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 명멸했던 사유는 발화하려는 순간 나의 몸을 꿰뚫어 산란하면서 갈가리 찢어버리는 말들로 바스라지고 한때 진리의 기관들을 꿈꾸던 이 '가차 없는 장소'에는 불구의 지체들이 썩어가는 더러운 피만이 울컥거린다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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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
에 관하여,
혹은 흄의 형이상학/인식론, 심리학 및 윤리학에 관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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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생애에 관해서
오늘은 제가 접해본 철학자 중 가장 달콤씁쓸한 이성주의자라 명명하고 싶은 흄(David Hume, 1711-1776)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흄은 1711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무려 12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해 법률을 공부합니다. 물론 이때 그는 지금도 수많은 어린양들을 철학과로 몰아가는, 이성이라는 작은 횃불을 들고 자신과 세계의 보이지 않는 중심부로 들어가려는 그 무시무시한 정열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철학과 보편 학문을 제외한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혐오감만 생길 뿐이었다. 그래서 가족이 내가 보에와 비니우스를 탐독하리라 생각하는 동안 남몰래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에 빠져 있었다.” 흄이 유년기를 회고하며 그의 자서전에 적은 구절입니다. 아무튼 돌이킬 수 없는 철학의 길을 접한 그는 프랑스에 처음 체류하던 시절, 지식, 정념, 도덕에 관해 다룬 주저 『인간 본성론』(1739-1740)을 집필하는데, 이때 그는 “내 문필의 향상 외에는 모든 것이 초라한, 간신히 부지하는 삶이었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러한 인고의 시절을 거쳐 26세에 완성한 역작은, 과연, (이 대목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반성해야 할 텐데) 놀랍게도 추상적이고 어렵다는 이유로 묻혀버립니다. 그 스스로도 “그 책은 인쇄되면서부터 사장되었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합니다만, 흄은 자타공인 명랑하고 쾌활한 기질의 소유자였기에 곧 자신감을 회복하고 논문을 집필하는 데 열중합니다. 비록 이후 그는 개인 교사, 장군 비서, 사서 등을 전전했지만 결국 보다 대중적인 형태로 『인간 본성론』의 내용을 간추리고 철학적 근거를 다듬어 불후의 역작 『인간 이해력[오성, understanding]에 관한 탐구(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748)(그리고 이후 『도덕 원리에 대한 탐구』와 『정념론』까지)을 발간합니다. 이 책이 바로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또한 그에게 역사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한 『영국사』(1754-1762)도 뒤이어 출판됩니다. (『자연종교에 대한 대화』는 불필요한 추문을 피하기 위해 꽁꽁 숨겨놓고 있다가 유작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에 흄은 정부 차관까지 되어, 1763년 다시 파리를 방문했을 때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와 같은 당대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하고, 또 루소의 영국 망명도 돕는데 도리어 이후 루소는 흄이 영국 정부를 위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 빠져 ‘흄은 가장 진실한 철학자이자 공정한 역사학자’라던 평가는 내버리고 광기 어린 비난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도 흄은 루소가 병들어서 그런 것이라 두둔했다고 합니다. 흄이 1776년 고향 에든버러에서 사망하기 직전 직접 쓴 사망 기사를 발췌하며 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나는 온순한 사람으로, 기분을 조절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솔직하고 사교적이며 쾌활한 유머도 구사하고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만큼 정감이 풍부하다. 다만 적대감을 견디기 힘들어하기는 하나, 모든 정념을 기막히게 조절할 줄 아는 온건한 성품을 갖추었다. 심지어 나를 지배하던 정념인 문학적인 명성을 향한 갈망조차, 실망하는 일이 잦았는데도 온화한 기질을 까다로운 성격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어쩌면 겸손하면서도 명랑한 기질, 하지만 지독히 명민한 지성이 어우러진 이러한 흄의 생애가, 그 저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명쾌하고 위트 있는 문체, 그 속의 파멸적인 결론을 향한 질주, 그러면서도 다시 유지되는 이성과 상식에 대한 특정 측면에서의 낙관을 그 자체로 비춰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흄의 철학적 방법론과, 특히 지식과 도덕에 관련한 주요 사상들을 살펴보면서 다시 이성적이자 역사적인 개인으로서 흄에 대한 평가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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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실험적 방법’이 지향하는 목적성
흄은 『인간 본성론』의 서론에서 모든 학문의 밑바탕을 이루는 ‘진정한 형이상학’으로서 인간과학(science of man), 혹은 ‘인간 본성에 관한 학문’을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수학, 자연철학, 자연종교는 어느 정도 인간과학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학문들은 인간들의 인지(cognizance) 아래 놓여 있고, 그들의 힘(power)과 능력들(faculties)에 의해 판단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인간과학 내지 (흄의 또 다른 명명으로는) 정신과학으로서 도덕철학은 우리 관념의 본성과, 지성을 규제하는 원리들과 그 작용(논리학),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사물이나 행위에 대하여 아름다움과 추함, 미덕과 악덕을 알려주는 원리(도덕과 비평), 그리고 인간이 서로 교류하고 의존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원리와 과정(정치학)을 탐구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정신 세계가 가장 근본적인, 그리고 합법적인 탐구의 영역이 되는 그의 이론으로부터, 틸리(2020)는 흄을 인본주의자(humanist)라 평가하기도 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라는 그의 철학적 기획이 생각보다 야심찼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정신과학의 시도는 부분적으로 당대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사상적 고취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고취’가 표면상 방법론적이지만, 결국 흄 철학의 핵심적 내용과 불가분하게 결합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흄은 명시적으로 『인간 본성론』 서론에서 자신의 인간과학이 가는 길이 최근의 자연과학적 업적과 유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제3부 끝머리)고 했던 뉴턴처럼, 그는 『도덕 원리에 대한 탐구』에서 현상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변적 가설을 배격하고, ‘실험적 방법(experimental method)’에 헌신할 것을 천명합니다. 