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감’으로서 반성, 통각, 그리고 이성성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통각(apperception)과 반성(reflection)의 의미를 중심으로
0. 서론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통각(apperception)은 자기반성(self-reflection), 그에 따라 이성성(rationality)과 밀접하게 결부된다. 그런데 동시에, 라이프니츠는 통각을 의식(consciousness), 그리고 단순한 반성(reflection)과도 관련짓는다. 이에 더하여, 그는 감각(sensation)적인 모나드로서 동물도 통각을 가진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이에 라이프니츠에게서 통각, 반성, 자기반성 개념, 그리고 종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의 측면에서 인간, 동물은 서로가 서로를 복잡하게 지시하며 실타래처럼 뒤엉켜 버리고 말았다. 이 글에서는 통각과 반성의 의미 해명을 중심으로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서술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읽힐 수 있는지, 또한 간략하게나마 그러한 해석이 라이프니츠 체계에서 이성성이 무엇인지에 관해, 또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는지 모색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풀어나가기 위한 첫 실마리로, 라이프니츠는 『자연과 은총의 이성적 원리』[PNG] 4절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지각(perception), 즉 외부의 것들을 표상(representing)하는 내적 상태와, 모든 영혼(soul)에게 주어지지도, 또한 그 영혼에게조차도 항상 주어지지는 않는, 통각(apperception), 즉 의식(consciousness), 혹은 이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이해, 인지와 같은 약한 의미에서 knowledge]을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것은 다만 특정 유의 영혼에게만 주어지는 고유한 지각 형태, 즉 내적 상태에 대한 지식으로서 통각 내지 의식이 있고, 이는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다른 구절에서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 혹은 나에 대한 감각(sense)은 도덕적 혹은 인격적(personal) 정체성을 증명한다.”(“New Essays”[NE] 236, 강조는 필자.) 더불어, 이와 같은 서술도 주목해 보자. “필연적 진리를 아는(know) 생명체들은 적절하게(properly) 이성적 동물(rational animals)이라 불리고, 그 영혼들은 정신(minds)이라 불린다. 이러한 영혼들은 반성적 행위를 할 수 있고, “나”, 실체, 영혼, 정신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서- 짧게 말해, 비물질적 사물과 진리에 대해 사고할(consider) 수 있다.”(PNG 5절, 강조는 필자.)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절은 다음과 같다. “동물의 영혼들도 정신보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전 우주를 표현한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 그들은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반성의 결핍이 그들이 전혀 도덕적인 성질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이다.”(DM 34절,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우선, ‘통각, 즉 의식’이라는 PNG 4절에 따라 통각과 의식이 동일한 것을 지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의식 혹은 나에 대한 감각은 도덕적 혹은 인격적 정체성을 증명한다’는 NE p.236에 따라 의식이 도덕적 정체성을 증명한다고 할 때, ‘자기반성의 결핍이 그들이 전혀 도덕적인 성질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라는 DM 34절은 자기반성의 결핍이 이성성과 도덕성 결여의 원인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통각한다는 것은 자기반성함과 같거나, 자기반성을 포함하거나, 수반해야 한다. 이때, ‘필연적 진리를 아는 생명체들은 이성적 동물’이며 ‘이러한 영혼들은 반성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PNG 5절과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DM 34절에 따라, 영혼이 ‘이성성을 가짐’과 ‘필연적 진리를 알 수 있음’, 그리고 ‘자신을 반성할 수 있음’은 동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통각함이 자기반성과 결부될 때, 그러한 영혼은 필연적 진리를 알 수 있으며, 이성성을 가진다.
이에 따르면 동물들은 자기반성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필연적인 진리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이성성과 도덕성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동물은 전혀 통각할 수도 없는가? 통각과 자기반성 사이에는 불분명한 괴리가 있다. 실제로 라이프니츠가 동물의 통각을 인정하는 구절도 명백하게 등장한다. 우선, 라이프니츠는 PNG 4절에서 또한 감각(sensation)을 가진 생명체로서 동물에 대해 말한다. 어떠한 모나드가 수용된 인상들 사이에 대조(contrast)와 구별(distinction)이 있도록,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를 표상하는(재현하는, represent) 지각들 사이에서도 대조와 구별이 있도록 조율된(adjusted)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모나드의 지각은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인 감각(sensation)에까지 이를 수 있고, 이러한 생명체가 곧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명시적으로, “New essays”에서 짐승들이 이해력(understanding)은 없으면서도 통각(apperceiving)의 능력(faculty)을 가진다고 이야기하고(173), 또한 감각(sensation)이 통각을 포함한다고도 서술한다(161, 강조는 필자).
정리하면 문제는 이렇다. 동물은 통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PNG 4절에 따라, 통각 내지 의식이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일 때, 동물은 이러한 의미에서 통각하는가,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 통각하는가? 만약 PNG 4절의 의미에서 통각한다면, 동물은 반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통각한다. 그렇다면, 동물은 자기반성할 수도 있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DM 34절 등에서 라이프니츠가 비교적 일관적으로 ‘자기반성’은 인간의 영혼에게만 귀속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동물에게는 최대 자기반성 아닌 반성적 행위까지만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Kulstad(1981)은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통각과 반성, 자기반성이 귀속되는 영혼의 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나뉠 수 있다고 정리한다.
