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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림으로서의 철학

... (2021)

침묵의 말을 하게 하라

-  현상학적 시간의식을 바탕으로 한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시간성 분석

 

 

1.     서론

-      두 시간론의 대립과 이야기가 드러내는 시간성

인간의 모든 경험은 시간적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우리는 시간을 알면서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시간 존재론을 양분한다면 객체로서의 시간이 객관적 세계의 양상인가 혹은 시간의식에서 출발하여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된 것인가라는 두 물음이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과거, 현재, 미래는 각각 관점 독립적 속성인지 관점 상대적 속성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때 이 물음은 결국 ‘현재론’에 대한 탐구로 수렴되는데, 과거-현재-미래의 구분 즉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지 않는 영원론이 아니라면 과거나 미래를 만드는 것은 근원적으로 현재이기 때문이다.[1]

시간성이 객관적인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대 물리학이 말하는 ‘우주론적 시간’이다. 시간은 물리적인 운동과 불가분한 것으로 정의되며, 과거 및 미래와는 단절된 ‘순간’들의 흐름이다. 이러한 시간은 인간들의 질적 변화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동질적이고 균일하게 주어져 있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가 본격적으로 제기한 시간성의 개념은 물리적인 운동과 분리되어, 의식에 현전하는 현재가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는 각각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현전하는 현재에 침투하는 주관적, ‘심리학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론은 심리학적 자아를 넘어 초월론적 주관의 영역에서 파지-근원인상-예지의 구조를 가진 시간성이 구성된다는 후설 등의 ‘현상학적 시간’으로 계승된다.

리쾨르는 이러한 두 시간론의 평행선을 ‘시간의 아포리아’라고 보고, 타개할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한다. 마침내 그는 ‘이야기의 시학이 시간의 아포리아에 답한다’고 말한다. 시간성이란 직접 화법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술 행위라는 간접 화법의 중개를 필요로 하며, 이러한 답은 궁극적 진리는 아니지만 아포리아에 대한 논의를 생산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시간성에 대하여 입을 여는가? 리쾨르는 3단계의 미메시스(모방)를 통하여 이를 설명한다. 이야기는 행동을 재현하지만, 이는 실제 행동이 아니라 ‘해석된’ 행동이다. 우리는 행동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지를 가진다. 이것이 미메시스 Ⅰ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차별적인 혹은 균열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상호 침투를 통한 정신의 통합이 필요하다. 무차별적인 시간의 흐름은 우주론적 의미이고, 균열된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 및 현상학적 시간론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유기적으로 의식되지 못하는 불협화음 상태를 의미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때 인간이 정신의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체계화하는 방식은 바로 이야기의 창조를 통해서이며, 이야기는 바로 시간을 재구조화함으로써 정신적 시간의 통합을 이루고 이를 통해 행동, 사건, 나아가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때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생성되는 과정이 바로 미메시스 Ⅱ이며, 현실이 이야기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며 이야기의 해석이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적 과정이 미메시스 Ⅲ이다. 이야기가 행하는 시간의 재구축은, 적절히 사건들을 생략하거나, 시간 순서를 뒤바꾸거나, 사건이 서술되는 시간의 길이를 조절하는 등 ‘사건들의 객관적 시간’과 ‘이야기의 시간’ 사이 관계를 비트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야기에서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의 대립을 넘어선 시간성 그 자체는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을 암시하며, 행위의 의미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결국 이야기는 이러한 시간의 형상화를 통해,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개인의 통합성이 무너지는 불안과 긴장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식으로 초월하는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 ‘몰락의 에티카’가 된다.

한 이야기가 시간성의 어떠한 측면을 부각하는지는 다양하나 그것들은 각자 진리의 부분을 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존재는 현존재의 존재이해로부터 탐구될 수밖에 없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의 시간성 역시 현존재의 시간성 이해로부터 탐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 글에서는 이야기 중에서도 데이비드 린치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영상예술 장치를 통하여 현대의 현상학적 시간의식을 드러내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2.    현상학적 시간의식의 개괄 – 세 개념을 중심으로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드러난 현상학적 시간의식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매우 개략적으로나마 현상학적 시간론의 사상적 핵심을 정리한다.

