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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는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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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의 여는 글 우연의 궤적 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동방엔 퀴퀴한 책더미와 라이터와 어둑한 창가가 쌓였고물론 텅 빈 술병과 말뿐인 플롯도 함께였다어쩌면 낮과 밤을 쓰고 웃고 산책하는 데 바치는 꿈이었지사랑할 때는, 아끼지 않고… 그건 어른들의 지혜 사시사철 책장은 별과 불길에 젖어허술한 피그말리온들은 병과 열을 달고 살았다 투명한 욕망이라 쓰여야 하는 말들을 부르면매주 교정엔 흐린 환희처럼 글이 숨은 방, 불이 켜졌다우리는 취기와 질투와 펜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며입술은 어느 때보다 불온과 슬픔을 야기하고어린 축제가 바다에 잠기는 꿈을 꾸어도 두렵지 않았다 한번쯤 죽어도 좋아, 새벽잠에 들 때마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언어는 나의 궤도와 창문을 벗어나 타오르고설익은 광기가 삶의 비밀을 공전하여도우리는 모든 ..
서늘한 여름 사랑이 있는 폭력 그를 정말이지 사멸하는 자들은 날개 달린에로스(에로스 포테노스)라 부르지만,불사자들은 프테로스(날개 달린 신)라 부르네.날개를 기르는 필연으로 인해. 0.그들은 한참을 비 오는 날의 살갗으로 달렸다. 두 소년의 손발은 늘 찼다. 한 소년이 언젠가 코끝에서 책장을 팔락거리며 숨을 들이쉴 때, 다른 소년의 희고 여윈 손가락이 책등을 넘어 들어와 가냘픈 그림자로 활자를 지웠다. 빈 교실 창가는 회청빛이었고 어딘가 먼 농토에서 불어오는 듯한 풀썩 마른 잿더미 냄새가 났다. 그리고 학교는 비가 오기 직전의, 온통 몸을 숨긴 뱀처럼 뼈대가 서서히 녹슬고 있는 듯한 비릿한 냄새… 방해받은 소년은 손을 밀쳐내며 한 페이지를 훑고는 작게 탄성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깃털의 싹은 열망과 함께 안에서..
모티브 임시 저장 실낙원 -퇴락한 유원지의 잔해 위에 안개처럼 세워진 그 마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술래처럼 잊혔다. 풍랑이 거센 동쪽 바다 어딘가를 더듬거리는 그 섬의 영혼들은 해무海霧의 휘발성을 타고나, 이른 나이에 육체를 버리고 비가 내릴 때 어머니 바다 품으로 돌아간다고들 했다. 그리고 달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바다가 밤에 뜨는 눈... 그러므로 그들은, 여름 장마철 가장 작고 가냘피 휘어진 채 웃는 손톱달이 뜨는 밤에 영혼을 땅에 길들였다. 약동하는 피와 사라지는 이름 속에서, 신이여 사랑받으소서... 한데 그러한 밤이면 어김없이 바다의 날카로운 큰 바위나 뭍으로 올라온 듀공들이 목이 부러진 천사 혹은 아름다운 세이렌처럼 괴이한 비명을 질러댔는데, 이 의례가 시작되면 검은 수도복을 뒤집어 쓴 순례자들은 불이 타..
일기 1 -선생님. 우리는 먼 늦여름의 행위를 기억한다. 동생의 진도는 한참 더뎠고, 사실 나는 그 꽃뱀花蛇을 벌써 한 번 익힌 적 있다. 높고 반투명한 창가에 저물녘이 어른거릴 때, 노랗고 따뜻한 나의 침실과 하얀 간이 탁자 곁에서. 눈을 감자 건너편의 선생님은 잠잠히 발화하였다.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당신의 음성은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미약하고도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리고 나는 오싹한 열병에 걸렸다. 모든 일이 뉘앙스로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그날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사위가 고요하였다. 께느른한 주황빛 파동만이 먼지와 함께 우리의 거처를 기어 다녔다. 지독한 예감. 떨면서 실눈을 뜨자 그는 팔짱을 낀 채 흐릿하게 힐난하였다. 그것은 맨발로 유리를 밟지 말라는 따위의 무력한 경고였다. 이내 ..
시더우드의 영화 어떤 반향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반향은 돌아오지 않는다.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이 문장만 되뇌었다. 계속, 계속 몸부림쳤는데도.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혀를 내밀면 울어버리는 문장'이란 구절을 썼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면서도 생전 알지도 못한 고통이 찾아와 발목이 꺾인 새처럼 주저앉았다. 목놓아 우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한번만, 한번만 다시 와 달라고, 잠들지 못하고 수십 번 국화로 둘러싸인 그 평온한 보랏빛 얼굴을 떠올렸다. 늘 발치에서 머무르는 슬픔. 이 비틀거리는 걸음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야 할까. 그 상냥하고 쓸쓸한 선배는 도대체 어디로 갔나. 여전히 무너지는 것과 잃어버리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또다시 은유의 덫으로 도망쳐야 저렇게 겨우 입이..
낭만적 서시 나는 유원지의 노을을 닮은 헤픈 얼굴 창틀 거미줄에서 허덕이는 어린 나비를 불태우고 목젖에는 피아노 불협화음이 걸려 있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나무 의자에 앉아 금욕적인 신부를 유혹할 계획을 세우는 부랑아 오빠, 흰 벽에 걸어 둔 안개꽃이 다 말랐지만 약속은 너무 많고 부르튼 입술이니까 조용히⋯ (성년식은 꿈의 목이 부러지는 밤의 해변에서.) 모든 찻잔이 천천히 중심을 잃고 있다 당신은 축제를 훔쳐보는 비 내린 숲이었는데, 더블 초콜릿칩 쿠키처럼 실종되기 쉬우니까 조심해, 새들은 침울한 풍향계를 흔들고 날아가지 우리의 밀월은 캐노피 속 열대를 들춰낼 테니 백열등 밑에서 맞담배를 피우고 게임을 하자 안개 낀 색소폰이 다정한 반음계로 떨어지면 숨을 참아, 날 사랑할 준비를 하는 게 좋아
실루엣들 상담사가 내담자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였다  아침 샤워 후에는 꿀과 백합 향이 났다창턱에 앉아 허밍하면 겨울의 그네가 흔들렸다미열이 고인 아이, 희미한 낮달이 뜬 발치, 장소가 없는 현기증말라가는 선인장 곁에서 아름다움의 폐허를 불렀다, 이윽고 숨죽인 들판 위 여명과 황혼의 세례를 받는 두 이마당신은 나에게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잔향, 흐느낌, 침실이었다바람의 밀어로 우리의 벤치는 젖어 있고 유기된 손으로서로의 정맥을 나누며 역류하는 온도를 견뎠다. 버거운 열병의 징후가 당신의 면죄부이자 키스였다. 흐르는 수레국화, 바람의 샛길을 낸 느티나무초조(初潮)처럼 피를 흘리는 어린 새들, 푸른 여름밤을 달아나는 탈진한 이리들그리고 석양 아래의 눈, 코, 입, 모든 거울과 꿈을 낭비하기 위하여우리는 미..
자서 -파도가 발끝에서 물크러졌다당신의 발목은 붉어 곧 도망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