(1) 동물들은 통각하지 않는다. 정신들만이 통각한다.
(2) 동물들이 통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 통각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반성을 포함하지 않으며, PNG 4절에서 나온 것과는 다르다.
(3) 동물은 통각하고, 반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통각한다. 하지만, 자기반성할 수는 없다. PNG 4절에서의 통각은 동물의 통각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반성은 자기반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 동물은 통각하고 반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통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의미로든 반성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는 비일관적이다.
이 글은 (3)의 입장을 취해 라이프니츠 서술의 일관성을 보장하면서, 구체적으로 반성의 의미를 두 갈래로 나누어 기억으로서의 반성은 동물과 인간에, 그리고 정신 작용 자체에 대한 반성 및 자기반성 능력은 인간에게만 배타적으로 귀속시킴으로써 동물이 반성적 통각을 가지면서도, 인간만이 자기반성 가능한 통각의 의미를 지니면서 이성성을 가질 수 있음을 보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 각각 (1), (2), (4)의 입장을 취하는 McRae(1976), Jorgensen(2011), Kulstad(1981)의 논의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각 주장들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이 글의 주장을 전개할 것이다.
1. 통각과 반성, 그리고 인간과 동물에 귀속되는 통각에 관한 다른 학자들의 이론
1.1. 동물의 이성성, 그러므로 통각을 인정하지 않는 McRae(1976)의 견해
McRae(1976)는 대표적으로 (1)의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단정적으로 “라이프니츠는 동물에게 의식(consciousness)을 부여할(grant) 수 없다. 의식이 이성과 인격을 불러일으킨다(give rise to)는 것은 그의 심리철학의 본질적인 특성(feature)이기 때문이다.”(33)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거의 필연적으로 라이프니츠의 비일관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New Essays”에서 라이프니츠가 명시적으로 동물에게 통각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에 McRae(1976)는 라이프니츠가 “통각은 감각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에 직면해 있다”(30)고 언명한다. 이때 그는 동물들은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각’이 무엇을 의미하든 의식이 이성성으로의 고양과 연관된 한에서, 통각할 수 없으며, 동물에게 통각을 부여하는 듯한 라이프니츠의 다른 서술은 비일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동물에게 통각을 인정하는 구절은 대부분 “New Essays”에 한정되어 있고, 심지어 그 안에서도 라이프니츠는 “의식 혹은 나에 대한 감각은 도덕적 혹은 인격적(personal) 정체성을 증명한다”(236)고 말하며 자기의식과 결부된 인간의 통각 내지 의식이 동물로부터 구별되는 속성임을 밝힌다. 따라서,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동물의 통각을 인정하는 구절의 중요성을 약화시켜 읽음으로써, 동물에게 통각을 전혀 부여하지 않고자 하는 McRae(1976) 내지 (1)의 입장을 견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은 라이프니츠의 최대한 많은 서술들을 정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보다 미덕 있는 철학적 행위라고 생각하고, 어떠한 텍스트를 도외시하는 선택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려고 한다.
1.2. 동물의 반성, 그러므로 통각을 인정하지 않는 Kulstad(1981)의 견해
한편, Kulstad(1981) 역시 라이프니츠의 비일관성을 인정하는 (4)의 입장을 취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물이 통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McRae(1976)와 굉장히 유사하다, 하지만, 그가 McRae(1976)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McRae(1976)는 통각 내지 의식이 반성/자기반성을 포함하든 그렇지 않든, 의식이 이성성으로의 통로인 한, 동물은 통각을 가질 수 없으면서도 통각을 가진다는 서술이 혼재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Kulstad(1981)은 라이프니츠가 반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통각을 정의하고 있는 한, 동물은 자기반성이든 어떠한 다른 종류의 반성이든 가능하지 않으면서도 통각을 가진다는 서술이 혼재해 있으므로 모순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McRae(1976)는 라이프니츠 서술이 비일관적이게 되는 핵심을 동물의 ‘이성성과 결부된 통각’ 가능성에서, Kulstad(1981)는 ‘반성과 결부된 통각’ 가능성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McRae(1976)의 주장은 통각과 이성성의 결합을 전제할 때, 동물은 통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성과 결합되지 않으면서 동물에게만 적용되는 통각의 의미를 찾는다면 (2)의 방식을 허용할 수 있으며, 통각이 반성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자기반성 아닌 단순한 반성이 이성성과 결부되지 않는다면, (3)까지 허용할 수 있다. 하지만, Kulstad(1981)의 주장은 통각이 반성적 행위임을 전제할 때, 동물은 통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반성적 행위가 아닌 통각의 의미를 찾는다면 (2)까지는 주장 가능하지만, 그의 주장은 동물은 반성적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순이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3)은 배제하고 있다.
그의 논증을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i) 오직 정신들(spirits)만이 이성추리할 수 있다(capable of reasoning).
(ii) 만약 영혼(soul) S가 통각한다면, 영혼 S는 이성추리할 수 있다.
(iii) (PNG 4절의 의미에서) 통각하는 존재는 반성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그 존재가 자기반성한다(perform)는 것이 곧바로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iv) 반성하는 존재는 자기반성할 수 있다(has capacity to).
(v) 자기반성할 수 있는 존재는 이성추리할 수 있다.
(vi) 오직 정신들만이 통각한다.