물론, 흄이 말하는 ‘실험’은 우리가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흔히 생각하는 조작적 환경과 정밀한 측정과는 달리, 사실상 경험, 그리고 경험하는 인간 삶에 대한 신중한 관찰에 가까운 것입니다. 애초에 뉴턴은 『프린키피아』 초반부에서부터 역학의 수학화를 위해 운동 상태를 변화시키는 원인으로서 힘 개념을 도입하였음을 밝히지만, 이를테면 습관, 정념과 같은 인간 본성의 원리들과 그 상호 관계가 질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정량화될 수 있다거나, 순수 지성적 사고에 의해 추론되어 오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만약 수학적 정신과학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흄이 ‘실험적 방법’으로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인간 본성론』 다음 구절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분명히 외부 물체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본질도 알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신중하고 정확한 실험, 그리고 상이한 여건과 상황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별적 실험 결과들에 대한 관찰들을 제외한 다른 방식으로 정신의 능력과 성질에 관한 어떤 개념도 형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록 실험을 궁극에까지 추적하여 가장 단순한 극소수의 원인들로부터 모든 결과를 설명함으로써,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원리가 보편타당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분명히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인간본성의 가장 근원적인 성질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어떤 가설들이라도 주제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먼저 거부되어야 한다.”(THN, xvii)
물론 기본적으로, 흄은 ‘실험적 방법(experimental method)’을 통해 그의 경험주의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을 원천으로 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특징적인 것은, “우리의 원리가 보편타당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분명히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는 구절이 드러내는 실증주의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분명히 경험적 추론의 월권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 대상, 그리고 지식은 경험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즉,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현상에 제한됩니다. 이제, 연관하여 재미있는 점은 “외부 물체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본질도 알 수 없다는 그의 언명인데, 생각해 보면 이는 어느 정도 힘(power)으로서 힘(force)의 규정 가능한 실재성과 인과적 본질에 대한 뉴턴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흄은 『영국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뉴턴은 자연이 가진 일부 신비의 베일을 벗겨내면서도, 동시에 [보일, 데카르트, 홉스의] 기계론의 불완전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녀[자연]의 궁극적인 비밀에게 어둠(obscurity)을 돌려주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남아있을.” 이로부터 우리는 ‘흄의 뉴턴’이 어떠한 사상적 프레임으로 전환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제 견해에, 흄은 뉴턴으로부터 근대적 정신의 한 축이라 할 수도 있는 합법적 자유 권역의 사유를 봅니다. “뉴턴적 철학은 (…) 올바르게 이해된다면 (…) 모든 인간 능력을 넘어서는 주제들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는 겸손한 회의주의보다 그 철학에 어울리는 말은 없다.”(THN 1.2) 우리는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로서 우리에게 가능한 지식의 영역을 제한하면서, 자연의 일부에 대한 궁극적 진리에 다다를 가능성을 잃습니다. 흄과 ‘흄의 뉴턴’에게서 이 진리는 우리가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리 너머의, 궁극 원인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현상이라는 발 붙일 땅을,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가꾸어야 할 정원’을 얻습니다. 이 약속의 땅, 확신의 땅이 흄의 뉴턴에게서는 우리 경험의 대상적 상관자로서 자연이었고 그 개척의 시도가 자연철학이었다면, 흄에게서 근본적인 자유의 권역은 인간 정신이고 그 시도는 도덕철학입니다. 이는 신을 잃은 근대가 혼란에서 벗어나는 방식, 주관주의적 전회를 보다 완전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때 ‘흄의 뉴턴’의 힘(force)은, 흄에게서 ‘습관’은 감각적인 우리의 인식이 다다를 수 있는 최후의 원리이자 일반적 규칙성입니다. 그 기저에서 이 원리를 가능케 하는 비밀스러운 힘(power)과 같은 것은 전혀 현상으로 나타나 증명될 수 없고 따라서 그에 대한 관념이나 지식은 결코 인간에게 합법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결과들(effect) 뿐입니다. “탄성력, 중력, 부분들의 응집력, 충격에 의한 운동의 전달, 바로 이런 것들이 아마도 자연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 낼 수 있는 궁극적인 원인들이며 원리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밀한 탐구나 추론에 의해 특수 현상에서 이들 일반적인 원리들로 나갈 수 있다면, 또는 그 원리들에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껏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EHU 26) 물론, 그럼에도 흄은 개별적 관찰들로부터 보편적인 원리로 나아가는, 주어진 명제들로부터 보다 소수의 가능 조건을 찾는 피라미드적 분석(analysis)의 방법을 통해 실험과 관찰이 밝혀줄 수 있는 지식의 극한까지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흄의 정신은 ‘우리의 정원 가꾸기’이고 그런 점에서는 이 말을 한 볼테르만큼이나 이성적 탐구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월권을 제한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이성이 활약할 수 있는 합법적 권역을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흄은 ‘실험적 방법’이라는 이름 하에 뉴턴 철학의 의의를 경험주의와, 불가지론과 결합한 실증주의, 다르게 말하면 긍정적 의미에서 겸손한 회의주의로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흄이 자신의 철학을 정신의 힘들과 분명한 역할들을 묘사하는 정신 지리학(mental geography)으로 요약하고,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더라도 (행성계를 연구하는 것만큼은, 혹은 그 이상) 만족스럽다고 한 것은 아주 적확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경계지어진 합법적 권역의 정신은 현상의 가능성으로부터 인식 주관의 선험적 원리들을 연역해 내는 것을 제외하고 칸트에게서 그대로 계승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태는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한 구절을 변용하면 딱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미친 듯이 소유해 버린 것은 뉴턴이 아니라 나 자신의 창조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뉴턴, 어쩌면 뉴턴보다 더 생생한 뉴턴이었다.”