 

2.1.  후설의 ‘살아있는 현재’

우선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은 객관적 시간의 헐어내기를 통하여 주관적 시간의식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객관적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생활세계의 시간이지만 자연과학적 시간과 같은 것은 아니다. 후설에게 자연과학적 시간은 시간의 본질이 아니라 본질적인 생활세계의 시간을 설명하고자 이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논점으로 돌아가, 주관적 시간의식을 분석하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현상학적 소여들은 객관적으로 시간적인 것들이 구성되는 시작점인 시간파악들인데, 이러한 시간파악들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체험, 즉 ‘시간의 근원’은 ‘파지-근원인상-예지’라는 원초적 차이들이다. 이에 더하여 지나간 작용들의 재생산 반복을 통해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재기억, 상상 등의 추가적인 시간 체험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관적 시간을 구성한다. 이러한 주관적 시간은 질서를 지니고 연속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객관적이지만 진정한 객관적 시간은 개별 주관을 떠나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시간은 나의 출생이나 죽음 등 ‘한계사건’을 넘어서는 시간까지 포함한다. 후설은 의사소통을 통해 시간체험에 대한 기억들을 전달하면서, 그 기억에 의해 기억된 것들이 자신의 고정된 시간위치, 즉 비로소 객관적 시간 안에서의 위치를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간분석으로부터 현상학은 ‘멈추어 서 있으면서 흐르는 현재’, 즉 과거 파지와 미래 예지를 통해 구성된 과거 지평과 미래 지평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지금'이면서 ‘지금-아님’으로 변양해 가는, 두툼한 폭을 가진 ‘살아있는 현재(lebendige Gegenwart)’라는 시간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살아있는 현재 개념은 선형적인 시간관을 뒤바꾼, ‘비연대기적인 시간성’이라는 현상학적 시간론의 핵심을 보여준다.

 

2.2. 하이데거의 ‘탈자적 시간성’

후설 이후 이러한 시간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적 계승되는데, 대표적으로 하이데거는 실존적 시간 이해를 바탕으로 현상학적 시간성과 객관적 시간성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미래’의 본질은 자기 자신에게 도래함에 있고, ‘과거’의 본질은 그렇게 존재해 옴(기재), 그러므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앞질러 달려가 보고 자기 자신에로 되돌아올 수 있음에 있다. 또한 ‘현재’의 본질은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늘 존재자들 곁에 머무르면서 그것들을 ‘지금’으로, 자신의 현재로 ‘현재화’시킨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때 시간성의 근본적인 구성틀이 “…에 다가옴”, “…에 되돌아옴”, “…곁에”로 규정되는 한, 시간은 존재 가능성, 기재(그렇게 존재해 옴), 현재화시키는 다른 존재자에로 현존재를 빠져나가 있다. 즉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 밖에 있음’이다. 이것이 근원적인 시간성의 탈자적 구조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자적 시간성을 통하여 하이데거는 실존을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실존은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고, 되돌아오고, (존재자들을) 현재화시키면서 언제나 ‘자기 자신의 밖에 있음’이라는 근원적인 단일성이다. 마치 현실에서 타자가 우리의 존재를 알려 오듯이, 이러한 탈자태만이 우리 자신으로서 우리 자신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의 역사를 재구성하게 하고, 가능성을 꿈꾸게 하고, 현재를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현존재(Dasein)는 늘 이러한 실존적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마음씀(Sorge)을 통하여 바로 거기에서(da) 존재자들의 존재를 열어 보이는데, 이러한 마음씀의 의미에 따라 시간성이 달라지게 된다. 이를테면 실존적 삶을 살지 않고, 단지 도구적 의미에서만 존재자들과 관계한다면 제한적인 탈자적 시간성을 가진 비본래적 시간을 살게 되며, 여기에서 더 퇴락하면 기존의 수평적이고 양적인 시간 이해, 즉 통속적 시간성이자 그저 순간들이 흘러갈 뿐인 객관적 시간성 속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실존적 존재로서 현존재는 항상 장래를 향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기투하고 이러한 가능성의 빛 아래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개시하는 존재자’[2]가 될 수 있다. 특히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으로 나아가 마음 쓸 때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강렬한 물음을 맞닥뜨리게 되고, 비로소 실존적 시간 속에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간의 탈자적 구조,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서 상호의존적, 동시적으로 존재하며 근원적인 단일성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가능케 한다는 것은 현상학의 비연대기적 시간성을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의미에서 재구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3.  들뢰즈의 ‘결정체 이미지’