즉, 통각하는 존재는 반성하고, 반성하는 존재는 자기반성할 수 있고, 자기반성할 수 있는 존재는 이성추리할 수 있는데, 오직 정신들만이 이성추리할 수 있기에, 결국 오직 정신들만이 통각한다.
물론, 이러한 Kulstad(1981)의 견해는 우선, McRae(1976)와 마찬가지로, ‘동물도 통각할 수 있다’는 NE의 서술과 정면으로 모순됨으로써 라이프니츠의 서술을 비일관적이라고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통각을 인정하는 구절의 중요성을 약화해야 한다. 이는 이미 앞서 우리가 배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지는, 라이프니츠의 통각과 자기반성의 미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통각을 동물에게도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즉 통각이 이성성과 결부된다는 것, 그리고 통각이 반성과 결부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a) 이성성과 결부되지도, 반성과 결부되지도 않는 통각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2)의 입장을 견지해 McRae(1976), Kulstad(1981)의 견해와 양립 가능한 길을 모색하거나, (b) 동물도 반성적으로 통각할 수 있지만, 인간만이 자기반성적으로 통각할 수 있고, 이성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3)의 입장을 견지해 Kulstad(1981)의 입장을 배제하고, McRae(1976)와 양립 가능한 이론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a)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 Jorgensen(2011)의 견해를 살펴본다.
1.3. 반성하지 못하는 동물의 통각을 인정하는 Jorgensen(2011)의 견해
Jorgensen(2011)은 동물에게 통각을 인정하면서도 동물의 통각과 구별되는, 반성을 포함하는 인간의 통각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의식 모델을 제시하며, 이는 각각 (i) p2 → p1, (ii) p2→cs(p1), (iii) cs(p2)→cs(p1)이다. 이때, p(n)은 특정한 지각을, cs(pn)은 의식적인 특정한 지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이 중 (iii)가 반성적 통각에 해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우선, 그는 (i) p2 → p1 모델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고차적 지각은 의식적 지각 없이도 가능하다고 본다. 가령, 의식적인 지각이 불가능한 실체들, 식물이나 물질적인 센서가 특정 외부 지각을 가질 때도, 그러한 내부의 변화에 대한 고차적인 감지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Jorgensen(2011)은 어떤 지각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은, 지각의 단순한 고차성이 아니라 지각의 상대적인 구별성(상대적인 뚜렷함, relative distinctness)에 있다고 말한다(192 각주 37 참조).
이에 따라, 그 다음 모델로 Jorgensen(2011)은 (ii) p2→cs(p1)을 제시하는데, 이는 ‘의식하고 있는 지각’이 있고, 그에 대한 이차적 지각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의식적인 특정한 지각’이라 함은 단지 ‘지각 내용’에 대한 의식인가, 아니면 그러한 지각의 ‘내적 상태임’에 대한 의식까지(이를테면, ‘표상함’에 대한 의식) 포함하는가? 그가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일차적 지각(p1)에서의 cs(p1)은 ‘지각 내용’에 대한 의식이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그는 어떤 지각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은 ‘지각의 상대적인 뚜렷함’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ii) p2→cs(p1) 모델은 동물에게도 적용 가능하다고 말한다(Jorgensen 2011, 192). 이를테면, 필자가 키우는 강아지 구름이는 한동안 간식을 주지 않을 때, 이전에 오줌을 배변패드에 잘 싸면 간식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매우 소량이라도 오줌을 싸러 간다. 이때 구름이는 과거의 기억 ‘내용’에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있고, 자신이 현존하는 간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기억’을 보는 중이라는 것도 물론 지각하고 있겠지만, 내적 상태로서 ‘그 기억을 지각함’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즉 주제적으로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iii) cs(p2)→cs(p1) 모델로 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cs(p1)을 예시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펭펭이를’(필자의 애착인형 이름) 본다.> 이는 내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펭펭이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식적인 지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각 p2는 다음과 같다. <나는 ‘펭펭이를’ 본다는 것을 본다.> p2에서는 ‘본다는 것’, 즉 내가 무언가를 지각하고 있다는 것 내지는 표상하고 있다는 것, ‘내적 상태’가 지각 내용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이 내적 상태로서 지각 내용이 주목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cs(p2)에서는 어떠한가? <’나는 ‘펭펭이를’ 본다’는 것을 본다.> 이제는 원본적인 지각 내용인 ‘펭펭이’에 더해 지각 내용으로 들어온 내적 상태 ‘본다’까지 함께 주목되고 있다. Jorgensen(2011)은 따라서, (iii) cs(p2)→cs(p1) 모델은 인간에게만 유효하다고 본다. 이는 반성이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주의(attention what is within us)”라는 라이프니츠의 말을 이해하게 한다(192, 강조는 필자). 결론적으로 그는 동물들이 의식적인 지각을 가지지만 이것이 반성의 형태를 띠지는 않으며, 인간의 영혼만이 내적 상태에 대해 주의함으로써 반성의 형태로 의식적 지각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반성은 특정 유형의 의식적 지각이다. 그러므로 동물은 의식적인 기억을 가지고 반복되는 자극에 대한 습관적 반응을 형성할 수는 있지만, 반성하고, 자기반성과 필연적 진리의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이성성으로 고양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견해는 동물들에게 특정한 통각은 인정하지만, 반성의 가능성은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인 (2)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Jorgensen(2011)의 입장은 우선 동물의 통각을 인정하는 NE에서의 라이프니츠의 서술을 정합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성성과 결부되지 않는 통각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McRae(1976)의 견해와 양립할 수 있으며, “의식은 행위에 대한 반성, 혹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기억”[1]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서술에 입각하여 반성적 행위가 아닌 통각의 의미((기억을 통한) 지각 내용에 대한 주의)를 찾음으로써 Kulstad(1981)와도 양립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동물에게 반성적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견해는 여전히 통각 혹은 의식이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이라는 PNG 4절의 주장을 약화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또한 “의식은 행위에 대한 반성, 혹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기억”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서술은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는(in order that we think it to be ours)”이라는 구절로 이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행위에 대한 기억’에서 ‘기억’은 감각을 가진 동물 수준에서도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기억이라는 데까지 동물이 도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반성을 수반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에게서 반성적이지 않은 의미에서의 통각이 존재한다면, 이를 Jorgensen(2011)의 (ii) p2→cs(p1) 모델에 따라 동물에게 귀속시킬 수 있겠지만, 전건,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각’이 아닌 통각이 정말로 인정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보다 정당화가 필요할 듯 보인다.