마지막으로 흄을 기리며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렇듯 뉴턴의 ‘실험적 방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흄은 또한 참된 관념은 자명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와 로크,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라는 버클리의 빛 아래에서 출발하지만, 어떠한 권위주의도 배격한 채 그저 경험주의와 논리적 일관성의 끈을 놓지 않고, 설령 그것이 직관을 배반하더라도 끝까지 나아가 그 결론부를 목도한 18세기 지성적 자유주의자의 한 아름다운 모범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측면에서는 상식 내지 건전한 판단력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다른 미덕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자신의 허약함을 방어하고 숨기기 위해, 실체가 없는 덤불들을 기르는 대중적 미신”(EHU 5)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에게 명백하게 주어지는 것들에 관해서만 분석하는 의도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게도, 소위 ‘흄의 회의주의적 해결책’, 인과적 필연성의 객관적 타당성에 관한 회의와 귀납 추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논증의 순환에 다다르고도 자연이 규칙적이고 제일적(uniformity)이라는 믿음으로 돌아가는, “부주의와 방심만이 우리를 구제”하고 삶을 살아가며 유용한 학문을 세울 수 있게 한다는 말에서 상당히 얼렁뚱땅 밝혀집니다. 물론 이는 꽤 미봉책처럼 느껴지고, 리드(Thomas Reid, 1710-1796)는 이 정도로는 아주 성에 안 찼던지 귀납 중심의 경험주의에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결합하여, 경험으로부터 촉발되어 얻게 된 지식일지라도 인류의 보편적 동의를 얻고 경험을 근거지을 수 있는 지식은 필연적 진리라고 할 수 있다는 상식의 원리를 주장합니다. 적어도, 이러한 리드의 철학은 경험주의의 끝을 본 흄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커다란 과제를 일러주는 것 같습니다. 지식의 기원에서 합리성의 지위 회복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 상식의 조화. 세상에, 어쩌면 근대 철학의 분수령은 흄과 칸트, 양대산맥이었던 게 아닐까요(칸트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차마 흄만이라고 말하진 못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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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논리학(형이상학/인식론) 1:
인과 관계의 객관적 실재성에 관한 회의와 귀납 추리의 정당성 확보 불가능성
이제부터는 말씀드린 경험주의와, 불가지론과 결합한 실증주의/긍정적 의미에서 겸손한 회의주의라는 동기를 염두에 두고 흄의 논리학(형이상학/인식론)과 심리학 및 윤리학을 개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흄은 우선 우리의 감관에 주어지거나 사고되면서 주관에게 등장하는 지각(perception)의 종류를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으로 구분합니다. 인상은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하고, 의지할 때” 갖는 보다 생생하고 강렬한 지각이고, 관념은 사고들(thoughts)로서 보다 희미하고, 덜 생생한 지각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념들 또는 좀 더 희미한 지각들은, 우리의 인상들 또는 좀 더 생생한 지각들의 모사들(copies)”입니다(EHU 제2장). 이러한 모사의 연결 고리는 기억력(칸트의 용어로는 ‘재생적 상상력’)과 상상력(‘생산적 상상력’)이죠. 그리고 관념은 다시 새로운 정념의 인상이나 다른 관념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첫사랑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감관에 새겨지는 인상은 우리의 사고를 즉각 그 사람에게로 옮겨 놓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거의 지금 앞에 있는 것처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쾌락이나 고통, 기쁨이나 슬픔의 인상도 함께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과 연관된 대상들과 같은 다른 관념들로 향해 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첫사랑 말고, 페가수스 같은 관념도 정말 인상과 닮아 있을까요? 흄은 로크를 계승하여, 우리가 사과의 색, 맛, 향을 구별하지만 그 각각을 다시 분리해낼 수는 없듯이, 단순 관념(simple idea)과 복합 관념(complex idea)이 있고 후자가 전자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때 단순 관념에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단순 인상이 선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상과 관념의 모든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명백해 보이는 일반적 진리가 드러납니다. 인상 없이는 어떠한 관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흄은 청각장애인이 소리의 개념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또 한편으로 모사 테제를 부정하고 싶다면 인상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관념의 예시를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물론 잘 알려져 있듯이 흄 자신이 매우 유사한 두 가지 색조를 보고 있으면 인상 없이도 중간색에 해당하는 어떤 색조의 관념이 떠오르는 것 같다는 반론을 제기했습니다(the missing shade of blue의 문제, 이석재 교수님께서 저에게는 이 문제가 없겠다고 놀리셨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할 것 없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넘겨버립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처리’의 중요한 시사점은 흄이 어떠한 딜레마에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모사 원리가 예외 없이 인간의 정신을 규제하는 법칙이었다면, 어떠한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의 ‘이행’에 상응하는 인상은 없는 만큼 이후 인과적 필연성 관념의 근거로 이야기될 습관적인 관념들 간의 전이조차 불가능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흄 역시 상상력의 산출적인 역량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러셀(2009)처럼 미묘하게 다른 여러 푸른색들의 관념처럼 재생적 상상력이 생산한 관념의 모호성(vagueness)에 주목하여 인상의 정확한 모사가 아닌 유사한 여러 관념들도 생길 수 있음을 드러내거나, 생산적 상상력의 창조성을 강조하게 되면 모사 테제는 붕괴하기 쉽게 되겠죠. 따라서 말하자면 흄은 모사 테제와 함께, 푸른 색조 띠 반례로 상상력의 역량을 축소 및 은폐함으로써 결국 다음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인상들로부터 우리의 모든 지식이 비롯한다.’ 사고의 모든 재료는 외감과 내감의 인상에서 나오고, 그러한 재료들을 결합하거나, 바꾸어 놓거나, 확대하거나 축소하면서 우리의 지식은 가능해집니다. 이로써 인상과 관념을 구분한 그의 진의가 드러났습니다. 인상은 감관으로부터 얻어지고, 청각장애인이 소리의 인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관념을 형성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듯이, 후험적입니다. 그런데,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기 때문에, 인상 없이는 관념도 없습니다. 즉, 본유관념(innate idea)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인상들로부터 우리의 모든 지식이 비롯한다는 말은 이렇게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런데 돌이켜 살펴볼 때, 우리의 모든 관념들은 경험된 적도 없는 무차별한 우연에 따라 결합되지 않고, 항상 어떤 경향성과 규칙성을 가지고 결합되는 것 같습니다.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부르는 방식, 흄은 다양한 관념 연합의 사례들로부터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관념 연합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하나의 그림은 그 묘사 대상을(유사성), 건물 안 하나의 방은 다른 방을(인접성), 상처의 관념은 고통의 관념을(원인과 결과) 떠올리도록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끕니다. 이러한 유사성(resemblance), 인접성(contiguity), 원인 또는 결과(cause of effect)의 원리가 바로 (적어도 흄이 보기에) 우리 사유의 연쇄를 관찰하고 정당하게 추론하면 나타나는 일반적 경향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바탕으로 우리 지식의 종류와 그들을 얻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흄은 우리의 인식 능력이 다루는 탐구 대상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관념들의 관계(relations of ideas)와 사실의 문제[사태, matter of facts]입니다. 전자는 당연히 우리의 관념들에 의존하지만, 후자는 현실적 존재를 고려하면서 관념들의 변화 없이도 변할 수 있는 관계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흄은 전자를 다루는 학문으로 대수학, 산수, 기하학을 들면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와 같은 명제들처럼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을 필연적으로 함축함이 드러날 수 있는 관념들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만이 우리에게 확실하고 명증한 지식을 줄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사실의 문제를 다룬다면, (흄이 보기에 경험에서 직접적 증거를 얻는 동일성과 시공간 관계를 제외하고는) 단지 개연적 지식만을 바랄 수 있는데, 사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적당한 논증조차 마련되지 않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흄은 크게 세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우선, 흄은 사태를 다룬 명제는 언제나 자체 모순적이지는 않음을 언급합니다. 