐라고? …파이드로스. 두 소년은 서로에게서 풀려나 잠시 미끈대고 욱신거리는 입술로 그 이름을 함께 읊조렸다. 파이드로스… 이내 소년이 다른 소년을 미지근히 노려보고는 다시 그 기묘한 접촉을 시작했다. 입안은 메마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거웠지만 한편으로 체온은 차갑고 어딘가 서느럽고 장마철의 책상도, 몸도, 어깨에 부딪히는 창턱도 온통 축축했다. 빨리 늦은 수행평가 제출하고… 책 반납하고… 집에 가야 하는데… 혀를 섞으면서 둘의 안경이 부딪히자 이세는 약간 멍하고 흐릿한 표정으로 눈을 떴지만 무언가 무서운 일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벗기고 싶진 않았다. 교실은 언젠가 잃어버린 닳은 자물쇠처럼 안에서 잠긴 채, 배수구를 휘돌아 나가려고 공회전하던 비눗물처럼 푸르게 침잠하고 있다. 파이드로스, 자네에게 홀린 내 입을 통해 이야기된 자네 이야기… 연관을 알 수 없는 책의 구절만 머릿속에서 공연히 쿵쿵 울려 왔다. 그리고 비가 오면 매미가 울지 않는구나… 하는 쓸데없는 것들… 갑자기 책상 아래 한 켠에 놓인 시리도록 흰 실내화가 잊힌 눈물처럼 가슴을 파고들고서야 이세는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교정 뒤편의 숲을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까지도 질식할 것 같이 두려웠다. 창문의 모든 틈새에서 은빛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린다. 그때 재현의 얇지만 뼈가 툭 불거진 투박한 손이 이세의 허리 근처를 타고 올라와 날갯죽지 근처를 감쌌다. 차가웠다.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이세는 눈을 떴고 재현은 약간 얼굴을 찌푸린 채 그런 이세의 눈을, 혹은 그의 등 뒤편의 다른 어떤 것을 설핏 넘어다보았다. 잠깐만… 야, 너…
자네에게 홀린 내 입을 통해 이야기된 자네 이야기.
두 소년은 잠시 헐떡거리며 뜀박질을 멈췄다. 이제 어쩌려고? 이세는 고칠 수 없는 병에 든 것처럼 창백하고 푸른 무릎을 붙잡고 허리를 숙이며 예의 나른하고 열없는, 어둠에 잠긴 바다처럼 종점을 알 수 없는 눈길로 재현을 응시하였다. 선택해… 소년의 화법과 태도는 늘 그런 식이다. 종결되지 않고 주체도 대상도 없이 흩어지는 언어들… 그는 가위바위보 수를 먼저 내어주듯이 늘 부드럽게, 최후의 결정을 상대에게 미뤄두었고, 그렇게 사라졌다. 그날, 견딜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입술의 열기와 청회색 빗물로 흘러넘치던 교실에서 이세의 그림자가 교실 뒤편의 사물함을 만나 한번 꺾이며 길게 늘어졌다.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그칠 줄 모르는 비가 내리고, 마치 그 운율에 맞추기라도 하는 듯 푸른 물줄기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와서… 다시 알 수 없는 곳으로… 교실의 모든 곳을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세의 그림자 속에서 검고 길쭉한 무언가가 스스로 맥박처럼 펄떡거리면서 돋아나오고 있었다. 두 소년의 와이셔츠는 이제 반투명해질 정도로 흠뻑 젖었다. 소년은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작거리곤 약간 비릿하게 웃으며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셔츠 아래 그의 흰 육체는 마르고 설익었지만 한편으로 고등학교 남학생답게 아직 성숙을 예비하는 근육과 살이 때아닌, 푸르게 돋아오른 과실처럼 움찔거리면서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러한 육체를 자양분 삼아 꽃이 발아하려는 듯이… 혹은 새끼 새가 껍질 막을 찢고, 부수어 탄생하려는 듯이… 혹은 움직임을 잃어가는 애벌레의 몸에서 기생벌이 그 달콤한 과육을 질질 흘리며 기어 나오듯이… 소년의 곧은 등에서 아직 작고 윤기도 나지 않아 볼품없지만 언젠가 그가 뿌리를 내린 모태를 배반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날개가 제멋대로 꿈틀거리면서 비명을 지르듯 희게 퍼덕거리고 있었다. 이제 소년의 등과 허리를 타고 내려온 약간의 피도 청회색 빗물과 함께 똑, 똑 일정하게 떨어져 내려서 흘러갔다.
날개가 자라면서 혼은 끓어오르고, 통증을 느끼고, 간지럽지. 이리하여 한편으로 혼이 소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거기서 흘러드는 입자들을 –이 때문에 바로 이것은 열망이라 불리지- 혼이 받아들여 물을 공급받고 달아오를 때면, 혼은 아픔이 누그러들고 환희에 차는 것이지. 반면에 혼이 떨어져 있게 되고 말라붙을 때면, 깃털이 나오는 통로의 입구들도 같이 말라붙고 닫혀서 깃털의 싹을 닫아거는 한편, 깃털의 싹은 열망과 함께 안에서 닫아걸려, 마치 맥박처럼 펄떡거리면서, 각각이 자신의 통로를 찔러 대는 나머지, 혼 전체가 온통 들쑤셔져서 환장하고 아파하는가 하면, 새삼 아름다운 자를 기억하고는 환희에 차는 것이지. 양쪽 상태가 뒤섞인 까닭에 혼은 그 상태의 이상함에 괴로워하고, 어쩔 줄 몰라 미쳐 버리고, 광적인 상태에서 밤에는 잠들지 못하고 낮에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재현아. 소년이 흐윽, 하고 기분 좋은 신음인지 흐느끼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삼키며 끝없이 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 흥미가 깃든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다른 소년을 서늘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방금의 키스는 거꾸로 든 책처럼 잊어버리고, 신의 사자라도 되는 것처럼. 덥고 축축한 비가 흘러내리는 모든 사물들은 경외하듯 예언을 속살거리면서도 불길한 결말을 선고하는 아주 오래된 신탁의 노래처럼 두 소년을 힐난하며 빗소리와 함께 자꾸만 먼 곳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먹먹하게 울려간다.
이걸 좀 죽여줄 수 있어? 어쩌면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