2. 인간과 동물의 반성적 통각의 의미를 구별하는 이 글의 견해 및 그에 제기될 수 있는 반론에 대한 고려
2.1. 인간과 동물의 반성적 통각의 의미를 구별하는 이 글의 견해
마지막으로, 이 글은 (b) 동물도 반성적으로 통각할 수 있지만, 인간만이 자기반성적으로 통각할 수 있고, 이성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3)의 입장, 즉,
(3) 동물은 통각하고, 반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통각한다. 하지만, 자기반성할 수는 없다. PNG 4절에서의 통각은 동물의 통각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반성은 자기반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를 주장함으로써 Kulstad(1981)의 입장을 배제하고, McRae(1976)와는 양립 가능한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근본적으로, ‘반성(reflection)’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단어는 라틴어 ‘뒤로(re-) 굽히다(flectere)’에서 유래되었고, 즉 ‘되돌아감’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에게서 이 반성은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주의(attention what is within us)”으로 설명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되돌아감’일 수 있는가? 우선,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주의’는 존재론적으로 내적 상태인 지각 ‘내용’에 대한 주의를 의미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인식론적으로 ‘내적 상태’인 지각에 대한 주의까지 함께 의미할 수도 있다. Jorgensen(2011)은 전자는 동물에게도 가능하지만(물론 이때 그는 전자를 ‘반성’으로 보지 않았다), 후자는 인간에게만 귀속된다고 주장했다. 이 글 역시 이러한 그의 입장에는 동의한다.
그리고, 앞선 장에서 인용하였듯이, 라이프니츠는 감각(sensation)을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으로 정의했고(PNG 4절), 이러한 감각(sensation)은 통각을 포함하며, 따라서 감각하는 동물은 이해력(understanding)은 없으면서도 통각(apperceiving)의 능력(faculty)을 가진다(“New Essays” 161 및 173 참조)고 서술하였다. 여기서 이 글은 감각이 단순히 수용성 등으로 정의되지 않고, ‘기억’을 동반하는 것(accompanied by)을 조건으로 정의되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반성이 어떠한 의미에서 ‘되돌아감’일 수 있는지 두 가지 방식에서 해명할 수 있다.
횡축의 반성: 기억을 통한, 이전의 지각으로의 되돌아감. 지각의 내용에 대해서만 주의한다.
종축의 반성: 세계 지향에서 주관 지향으로의 되돌아감. 지각의 내적 상태임에 대해서도 주의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PNG 4절의 서술과 NE의 서술은 약화되지 않고 양립 가능하다. 즉, 통각이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서술은, 동물에게는 횡축의 반성으로서 허용되고, 인간에게는 종축의 반성으로서 허용됨으로써, 동물과 인간에게 모두 반성적 통각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통각에게만 자기반성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이때, 동물과 인간에게 (ii) p2→cs(p1)을, 인간에게만 (iii) cs(p2)→cs(p1)을 적용시키는 Jorgensen(2011)의 모델은 이 견해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기억을 통한 지각내용에 대한 주의는 반성적 행위로 편입된다.
2.2. 인간과 동물의 반성적 통각의 의미를 구별하는 이 글의 견해에 제기될 수 있는 반론에 대한 고려들
2.2.1. 라이프니츠 체계에서 반성을 두 가지 의미로 나누는 것은 정당한가?
이러한 견해에 관해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우선, 이렇듯 반성을 두 가지로 나누는 것 자체가 라이프니츠에게서 허용 가능한지에 대해 다루어 보자. Kulstad(1981)는 라이프니츠가 원래 ‘지성 작용(intellection)’을 “une perception distincte jointe a la reflexion(반성에 결합된 뚜렷한 지각)”[2]으로 서술했다가 “perception distincte jointe a la faculte de reflechir(반성 능력에 결합된 뚜렷한 지각)”[3]으로 고쳐 쓴 구절을 발견한다. 동시에, 이는 “qui n'est pas dans les bestes(동물에게는 없는)”[4] 것으로 지적된다. 이에 그는, 만약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것이 단지 일반적인 반성이었다면, 인간의 의식(뚜렷한 지각)은 PNG 4절에 따라 언제나 어떠한 반성적 행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 작용이 ‘반성 능력’에 결합되어 있다고 섬세하게 언어를 제한할 필요가 없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 작용에 반드시 동반하지는 않는, 다시 말해 반드시 실행(act)되지는 않지만 능력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반성이 있다면, 그것은 로크적 반성, 즉 ‘우리 자신의 마음 작용에 대한 지각’이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35).