이를테면 ‘이 빵은 나에게 영양분을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제는 지난날에 비추어 보아 그럴듯하지는 않지만, ‘이 빵은 나에게 영양분을 줄 것이다’라는 명제와 꼭 마찬가지로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그렇다면 사태 명제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모든 추론은 무엇에 근거를 둘 수 있을까요? 흄은 사실적 문제에 대한 모든 추론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에 따르면 인과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감각과 기억에 명백하게 주어진 것을 넘어 한 대상의 존재나 작용으로부터 다른 대상의 존재나 작용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대상이 원인이라는 것, 즉 한 대상이 어떠한 다른 대상과 그 존재나 현실적 작용이 반드시 뒤따르게 하는 필연적 연관성을 맺는다는 것은 (개체적 실체에 작용 원인의 지위를 부여한) 이전 형이상학들의 용어법이나, 상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다시 쓰일 수 있습니다. ‘한 대상이 다른 대상을 산출하는 힘(power)을 가진다.’ 하지만, 흄은 이러한 인과 관계가 결코 선험적으로 추론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아담이 완벽한 이성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물이 유동적이고 투명하다는 성질로부터 그 물이 그를 질식시킬 수 있음을 추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단지 어떠한 대상의 감각적 성질이나 관념의 주어짐으로부터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함축하는 혹은 다른 대상을 산출하는 내밀한 힘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험에서 그 힘을 관찰하거나 정당하게 추론, 혹은 추리라도 하여 인과 관계의 객관적 타당성에 대한 근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흄은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경험으로부터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주 유명한 대목에 접어듭니다. 우선, 경험에서 명백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전부는 대상들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이나 다른 대상을 산출하는 힘이 아니라, 단지 열이 불꽃을 일정하게 동반하고, 어떤 당구공의 충격에 다른 당구공의 운동이 따르는, 대상들 사이의 잦은 연접(conjunction)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경험에서 어떤 감각적 성질로부터 다른 대상을 산출하는 내밀한 힘을 정당하게 이성적으로 추론(reasoning)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관찰된 경험적 사실에 국한한다면, 이를테면 이전에 어떤 빵이 나에게 영양분을 주었다면 그 한 사례에서만큼은 그러한 감각적 성질을 지닌 물체가 영양분을 주는 그러한 내밀한 힘을 가졌다고 추론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과 관계의 실재성이 미리 전제되지 않는다면, 관찰되지 않은 경험적 사실, 즉 단지 그 빵과 외관상 유사한 다른 물체들도 또한 유사한 결과들을 낳을 거라고는 결코 이성적으로 추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대상에 지속적으로 내재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힘은 경험으로부터 추론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힘은 단지 개연적이라도 추리(inference)될 수 없는 것일까요? 흄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귀납 추리의 정당성에 관한 회의가 등장합니다. 이때 제시되는 견해는 관찰된 경험적 사실의 수를 늘려서, 과거의 모든 경우에서 어떤 감각적 성질들은 어떤 내밀한 힘들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봐 왔다면, 이로부터 유사한 감각적 성질들은 항상 유사한 내밀한 힘들과 결합되어 있을 것이라고 적어도 개연적으로 추리할 수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러한 귀납 추리의 정당성은 ‘미래는 과거와 닮았다’라는 개연적 원리, 즉 그 자신도 귀납 추리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야 하는 전제에 의존하고 있기에, 순환적이라는 이유로 배격됩니다.
그렇기에 사실 결론은 논리적으로 볼 때, 사실의 문제에서는 개연적 지식조차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흄은 직관을 뒤엎는 파멸적인 결론에 그치지 않고,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사항을 덧붙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과 관계를 계속 추리하게 되는 이유가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이해력과는 관계 없는 어떤 것, 마음의 습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습관의 원리는 유사한 대상들 간 연접이 계속되면 상상력에 의거하여, 그러나 상상력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허구보다 대상에 대한 보다 더 생생하고 강력하고 확고한 관념을 형성하는 어떤 느낌(feeling)으로서 믿음(belief)이 형성됨으로써 만들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흄이 의도하는 진정한 결과는, 마음속에서 관념들 사이의 습관적 전이가, 대상들 사이의 필연적 연관의 관념을 형성하는 유일한 인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대상들 사이의 필연성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실 대상들의 관념들 사이에서 얻어낸 필연적 관계의 관념을 대상들에게로 전이시킨 것이었습니다. 인과 관계는 객관적 타당성이 아니라, 주관적 타당성을 갖는 관계로서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흄은 객관적 필연성에서 심리적 필연성으로 전회하고, 동시에 이를 통하여 불가지론과 결합한 실증주의의 발로로서 이성이 확언할 수 있는 영역을 한계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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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논리학(형이상학/인식론) 2, 심리학:
물질적 및 정신적 실체, 혹은 외부 세계 및 자아의 신화성
그리고 예비 윤리학 1: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자아의 실재성을 가정하는 것은 왜 자연스러운가
이후 우리는 이러한 논리학의 파격적인 영향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물질적 실체, 혹은 외부 세계의 실재성과 정신적 실체, 혹은 영혼의 실재성 모두 회의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흄은 다음과 같이 물질적 실재론을 거부합니다. 맹목적인 자연의 본능은 우리가 갖는 감각들을 신뢰하도록, 이에 따라 이성을 사용하기도 전에 외부 물질 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이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우주는 모든 감각적이거나 지적인 피조물의 지각에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믿어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반성해 보아도, 우리는 정신에 떠오르는 것은 지각들뿐이고, 감각은 정신과 대상을 연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image)들의 운반자로만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모든 관념이 본래 감각 인상으로부터 생기는 것임을 고려하면, 결국 로크가 말하는 제1성질까지 물질에서 제거되어 제2성질 내지 감각적인 관념들에 종속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물질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지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단지 우리가 인상의 원인으로 삼게 되는 무언가(something)뿐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무언가만이 남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서 가정되었던 물질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인과적 필연성은 대상들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들 사이에서만 유효하다는 발견에 따라, 이는 우리의 지각과 대상 사이의 다리를 놓고 대상의 존재를 추론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합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은 인상과 관념에 제한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1]