들뢰즈 역시 후설의 ‘살아있는 현재’ 개념을 빌려와 시간성을 설명한다. 시간은 근원적 종합을 거쳐 구성되는데, 이러한 종합은 독립적이면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순간들이 서로의 안으로 수축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매순간들이 겹쳐져 주름이 지는 것이다. 이러한 종합으로 과거와 미래는 살아있는 현재 안으로 수축하고, 각각 세포의 유전, 욕구라는 가장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유기체의 현재를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주름에 의해 형성된 유기체는 가장 중심적인 시간적 계기인 현재,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어우러진 어떤 총합이다. 나아가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존재를 순간들의 인위적인 합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상호 침투 속 유기체적인 전체로서 지속하는 것으로 본 것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이후 들뢰즈는 영화 이론에서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잠재태(the virtual)와 현실태(the actual), 꿈과 현실, 주연과 조연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크리스탈의 여러 면처럼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미지 개념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즉 후설로부터 촉발된 비연대기적 시간성 개념은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빛, 즉 과거, 현재, 미래를 서로 융화시키고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갈 가능성으로 재해석된다. 나아가 또 다른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빛, 꿈과 현실, 주체와 타자 등 긴장을 이루는 듯 보이는 존재 양태의 합일 가능성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3.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암시하는 현상학적 시간성, 그리고 그 너머

위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드러내는 현상학적 시간성, 그리고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장면 단위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 영화는 난해한 스토리 라인과 비현실적인 장면 및 인과 관계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이 글에서는 작품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로 벨라스케스의 회화 『시녀들 Las Meninas』을 덧입혀 볼 것이다.

 

 

3.1.  닻을 올리기 – 작품 전체의 시간의식에 대한 스케치

3.1.1.     오프닝 쇼트

이 영화의 오프닝 쇼트는 짧지만 강렬하게, 작품 전체의 시간의식을 담고 있다. 감상자는 비현실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느닷없는 춤사위에 당황하게 되는데, 종반부에서 이는 다이앤이 우승한 지르박 경연대회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후 갑자기 기쁘게 웃으며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다이앤의 이미지가 춤추는 사람들 위로 겹쳐지는데, 하나 주목할 점은 춤추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다이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이앤이 훌륭한 지르박 공연으로 축하받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을까? 다이앤은 이때부터 할리우드의 꿈을 꾸었고, 이야기의 구축에서 지르박 공연-우승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사건들, 특정한 시간이 생략됨으로써, 과거의 기억은 배우로서 사랑받는 미래의 욕망과 합일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외부의 공간성도 주어지지 않은 크로마키 같은 단색 배경, 서로 다른 대상은 같은 공간을 공점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배반하는 이미지의 중첩 등은 이 장면이 어떠한 물리적 인과성도 따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또한 구체적인 공간성이 부여되지 않은 채 기억(과거)과 욕망(미래)로 가득한 현재는 물리적 공간에 따른 어떠한 운동도, 따라서 우주론적 시간도 없는 순수한 현상학적 시간성의 지평이자 ‘살아있는 현재’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영화의 시작점(춤추는 이미지)과 끝점(지르박 경연임이 밝혀짐)을 잇는 서사적 장치는 영화 전체가 물리적 시간관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는 과감한 선전포고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후설은 ‘기억’ 작용은 대상의 존재를 정립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지각과 유사하며 단지 그것이 ‘변양된 과거’로서 의식에 떠오른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지만, ‘상상’ 작용은 이와 구분되어 대상의 실제 존재를 정립하지 않고, 지각 작용과 상호 침투 없이 충돌하는 어떠한 이미지 연상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다이앤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상상은 춤추는 사람들이라는 변양된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바탕으로 한 미래 예지와 합일되면서 상상의 경계를 넘어선다. 이렇게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기억과 욕망(혹은 충동, drive)을 넘나드는 화려한 연주를 통하여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생동하는 후설의 살아있는 현재를, 또한 이를 초월하여 꿈과 현실마저 중첩되는 들뢰즈의 결정체 이미지를 분출한다.