또한, 라이프니츠는 PNG 5절에서 Bayle의 개 사례를 염두에 둔 채 ‘개도 그를 때렸던 막대기를 보면 그 막대기가 자신에게 주었던 고통을 기억하고 도망친다’고 쓰면서, 이와 같이 사람들조차도 경험적으로 행동하는 한,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고 이에 행위(action)의 3/4 정도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행동한다고 말한다. 만약 동물은 모든 반성적 행위가 불가능하므로,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으로서 의식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행위의 3/4 정도는 의식 없는 행위라는 것인데, 이는 상당히 반직관적이다. 이때 동물에게도 횡축의 반성, 즉 기억으로서의 반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앞선 구절에 이어 “따라서 예를 들어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경험해 왔기 때문에 내일 낮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한다”(PNG 5절)는 라이프니츠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은 기억에 의존하여 동물처럼 행동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때 사람들은 이전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의미에서 내적 상태에 대해 반성하는 것, 즉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반성 능력에 결합된 뚜렷한 지각’으로서 지성 작용이 인간에게만 부여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로부터 흥미로운 추론이 하나 나올 수 있다. 즉, 사람들이 동물처럼 기억하기만 할 때에도, 이들에게는 그러한 기억 작용을 의식할 특수한 ‘반성 능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들과 달리 기억에서 정신 작용에 대한 반성, 그리고 자기반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서 ‘내일 낮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한다’는 이야기에 “이에 대해 천문학자는 이성에 의하여 내일 낮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것이다”(PNG 5절)라는 말이 뒤따르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더하여, 앞서 Jorgensen(2011)이 인용한 ‘의식은 행위에 대한 반성, 혹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기억’이라는 구절도 ‘기억’으로부터 ‘나의 기억’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의식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의식을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으로 정의한 PNG 4절의 구절에 더해 “의식 혹은 나에 대한 감각(sense)은 도덕적 혹은 인격적(personal) 정체성을 증명한다.”(NE 236),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New System”(1695)에 관한 Foucher의 반론에 답변하는 중 “짐승들은,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한다. 하지만, 이성과 의식을 전제하는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할 수는 없다”(G IV, 492)고 말한 구절, 마지막으로 “이러한[이성적] 영혼들은 반성적 행위를 할 수 있고, “나”, 실체, 영혼, 정신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서- 짧게 말해, 비물질적 사물과 진리에 대해 사고할(consider) 수 있다.”(PNG 5절)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여전히 동물이 모든 반성적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인상을 준다. Kulstad(1981)도 이를 인지하고 있기에, (3)의 입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하더라도 많은 반대에 부딪힌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모두 ‘의식’이라는 말과 함께 이성성을 의미하는 다른 단서 조항들이 함께 곧바로 붙어 있다는 데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즉, ‘의식 혹은 나에 대한 감각(sense)’, ‘이성과 의식’, ‘반성적 행위’ 바로 뒤에 쓰인 ‘나, 실체, 영혼, 정신’이란 말은 이때의 반성 혹은 의식, 즉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을 인간에게 해당하는 종축의 반성의 의미로 읽으라는 당부로도 여전히 해석될 수 있지 않은가?
2.2.2. 기억하는 경우에만 동물의 의식을 인정하는 것은 정당한가?
두 번째 반론으로는, 동물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이야기된, 기억으로서 ‘횡축의 반성’에는 미끄러지듯 넘어갔지만 직관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는 어떤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 바로 동물은 기억할 때만 의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라이프니츠 역시도 동물의 감각을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으로 정의하고, PNG 5절에서 사람 역시 자주 동물처럼 행동한다고 말할 때도 ‘개도 그를 때렸던 막대기를 보면 그 막대기가 자신에게 주었던 고통을 기억하고 도망친다’와 같이 기억의 예를 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통각(apperception)이 특히 칸트 이후에, 주체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자기의식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지시하고 있는 가운데, 라이프니츠는 이와 달리 통각을 의식(consciousness)과 동일시하면서 그저 내적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awareness), 혹은 주의(attention)와 유사한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동물이 다른 어느 것도 아니라 어떤 것 x에 집중하고 있다면(<구름이는 ‘펭펭이를’ 본다.>), 이는 여전히 어떤 뚜렷한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식적’이지만, 기억한다는 의미에서조차도 반성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러한 난점은 Jorgensen(2011)에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통각’을 ‘의식’으로, 그리고 다시 ‘주의’의 의미로 가깝게 가져가는 것은 그의 입장과 친화적이다. 앞선 장에서 서술하였듯, Jorgensen(2011)은 동물에게 귀속시키는 통각을 ‘반성적’으로 보지 않고, cs(p1)을 단지 ‘지각 내용’에 대한 주의인 것만으로 동물적 의미에서 ‘의식적’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일상적 용법에서, ‘의식’이 ‘주의’와 매우 유사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나는 레포트 마감 기한에 늦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라이프니츠의 특이한 서술로 인하여, 이 글의 입장에서도 동물이 무언가를 현재적으로 기억하지 않고, 단지 주의하고만 있더라도 의식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동물이 ‘주의함’은 ‘기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초반부에서도 인용하였듯이, 라이프니츠는 PNG 4절에서 감각(sensation)을 가진 생명체로서 동물에 대해 말한다. 어떠한 모나드가 수용된 인상들 사이에 대조(contrast)와 구별(distinction)이 있도록,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를 표상하는(재현하는, represent) 지각들 사이에서도 대조와 구별이 있도록 조율된(adjusted)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모나드의 지각은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인 감각(sensation)에까지 이를 수 있고(amount to), 실제로 이에 이른 생명체가 동물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도 함께 주목해 보자.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 경우에 따라 후에 그 자신이 들리도록 하기에 충분할 만큼 긴 메아리가 남는 지각.” 이에 따르면, 대조와 구별이 가능한 기관들을 가져서 무언가가 ‘뚜렷한’ 지각이 된다는 것은, 그 지각이 ‘기억되기에’ 필요충분한 조건인 듯 보이고, 이렇듯 ‘기억될 만큼 뚜렷한 지각’은 라이프니츠의 용어로,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이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횡축의 반성’의 의미에서 의식적이라는 이 글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동물은 ‘기억을 동반할 때만’ 의식적일 수 있다.