물론 버클리 역시 정신 외부의 물질 세계에 대해서는 증명 불가능한 공상으로 취급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적어도 주관의 측면에서는 주-술 관계의 필연성을 재고해 보지 않고 정신적 실체를 가정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하일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 직접 지각되는 것은 관념이라네. 그런데 관념이 마음 밖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때 관념은 어떻게든 모종의 방식으로 마음 안에 있는 것일까요, 기체와 같이 얇은 정신적 실체 밖에 있는 것일까요? 흄은 자신의 실험적 방법을 밀고 나가면 결국 자아의 실체성까지 증명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경험으로부터 지식의 단초를 얻는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인 우리에게는 우주의 기원과 본질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형이상학 내지 이성적 우주론과 꼭 마찬가지로, 영혼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성적 심리학도 불가능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선 내가 가장 친밀하게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 속으로 들어갈 때, 항상 이러저러한 개별적인 지각들, 즉 뜨거움이나 차가움, 발긍미안 어두움, 사랑이나 미움, 아픔이나 기쁨과 마주친다. 나는 어느 때든 지각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을 결코 붙잡을 수 없으며, 지각들 이외의 어떤 것도 결코 관찰할 수 없다. (…) 그리고 다양한 지각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서로 잇따라 일어나고, 영속하는 흐름과 운동 속에 있다.”(THN 1.4.6)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란 “상이한 지각의 다발 혹은 모음”일 뿐이며, 우리는 다양한 지각들이 서로 구별, 분리 가능한 하나들이라는 단일성과 다수성은 목격하지만, 인과 관계를 추론하고자 할 때 대상들 사이의 지속적 연접만이 관찰되었던 것과 같이 그들 사이의 실재적 연결은 관찰되거나 정당하게 추론되지 않습니다. 러셀(2009)은 이러한 흄의 견해를 ‘정의를 정의된 항으로 대체함으로써 언제나 지각되지 않은 사물이나 사건들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경험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로 정리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심리적인 지식은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도입하지 않고서도 기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흄이 인격 동일성에 대해 말하면서 더 중요시한 것은 이러한 회의론 자체보다도 그 다음의 것,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지속적인 관념을 갖는가 하는 것입니다. 흄은 인격 동일성의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번에는 시간을 도입했을 때 지각들에서 단일성과 다수성의 융해를 관찰합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계기(succession)적입니다. 지각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갑니다. 이때 흄에 따르면, 우리는 연이어서 일어난 지각들의 경우 그 유사성과, 관념들에서 인과 관계를 추론하는 기억과 상상력의 습관적 경향에 의해 그 단일성과 다수성을 자연스럽게 묶어 버리면서(말하자면 우리의 시간 부분들을 매우 유사한 것들의 연쇄로 연결시키면서), 그의 언어로 “단일성과 수의 중간인 관념”(THN 1)으로서 단일하지도 않지만 다수적이지도 않은, 혹은 반대로 단일하면서도 다수적인, 오묘한 동일성의 관념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유사성과 인과 관계의 연쇄는 상상력에 의해 끝없이 양갈래로 뻗어나가 결국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일관적으로 동일한 형이상학적 자아의 관념으로 이어집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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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예비 윤리학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개인을 가정하는 것은 왜 자연스러운가
이러한 흄의 논의가 자아 동일성 논의에 가지는 실효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재미있는 점은 앞서도 시사하였듯이 흄의 논의가 정신적 실체에 대한 회의론에서, 그럼에도 그러한 불변하는 이론적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 왜 자연스러운지로 초점을 옮겨 왔고, 그렇다면 이제 다시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자아를 상정해야만 하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어떻게 가능한지, 즉 실천적 자아가 어떻게 일반적으로 인정될 만하며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에 관한 논의로 쉽고 ‘자연스럽게’ 옮겨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흄은 참 상식 있는 철학자입니다. 우선, 흄은 사실 인상에 대해서도 ‘근원적 인상’과 ‘반성적 인상’을 구분합니다. 근원적 인상은 감각 인상이라고도 하며 신체적 고통과 쾌락을 포함합니다. 한편 반성적 인상이란 내감의 것인데, 근원적 인상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거나 근원적 인상의 관념으로부터 생기기도 합니다. 이에 속하는 것이 바로 흄이 말하는 정념(passion)입니다. 다시 이 정념도 직접 정념과 간접 정념으로 구분됩니다. 직접 정념은 욕망, 혐오, 슬픔, 기쁨, 희망과 절망, 공포 등이며 간접 정념은 정념이 유래되는 원리에 다시 ‘원인’과 ‘대상’이라는 관념이 붙어 생성되는 정념으로, 대표적인 예로 흄은 자부심과 수치심, 사랑 등을 듭니다. 이를테면 자부심은 언제나 ‘좋은 차’와 같은 자부심의 원인을, 그리고 그 좋은 차가 ‘나의 좋은 차’라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그 대상, 바로 “자아, 혹은 우리가 기억하고 의식하는 서로 관련된 관념들 및 인상들의 계기”(THN 277)을 포함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흄은 (견해의 설득력에 상관없이) 관념들의 관계에 대한 습관적 추론뿐만 아니라 정념으로부터도, 개별적 자아가 끊임없이 재인(再認)되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나아가, 흄은 이렇듯 자아를 인식시키는 정념들의 중요한 계기로 타인들을 이야기합니다. 인간 공동체에서 주관들은 타인들의 정념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 그와 유사한 인상을 받는 공감(sympathy)의 현상(“아아 얼마나 슬플까! 나도 마음이 아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감을 통한 이러한 정념의 형성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재)인식하고, 동시에 유사성에 힘입어 함께 정념을 느끼는 타인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추론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의 원리는 국경과 시대를 넘어 ‘인간들’의 원리로서 공명합니다. 이렇듯 흄은 공감의 원리를 통하여 후대의 철학자들이 강조해 마지않을, 인간이 항상 ‘인간들 속의 인간’이 되는 순간, 형이상학적 자아가 다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개인으로서 행위하는 자아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을 이미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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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윤리학:
공감의 원리에 의거한 정념적 도덕론,
그리고 약화된 인과적 필연성으로부터 마련되는 자유의 자리
마지막으로 흄에게서 도덕, 그리고 자유와 필연성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마치겠습니다. 행위와 관련하여,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오로지 노예여야”(THN 2.3.3) 한다. 아마도 이는 흄의 도덕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것입니다. 어째서 흄은 정념의 윤리를 주장해야만 할까요? 상술하였다시피 흄에게서 인간 이성은 관념들의 관계와 사실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하는 인식 주관, 즉 Cohon(2018)의 언명에 따르면 “추론을 통해 관념의 추상적 관계를 발견하고(관념을 비교하고 일치 및 불일치를 발견하는 과정), 경험에서 드러난 객체의 인과적(및 다른 확률적) 관계를 발견”하는 기능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물론 후자의 정당성은 훼손된 상태지만, 흄 자신도 그러한 탐구의 실용성은 인정할 것이고, 도리어 철학의 그늘에만 빠져 있는 것을 더욱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전자의 단정적 추론과 후자의 개연적 추론은 모두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데 특정한 역할을 하지만, 그 스스로는 행위로 이끌 수 없다는 점에서 보조적입니다. 어떠한 관념도 동기의 관념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지 않고, 어떠한 원인이나 결과, 그 결합에서도 그 자체로 행위 동기가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제가 ‘못쓴 레포트는 나쁜 평가의 원인이다’라고 개연적 추론을 한 뒤에, 다시 흄에 따라 ‘못쓴 레포트의 관념은 나쁜 평가의 관념과 습관에 의해 연접된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못쓴 레포트의 관념도 자주 연접되어 있었기에, 갑자기 너무 고통스럽고 슬퍼졌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레포트를 좀 더 잘 쓰기 위해(잘 쓴 레포트는 좋은 평가와 자주 연접되었기에) 부랴부랴 철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철학 공부를 하게’ 된 데에는 물론 못쓴 레포트와 나쁜 평가에 관한 추론들, 더하여 저와 못쓴 레포트의 연접에 대한 관념이 기여했지만, 나쁜 평가와 연접되는 못쓴 레포트의 관념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러므로 못쓴 레포트의 관념에 혐오와 두려움을 (그리고 잘쓴 레포트의 관념에 욕망과 희망을) 느끼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탱자탱자 놀았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흄은 우리가 어떠한 출처에서 고통이나 쾌락을 느끼거나 예상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피하거나 받아들이도록 이끌리며”, 다시 말해 소원과 혐오, 소망과 두려움 등 동기가 되는 열정들을 느끼게 되며, 이에 “마음이나 몸의 어떤 행동으로 쾌락이나 고통의 부재가 얻어질 수 있을 때” 의지가 그 즉각적인 결과로 발휘된다고 주장합니다. 연관하여 흄은 우리가 비도덕적인 행위를 억제할 때 나타나는 반대의 ‘차분한’ 열정을 이성과 혼동하지 말라고도 당부합니다.
이 지점에서, 실천 영역의 이성이 정념의 노예라는 말이 이성의 도구주의를 의미하는지 회의주의를 의미하는지는 논쟁적입니다. 만약 전자라면 이성은 어떤 목표를 위하여 정념이 자신을 불태울 수단까지는 일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판단에 위배되는 행위는 ‘비합리적’이고, 이성은 다소 축소된 의미에서나마 실천이성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라면, 이성은 그의 판단으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무언가 요구할 권리는 전혀 얻지 못할 것입니다. “더 큰 선보다 작은 선을 더 열렬히 사랑하는 것도 이성에 반대되지 않는다”(THN 2.3.3)는 흄의 말은 이러한 관점을 시사하는 듯도 합니다. 어쨌거나 흄에게 분명한 것은, 마찬가지로 인간 공동체에서 행위를 규제하는 원리들, 즉 도덕적 선과 악도 단정적이거나 개연적인 추론을 통해 드러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관념도 미덕이나 악덕의 관념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지 않고, 어떠한 원인이나 결과, 그 결합에서도 이성적 분석에 의해 미덕이나 악덕이라는 성질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고 흄은 생각합니다. 도덕적 선악에 대한 어떠한 선이해 없이,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해친다’로부터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가 이성적으로 추론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이성에 의해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를 함축하는 선과 악이 발견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행위를 요구하기 충분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상적으로 이성은 혼자만으로는 행위 동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관찰했습니다. 또한, 발견할 수 없다면 임의로 규정하는 것, 말하자면 덕이나 선을 이성의 합리성 자체와 일치시키려는 시도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행위는 분명 칭찬받을 수도 있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이때 비난받을 만하다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모순적이거나 충분히 정당화되지 않았다는 것과 결코 동일한 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이성과의 일치로부터 그 공로를 얻지 않고, 그 반대에서 비난을 얻지 않는다.”(THN 458) 따라서 오히려, 흄은 행위가 감정으로부터 유도됨과 함께, 어떠한 행위가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도덕적 구별(moral distinction) 역시도 그러한 행위나 개인의 성격 특성을 숙고하는 관찰자들이 느끼는 승인과 불승인의 감정, 즉 칭찬이나 비난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으로부터 비롯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여러 행위에서 드러나는 동기, 그로부터 그의 속성들을 봅니다. 이때 우리는 용기, 용맹, 관용, 감사, 신중함, 인내, 성실, 재치, 총명함 등의 속성들은 장점으로 높이 평가하며 승인하게 되는데, 확실히 우리의 일상적 삶이 보여주는 사실적 경향이 그러한 것 같기는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나열된 다양한 속성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승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승인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이기에 도덕적 선과 악의 구별로 이어지는가? 우선, 흄은 우리가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는 저 상당히 다양한 성질들의 공통분모를 자신이나 타인들에게 쾌락을 주는 ‘유용성’이라고 진단합니다. “유용성은 공감을 통한 우리의 도덕적 감성의 원천이다.”(THN 577) 그런데 이 구절에서, 아직 설명되지 않아 마음에 걸리는 한 단어가 있죠. 바로 ‘공감’입니다. 이와 함께, 유용성 자체가 우리 자신이나 ‘타인들에게’ 쾌락을 주는 성질로 설명된 것에도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어떠한 특성들에 대한 승인이나 불승인이 도덕감이라고 할 때, 이는 왜 행위자(시혜자)의 속성이 단지 관찰자(수혜자)인 자신의 쾌락, 즉 자기이익을 불러일으킨다는 데에서만 비롯하지 않고, ‘공감을 통하여’ 형성되며 타인들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앞서 제시된 두 번째 문제, 승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기에 도덕적 선악의 구별을 가능케 하는지에 관한 문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흥미롭게도, 흄은 근본적으로 승인과 불승인이 사랑과 미움의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이나 쾌락 따위의 직접 인상이 있고, 이 인상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 등과 관련된 대상에서 발생한다고 가정하면, 그에 따른 정서와 함께 이 인상은 (…) 자부심이나 비굴함, 사랑이나 미움 따위의 새로운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성향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과 합일되거나 분리된다.”(THN 438-439) 사랑은, 아름다움과 매력 혹은 재능 등을 지닌 타인에 의해 싹트는데 이러한 성질들은 결국 우리를 즐겁게 만드는 특성들, 즉 유용한 특성들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사랑이란 감정은 그러한 사랑의 원인을 제공한 존재를 다시 대상으로 지향하고, 흄에 따르면 자주 자비심의 감정과 결부되며 우리로 하여금 그 대상의 복지를 원하는 욕구로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재치가 그 능력을 지닌 사람 자신도 즐겁게 하듯이, 사랑의 대상의 기쁨은 우리에게도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물론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즉 유용한 사랑의 대상의 특성을, 나아가 그 행위자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대상의 특성을, 그 대상을 승인[시인]합니다. 사랑이 곧 승인이라는 이러한 흄의 견해는 사랑과 존중의 색채를 흡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도 표현됩니다. “사랑과 존중의 근거에는 동일한 정념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유사한 원인에서 생겨난다.”(THN 608)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다시 자비심과 같이 사랑에서 비롯하여 타인을 향해 열리는, 그리고 그 대상에게 쾌락을 주는 우리의 특성도 ‘공감을 통하여’, 대상에게 유용함으로써 우리 자신까지 즐겁게 하는 그 느낌으로부터 승인하고 승인받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유용성에 대한 판단 범위가 비단 자기 자신에게 한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현상하는 사랑의 감정과, 공감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타인을 지향하고 타인의 감정을 우리의 것처럼 재현할 수 있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행복을 우리의 행복처럼 고려하고, 바랄 수 있게 하는 원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특성이 혹은 어떤 대상이 유용함을 판단할 때 그 특성이나 대상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감정을 체감함과 동시에, 그러한 특성이나 대상을 가진 행위자 자신, 나아가 그것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타인들의 감정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느끼고,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항상 함께 배태합니다. 그리고 흄은 이러한 확장의 가능성이 결국 우리를, 상호주관적 관점에서 유용성의 여부나 정도를 공평하게 헤아림으로써 일반적으로 유용성을 가진 특성에 대한 승인과 불승인, 즉 도덕적 선과 그 반대로서 악의 구별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랑 및 자부심을 낳는 능력과 덕이, 다른 한편이라는 비굴함과 미움을 낳는 능력과 악덕이 동등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THN 575) 따라서 이 지점에서 흄의 정념적 도덕론은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자아의 존재와 더불어 자기이익의 여부를 넘어선 선악의 판단을 위하여, 공감의 원리와 불가분하게 맺어집니다. 