2.2.3. 횡축의 반성은 왜 종축의 반성으로 나아갈 수 없는가? 그리고 종축의 반성은 어떻게 이성성으로 나아가는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반론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 라이프니츠 철학 자체가 근본적으로 해명해야 할 문제일 수도 있겠다. 동물에게는 왜 종축의 반성이 가능하지 않은가? 인간에게는 왜 종축의 반성이 가능하며, 이는 어떻게 이성성으로 이어지는가? 이를 위해 우선 근본적 질문을 던져 보자. 지금까지 논의되었듯,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반성할 수 있고, 필연적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필연적 진리를 알 수 있고, 자기반성할 수 있는 존재자는 이성적 존재자이다. 그런데 이는 어째서인가? 이성성이란 무엇인가? 잘 알려져 있듯이, 라이프니츠는 충분이유율을 주장한다. ‘그 어떤 것도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Nihil est sine ratione). 그런데 이는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 ‘이성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이성은 모든 존재의 시원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존재만을 제외하고, 모든 존재는 우연적이다.”, “우연적인 것들의 원칙은 모든 더 완전한 것 혹은 더 많은 이유를 가진 것이 참이라는 것이다.”(“On Freedom and Possibility, 1680-1682?, AG 19) 라이프니츠 체계에서, 신은 최고로 완전한 자임을 고려할 때, 그렇다면 신은 최고로 많은 이유(reason)를 가진 자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시작하는 가장 참된 것으로서 결국 이성(reason)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에 이르면 더 이상 우연성은 없고, 필연성만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이성이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성은, 필연성, 궁극 원인(실재성), 자발성 그 자체의 이념이다. 따라서 피히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성성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활동성’이다. 이를 가정할 수 있다면, 이성적 존재자는 이성에 의거한 활동으로부터는 언제나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Jorgensen(2011)에서 동물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ii) p2→cs(p1) 모델을 생각해 보자. 이는 동물이 주의하고 있지는 않아도, 어쨌든 내적 정신 작용에 대해 지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구름이는 ‘펭펭이를’ 본다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때 예시를 현재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로 바꾸어 보자(<구름이는 ‘펭펭이를’ 기억한다는 것을 본다>). 라이프니츠에게서 모든 모나드에 주어지는 지각, 일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본다’는 것과 달리 ‘기억한다’는 무언가 신비로운 측면이 있다. 현상적으로 생각할 때,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펭펭이든, 어떤 식물이든, 구름이든, 나든, 받아들여야만 한다(물론 모나드계에서는 모두 내적 원리에 따른다는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자극이 주어질 때 구름이가 특정 기억을 떠올린다고 한다면, 이 기억을 떠올리는 작용은 물론 외부의 자극에 의해 촉발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기억을 연합 원리에 따라 끄집어 내는 구름이의 행동(횡축의 반성)에는 단순한 지각에서보다 큰 능동성이 깃들어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물 모나드에게서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은 ‘후에 그 자신이 들리도록 한다(to make itself heard)’는 PNG 4절에서 라이프니츠의 서술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동물도 ‘기억한다’라는 정신 작용에 포함된 능동성으로 인하여, 세계 지향으로부터 되돌아와 ‘자신’이 ‘기억하고 있음’을, 지각하게 될 수는 없는가(<‘구름이는 ‘펭펭이를’ 기억한다’는 것을 본다.>)? 직관적으로 고려해 볼 때도, 구름이가 자신의 표상 작용을 인지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훨씬 쉬워 보인다. 동물에게 이러한 주관 지향으로서 되돌아옴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기억은 “이성의 그림자”라거나, “동물의 지각들 안에는 이성과 비슷한 연결이 존재”(PNG 5절)한다고 말한다. 열등하지만 이성과 닮은 어떤 것, 이러한 의미에서도 기억하는 동물의 의식에 ‘반성’이라는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그리 부적절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동물이 세계로부터 주관 지향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은 기억에 의한 지각과 지각 사이의 연결이 진정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흄 식으로 말하면 경험에 의거하는 ‘습관’ 또는 ‘자연의 예정조화’이기 때문에, 기억에서는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빌리지 않은 혹은 경험에서 찾을 수 없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것 내지는 “형이상학적으로 동일하게 존속하는 것”(DM 34)을 향해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동물의 영혼들도 또한, 정신보다 불완전하게 표현하기는 하지만, 전 우주를 표현한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은 자신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DM 34)와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즉 어떤 작용에서든 세계 지향으로부터 되돌아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본성적으로, 기억에서든 표상에서든 그들의 내용으로부터, 동일하게 존속하면서 활동하는 ‘나’의 작용으로서 ‘기억 작용’과 ‘표상 작용’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또한, 필연적 진리를 인식하고 경험에 투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역시도 이성에 의거한 행위로부터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미스터리이다. 칸트는 자발성의 발휘인 표상들의 종합을 의식함으로부터 초월적 통각을 연역했다. 한편, 피히테는 표상 아닌 행위로부터, 그리고 같은 이성적 존재자인 타자의 현존으로부터 자기의식이 가능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에게 인간이 자기의식하는 것은, 신이 자신의 이성성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은 지금 우리에게 인간다움, 혹은 ‘이성적 존재자다움’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을까?