흄에게서, 사랑과 자부심 등의 감정이 말해 주듯이 우리가 관계적인 존재라는 것, 그리고 공감의 원리가 말해 주듯이 우리가 정념으로부터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인식하고 또한 타인의 행복을 바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승인과 불승인, 도덕은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동체적 자아의 존재와 상호주관적 행복의 고려와 더불어, 도덕성을 위한 마지막 가능 근거, 즉 자유가 흄에게서 어떻게 확보되는가를 언급하면서 그의 윤리학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누군가의 행위에 대한 승인과 불승인의 감정 아래에 또한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정합니다. 그는 외부로부터 어떠한 강제도 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행위할 수 있었다. 즉, 사랑과 공감의 원리에 입각해 어떤 특성이나 대상을 승인 또는 불승인할 때, 우리는 동시에 그 내적인 인격의 성품, 성향, 정념이 방해받지 않고 행위로 이어졌음을 또 하나 도덕의 가능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도덕을 위하여 다른 인간 주관에게, 그 자신의 의지에서 행위로 이어지는 ‘행위의 자유’가 존재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흄에게 이러한 행위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해질까요? 우선 흄은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즉 어떠한 가능성으로의 불균등한 끌림도 없이 무차별적인 평형 상태로서 우연성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필연주의자처럼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으로, 흄은 인과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는 의지의 명령과 관념의 산출, 혹은 신체의 움직임과의 필연적 연관을 지각할 수 있고, 이로부터 우리 의지의 내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심리적인 상태 속에서, 인과 관계는 지각된다’고 말함으로써 인과 관계의 실재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견해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예상하실 수 있겠지만 의지 작용의 경우에도, 관찰되는 것은 결국 의지의 명령과 관념 혹은 신체의 움직임 사이의 지속적인 연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응은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데, 대상들 사이의 일정한 연접과 동기와 행위 사이의 일정한 연접은 동일하게 인과 관계의 객관적 타당성이 아니라 습관에 의한 그 관념들 사이의 지속적인 연접과 그로부터 형성된 주관적 필연성의 관념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과적 필연성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이제 두 경우 모두에서 객관 세계의 법칙적 연결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 지성의 추리, 어떤 관념과 다른 관념 사이의 습관적 연접이라는 새로운 지대로 나아갔습니다. 평소 우리는 물리계에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성을 가정합니다. 하지만, 의지와 행위 사이에는 그러한 필연성 같은 것이 없다고 짐짓 생각하곤 합니다. 흄의 체계에서, 이러한 상식 속에 나타나는 물리계의 인과적 필연성의 강도는 약화되고, 반면 의지와 행위 사이의 심리적 연결의 강도는 ‘항상적 연접’이 ‘필연성’의 이름을 가짐으로써 강화됩니다. 이 결과는 흄이 인간 주관은 ‘인과’ 계열을 전개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러한 인과적 결정 자체가 단지 ‘주관적 타당성’만을 가진 것으로 약화됨으로써 오묘하게도 ‘약한 결정론’이 되는 흥미로운 양립가능론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행위에 대해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수 있게 하는, 행위의 자유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의지 결정이 ‘내적 근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함은 의지를 움직이는 것이 정념이라는 앞선 이야기로부터 충분히 추론됩니다. 실제로 흄은 ‘자발성(spontaneity)의 자유’가 바로 도덕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옹호합니다. 이러한 ‘자발성의 자유’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로서, 자신의 성정을 동기로 하여 행위할 수 있는 내적인 인과적 필연성,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자유라는 말을 가지고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의 결정에 따라서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힘뿐이다. 즉, 만일 우리가 머물러 있는 쪽을 선택하면 머물러 있을 수 있고, 만일 우리가 움직이는 쪽을 선택하면 또한 우리는 움직일 수 있다. 이런 가정적인 자유(hypothetical liberty)는 죄인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EHU 73) 결과적으로 흄의 주체는 외부의 강제 없이 내적 성향이나 욕구에 따라 행위한다는 의미에서 그 자신이 행위의 원천이고, 따라서 그가 달리 원했다면 달리 행동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도덕의 가능 조건으로서 행위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행을 위해 이 힘든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어쨌거나 제 행위의 자유의 발현이고, 저와 여러분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이겠죠! (분명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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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혹은
흄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에 관하여
이 글의 초반부에서 저는 ‘실험적 방법’이란 용어로부터, 뉴턴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흄의 사유를 경험주의, 그리고 불가지론과 결합한 실증주의 혹은 긍정적 의미에서 겸손한 회의주의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는, 이성의 능력을 한계지음으로써 동시에 그에게 합법적 자유를 발휘할 권역을 내주는 사유라는 점에서 이성적 탐구의 가치에 대한 여전한 믿음을 시사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한한 이성은 밤새 추락하는 별처럼 아름답고 반복적으로 파멸하는 보편성과 필연성의 궤적에 찰나 동안 입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그의 전 생애를 바칠 것입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정말 우리에게 허락되는 일일 수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흄의 사상 중 인과 관계의 객관적 실재성에 대한 회의와 주관주의적 전회, 물질적 및 정신적 실체의 신화성, 그럼에도 자연스러운 형이상학적/실천적 자아의 가정과 이로부터 출발하는 정념적 윤리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천의 가능성을 위한 자유와 필연성의 조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의 입지는 상당히 줄어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외부 세계의 존재나 사물들의 규정에 대하여 합법적으로 자신을 주장할 수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주관의 세계에서도, 그는 이성적 존재의 권리에 입각한 자기의식과 ‘실천이성’의 지위를 사실상 박탈당했습니다. 결국 그에게 남은 자리는 주관의 경험에 대한 현상적 기술과 분석의 영역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술어와 주어와의 연결이 동일성에 의해 생각되는’ 칸트적 의미에서 개념 분석이나 논증의 타당성을 책임지는 역할을 제외하고서는 이 영역에서조차도 보편성과 필연성을 희구하는 이성은 위태로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조차도 사실의 문제에 대한 탐구가 가지고 있는 난관에 봉착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가령 이런 것입니다. 정말 객관적 필연성 아닌 ‘심리적 필연성’은 공언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만약 심리적 필연성으로 향하는 추론의 정당성이 위태롭다면, 인과에 대한 혹은 사실의 문제에 대한 보편성과 필연성의 관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근거할 수 있는 것일까요? 러셀(2009)은 대상들 간 빈번한 연접관계의 경험으로부터 관념들의 연합이 습관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조차, 흄의 학설을 일관적으로 고수한다면 확실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것이 확실한 지식이라면, 어쩌면 흄의 이론은 “A가 B의 원인이다”를 “A의 인상은 B의 관념의 원인이다”로 다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제 견해에 더 중요한 문제는, 흄이 앞서의 논의에 대항하여 심리적 필연성을 단지 비교적인 보편성과 필연성으로 약화시킨다 해도, 그렇다면 이러한 상상력에 의한 단순히 습관적인 연상 작용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대상의 내적인 힘, ‘원인과 결과’의 경험으로 변환되는 사태에 대해서도 경험주의에 기초하여서는, 이성이 확언할 수 있는 이유가 소실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인과적 필연성이 주관적으로는 타당한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거 없는 환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연성과 필연성 간의 괴리, 따라서 전자로부터 후자의 개념으로 도약하는 일의 어려움은 흄이 자아 동일성의 관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유사성과 동일성 간의 괴리로 잘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비약’의 위험성을 감지한 칸트가 “원인이라는 개념이 그 개념상 어떤 결과와의 연결의 필연성과 그 규칙의 엄밀한 보편성을 너무나 분명하게 포함하고 있어서, 만약 사람들이 원인 개념을, 흄이 했던 것처럼, 발생하는 것이 선행하는 것에 빈번하게 수반한다는 사실과 또 이로부터 생기는 표상들을 연결하는 습관으로부터 도출하려고 한다면, 저 원인 개념은 전적으로 일실되고 말 것이다.”(KrV, B5)라고 쓴 것일 터입니다. 즉, 흄의 학설을 있는 힘껏 밀고 나가면 우리의 이성은 관념들의 일치와 불일치에 대한 판단을 제외하고는, 객관의 영역에서든 주관의 영역에서든 평등하게 어떠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도, 그리고 보편성과 필연성이라는 개념이 형성될 수 있는 타당한 근거조차도 밝혀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이 지점에서 결국 우리는 이성을 한계지음으로써 그의 권역을 보장하는 사유가 점차 그 권역을 숨쉴 수 없을 만큼 옥죄어 오면서 사실상 단일한 불가지론 그 자체로 붕괴하는 것을 봅니다. 보편성과 필연성, 그리고 모든 근거지음을 가능케 하는 자발성과 실재성의 이념 그 자체로서 이성은 그저 상상력의 환상일 뿐일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 환상은 또한 도대체 어떤 이유로부터 비롯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인간으로서 우리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우리는 지반을 발견할 수 없는 곳에, 그러나 동시에 분명 어떤 곳에 존립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실제로 흄도 인간 본성론 1권에서 이미 이 무력함의 순간을 예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저 사소해 보이고 유례없는(singular) 상상력의 속성을 통해서만 이런 전면적인 회의주의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구제한다. (…) 만약 우리가 이 원리[정제되고 세련된 추론은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를 수용하고 모든 정제된 추론을 규탄한다면, 우리는 가장 분명한 불합리를 마주한다. 만약 우리가 이 추론들을 위해 그 원리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인간 지성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거짓 이성과 아무런 이성도 없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THN 1.4.7)[3]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간과했지만, 다시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흄의 작업에서 드러난 이성의 제한이 항상 동시에, 이성의 ‘자기 제한’이었다는 것입니다. 흄 자신도 이를 “논증이나 추론 작업을 통해 이성을 파괴하려는 회의론자들의 시도”(EHU 제2부 124)라는 구절에서 표현합니다. 사실의 문제에 개입하는 보편성과 필연성의 확신은 보편성과 필연성의 이념 그 자체인 이성으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다고 믿어졌지만, 이러한 믿음(들)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 어떠한 논증이나 추론, 혹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떠한 추론(reasoning)을 추리(inference)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또 다른 추론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을 잃은 인간이 그 자신들에게서 권위를 찾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비합리적 심정에 이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경향도 공동체에 법칙과 같은 준칙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이성으로부터 추대되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성만이, 자기 자신에 손댈 수 있는 권리,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성의 영역을 무너뜨리는 흄의 회의주의는 어쩌면 인간 주관의 가장 이성다운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이로부터 오히려 역설적으로도 이성은, 혹은 우리는 아직 보편성과 필연성, 그리고 자발성의 표상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사변이성과 어쩌면 실천이성의 가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자신과 세계에 대한 빛으로서의 이성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도, 이 작은 자발성의 불씨로부터 다시 나아갈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다. 흄 이후에 이러한 시도는 특히 지식의 기원에 대한 온전한 경험주의를 배격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제 견해에 흄의 불가지론과 결합한 회의주의, 긍정적이지만 사실상 부정적이기만 할 수도 있었던 회의주의는 이성 권위의 황폐화를 넘어, 오히려 그를 통해 정말 가치 있는 무한 판단의 영토로 진입할 수 있는 마중물이기도 합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하는 이성의 책무’, 제가 첫머리에 그를 달콤씁쓸한 이성주의자라 부르고자 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몰락의 순간에 태동하는 에티카’를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밖에 자신을 파멸시킬 수 없었던, 그러므로 또한 그로부터 그를 되살릴 수밖에 없는 이성의 이름을 다시 부릅니다. 그 작은 횃불이 어쩌면 우주를 아우르는 믿을 수 없는 빛으로 다시 타오를 때까지, 우리는 나아갈 것입니다. 독단을 잃어버린 자리에 남아있는 하나의 불씨, 그것이 바로 진정한 희망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지혜를 갈망하는 우리가 여전히 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 물론 여기에서 흄은 인상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주관 외의 어떤 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상 없는 관념은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라는 말이 가치 있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통해 ‘주어짐’으로써 직접적으로 입증되는 것이 지식의 근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인상은 비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그렇기에 독단적일 수 없는 적나라한 사태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리고 칸트에게서도 감성은 다만 수용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의 해결책도 마찬가지로 경험적 직관의 대상 저편으로 물자체를 치워버리고, 인과 범주의 적용을 불가능하게 하면서 촉발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처리하며, 우리 지식의 대상을 현상으로 제한합니다. 흄의 이론은 이러한 물자체의 가정과 얼마나 다를까요?
[2] 물론 아시다시피 칸트는 이러한 서로 다른 표상이 묶일 수 있는 것으로서 ‘함께 놓인다’는 것만으로 그 표상들의 결합자인 동시에 그 결합의 가능 조건으로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초월적(그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통각이 연역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3] 이 번역은 감사하게도 ( )께서 보내주신 자료에서 일부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이 대목을 읽으실 때 저는 여러분이 각자의 감상대로 다음 시의 의미도 함께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모르는 사이 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떨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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