3. 라이프니츠 체계에서 통각과 반성에 관한 논의가 자유의지 논의에 줄 수 있는 실마리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이 글의 논의가 라이프니츠에 관한 또 다른 논의 지평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시사하면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라이프니츠는 황혼기의 저작 『변신론(Theodicy)』[Theo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성(intelligence)은 자유의 영혼(soul)이며, 나머지는 그의 육체(body)이자 토대(foundation)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모든 개체적 실체를, 영혼이라 불리는 지배적인, 우월한 모나드와 육체라 불리는 하위의 모나드들의 결합체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통각과 자기의식에 관한 논의는, 그가 신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 조건으로 천명한 지성(intelligence), 자발성(spontaneity), 우연성(contingency)에서, 지성이 어떠한 이유로 자유의 중추로 자리하게 되는지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나는, 신학에서 요구하는 정의에 따르면, 자유는 숙고(deliberation)의 대상(object)에 대한 명확한 지식(knowledge)을 포함하는 지성, 그[whereby, 이하에 나오는 자발성]를 통해 우리가 결정하는 자발성, 그리고 우연성, 즉 논리적 또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배제로 구성됨을 보여주었다. 지성은 그 자체로 자유의 영혼이며, 나머지는 그 육체이자 토대이다. 자유로운 실체는 자기-결정적(self-determining)이며, 이해에 의해 지각된(perceived) 선의 동기에 따라, 그것에 강요되지 않고 다만 이끌리는(inclines) 것이다. 그리고 자유의 모든 조건은 단지 이 몇 단어로 이루어져(comprised)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과 자발성에 존재하는 불완전성, 그리고 우리의 우연성에 관여하는 확실한(infallible) 결정은 자유도 우연성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Theod. 288)
우선 위 인용문의 첫 줄이 마지막 줄에 이르면서, ‘신학이 요구하는 자유의 정의’로부터 ‘우리의 자유와 우연성’으로 미끄러지듯 이행하였듯이, 라이프니츠는 자주 신과 피조물의 자유의지를 동일한 근거로부터 함께 구출해 내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 논고』[DM] 13절에서 술어의 반대가 모순을 함축하지 않는 진리는 기하학적 진리 등과 달리 우연적으로 필연적이라는 것으로부터,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시저와 최선의 세계를 선택하는 신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On Freedom and Possibility”(1680-1682?, AG 19)에서도 그는 신과 인간의 의욕(volition)과 의지(will)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정의하고 있으며, “Letter to Coste, on Human Freedom”(AG 195) 등지에서도 신과 인간 모두 어떤 것, 즉 신은 최선에, 인간은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what strikes us the most”, DM 30절에서는 “좋아 보이는 것”으로 바뀌어 서술되고 있다)에 이끌리지만, 그것에 강제되지는 않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주장한다. 물론, 이로써 이 글이 신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질적으로 동일함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밝히고자 하는 것은 다만 신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동형성이다. DM 30절은 “신은 그의 의지를 어떤 특별한 관점에서 표현하거나 모방함으로써 [인간의] 의지가 항상 그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추구하도록 섭리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지는 어떠한 의미에서 신의 의지를 모방하는가? 이에 대한 단서는 “A New System of the Nature(1695, AG 144)”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정신적인 자동기계(automaton)가 “이성을 분유받은 경우에 자유롭다(free in the case where it has a share of reason)”고 말한다. 라이프니츠가 자유라는 용어를 외적 강제 없는 행위의 자유(freedom of doing what he wills), 외/내적 강제 없는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ing), 크게 이 두 가지를 논할 때 사용했음을 고려하더라도(이에 관해서는 “On Freedom and Possibility”(1680-1682?, AG 19 각주 37 등 참조), 여기서 이성이 자유의 조건이 된다는 것은 전자, 즉 내적 의지에서 행위로의 채널을 주목한 것이라기보다 후자, 의지가 무엇에 의하여 규정(determine)되는가에 주목한 서술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즉, 이성성(rationality)이 신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 동형성의 의미이다. 이에 일관되게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론(Monadologie)』[M] 48절에서도, 신에게서 의지(will)가 창조된 모나드에게서 욕구(appetition)에 대응한다고 말하면서, ‘이성적 욕구’만을 의지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다만 “신에게 있어 이들 속성들[능력, 인식, 의지]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거나 또는 완전”하며, 그를 모방한 모나드들은 제한적인 완전성만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두 의지 역시 자유로움의 정도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이 글은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지성 작용은 “반성 능력에 결합된 뚜렷한 지각”을 의미하고, 이때의 반성 능력은 로크적 반성 및 그에 결부된 자기반성을 지시할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기반성은 곧 이성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유의 조건에서 지성은 이성성과 매우 밀접한 조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신과 인간 모두의 자유의 조건으로서 이성성 내지 자기반성을 가진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우선 첫째로, 지성이 왜 자유의 중추인지는 신과 인간의 의지 간 동형성이 이성성을 의미하고, 지성은 다시 이성성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해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이성성이 사실상 자유의 조건이 됨은, 다시 자유의 조건으로서 자발성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 앞서 이성성은 자발성 그 자체, 혹은 모든 존재를 탄생시키는 최초의 자발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자유의 조건에서 지성에 더해 자발성이 다시 따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앞선 Theod. 인용문에서 지성은 ‘숙고의 대상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라는 말로 이론이성적 측면을 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논의들에서도 통각과 자기반성, 그리고 이성성은 기억과 통각 작용 등, 실천적 행위보다는 인식적 활동 측면에서 주로 논의되었다. 한편 자발성은 ‘결정하는 자발성’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는 물론 사물의 실질성과 같은 정적인 규정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행위 결정, 즉 ‘의지의 규정’을 의미할 수 있다. 만약 라이프니츠가 지성과 의지를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았던 스피노자주의에서 벗어나서, 인식에서 행위로 전환시키는,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전회시키는 실천이성의 자발성을 강조하고자 지성과 자발성을 자유의 두 다른 조건으로 보았다면 어떨까? 물론 이러한 견해는 아니지만, 실제로 Jorati(2015)는 적어도 자유의지의 조건으로서 자발성이 그저 ‘내적 원리에 따라 작동함’ 이상이어야 함을 주장하며 라이프니츠에게서 자발성을 세 가지 위계적인 의미로 나눈다. 마지막으로, 자기반성으로서 통각은 행위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틈을 열어줄 수 있다. 우리를 자기의식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이성성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실천적 주권자임을 선포한다. 이성은 언제나 자기결정적이며,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세운 목적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 목적인에 깃든 이성성이 어쩌면 우리를 다소 마법적일지라도 인과적 시초로서 세울 수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 라이프니츠는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자기반성의 결핍이 도덕적인 성질을 가지지 못하는 데 대한 이유이다.”, “나에 대한 기억과 지식이 벌과 보상을 가능하게 한다.” (DM 34)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욕(volition)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욕구(conatus)이다.”(“On Freedom and Possibility”, 1680-1682?, AG 19)
4. 결론
지금까지,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통각 내지 의식이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지식’이라는 PNG의 서술과, 통각과 자기반성을 결부시키면서 자기반성을 인간에게 배타적인 지각 양태로 귀속시키는 서술들, 심지어 동물의 반성적 행위 자체마저 인정하지 않는 듯한 서술들과, 동시에 동물에게 통각을 인정하는 NE의 서술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탐구하였다. 이에 동물은 이성성으로 이어지는 통각이 불가능하다거나, 반성적인 것으로서 통각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라이프니츠 철학의 비일관성을 인정하는 이론과, 동물에게 반성적이지 않은 통각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난관을 타개하고자 하는 이론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라이프니츠 철학의 일관성을 보장하면서, 어떠한 텍스트를 약화시켜 읽지 않고자, 반성을 기억으로서 되돌아가는 횡축의 반성과 세계 지향에서 주관 지향으로 되돌아오는 종축의 반성으로 나누어 전자를 동물에게, 후자를 인간에게만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동물의 반성적 통각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특유한 반성적 통각으로만 자기의식 내지 자기반성에 다다를 수 있음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러한 견해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반성을 두 갈래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적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고, 동물에게 반성이 허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동물이 기억을 동반한다는 의미에서 의식적인 경우에는, 동물이 무언가에 그저 주목하고 있는 경우에도 동물이 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음을 밝혔으며, 마지막으로는 왜 동물이 횡축의 반성에 머물고 종축의 반성으로 나아갈 수 없는지, 그리고 인간에게서는 왜 종축의 반성이 가능하고 종축의 반성으로부터 어떻게 자기반성, 필연적 진리의 인식과 같은 이성성이 도출되는지 해명하고자 하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시사하였다. 끝으로, 이렇듯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통각과 반성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그 지평을 확장하여 신과 인간의 자유의지 관련 논의에 어떠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서술하고자 하였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으로부터 이성성을 부여받은 또 한 명의 정신으로서, 끊임없이 자기반성하며 이러한 글을 써내려간 것이 조금이나마 이성적 존재자임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기반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밝히면서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온전한 자발성이자 선의 이념인 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 가닿는 의미 있는 시도였기를 바라며, 논의를 마친다.
5. 참고문헌
빌헬름 라이프니츠, 윤선구 역, 『형이상학 논고』, 아카넷,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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