 

3.1.2.     죽음의 위협과 선형적인 도로-시간관으로부터의 이탈

오프닝 쇼트 이후 첫 장면에서, 차가 달리던 도중, ‘Mulholland Dr.’, 그 욕망의 도로에 다다르자 다이앤과 카밀라 모두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고 선형적인 도로를 이탈한다. 고대와 중세에는 신이 삶의 안정성을 보장했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초시간적인 신의 명령 아래 인간은 그저 ‘매순간(현재)을’ 충실히 살아가면 되었다. 다시 말하여 아리스토텔레스적 시간관 하에서도 인간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첫째로 ‘현재’의 연쇄가 신이 그린 하나의 그림 속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자유’ 개념이 신의 권력을 인간에게 되돌려주는데, 이때 역시 개인은 거대 담론 아래 자신의 시간을 조직할 명확한 방향성이 있었다. (마르크스, 헤겔 등.) 과거, 현재, 미래가 카오스에 빠지지 않고 역사는 저 직선 도로를 흔들림 없이 달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명확한 목적론은 퇴색하고 시간은 한순간에 중심점 없이 흩날리게 되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자신의 자아가 붕괴될 위기이다. 마치 다이앤 혹은 카밀라가 불시에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듯이. 이제 시간을 재구조화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책임은 ‘인간’이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떠밀려 오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세계관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근대의 종언이자 현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 영화에서, 다이앤 혹은 카밀라는 선형적인 시간관에서 쫓겨나듯 벗어나 욕망의 미로 속으로 휘발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떠난다.

 

3.1.3.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잠과 꿈

‘잠자는 자는 오히려 유희하는 자, 방랑하는 자이며 시간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잠자는 사람은 시간의 경과를, 세월과 여러 세계의 질서를 제 둘레에 둥그렇게 펼쳐놓는다.” “1초 만에 나는 수세기의 문명을 건너고, 석유 등잔과 풀어진 셔츠의 희미한 이미지에서 서서히 나의 자아가 그 본래의 모습대로 새로이 만들어졌다.”’[2]

그렇다면 오프닝 쇼트에서 예고한 것처럼, 이 영화는 어떻게 인간의 근원적인 시간성을 여행하는가? 전반부 빨간 침대 시트와 베개로 카메라가 파묻히는 장면(누군가의 잠), 이후 리타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과정의 비현실적인 전개(꿈), 도중 길에서, 다이앤의 방에서 잠드는 리타(꿈 속의 꿈), 후반부 다이앤이 “깨어날 시간”이라는 말과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는 장면(현실에로 되돌아옴?) 등, 작품 전체는 잠과 꿈의 은유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꿈에서 ‘나’라는 존재자는 물리적 시간관 -우리 자신에게서 태어났으나 객관적 세계의 실재로서 분리되고, 도리어 우리를 구속하는- 에 얽매이지 않고 근원적이고 선반성적인 존재 이해에 의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으며, 그들의 긴장과 운동을 체감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잠에 듦으로써 ‘시간을 되찾는’ 먼 여정을 시작하듯이, 꿈에서 우리는 물리적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우리의 기억과 역사, 기대와 욕망을 다채로운 상징으로 재구축한다. 물론 이후 꿈이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지를 밝혀내고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를 획득해야 하는 자는 잠에서 깨어난 현실의 의식적인 자아이지만 말이다.

 

 

3.2.  작품 항해하기 – 주인공들의 합일이 보여 주는 현상학적 시간성

3.2.1.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인용한 작품 전체 구조 분석 – 네 명의 핵심 인물을 중심으로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Las Meninas』, 1656.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정론적인 해석은, 영화의 1부는 다이앤의 꿈, 2부는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오프닝 쇼트에서 다루었듯이, 이러한 꿈과 현실은 마치 물줄기가 흘러들어 강을 이루듯 서로 누출된다. 이러한 누출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마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처럼, 작품이 꿈과 현실을 오가며 ‘이야기의 주인’을 찾으려는 감상자의 시선을 끊임없이 이동시키다가 종국에는 한 점으로 수렴시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죽음의 위협에 처했던 ‘이름 모를 여인’ -이 시점에서 감상자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가, 곧 할리우드를 향해 환한 표정으로 걸어나오는 1부의 ‘베티’로 눈을 돌린다. 그녀는 오프닝 쇼트에서도 등장했던 인물이었으니, 우리는 다시 그녀가 주인공이라는 가설에 힘을 싣는다. 그런데 이후 리타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영화의 초점이 집중되면서, 찰랑거리는 물처럼 ‘베티’와 ‘리타’ 사이 비슷한 비중의 관심이 유지되다가, 곧 우리는 또 다른 미지의 여인, ‘아담 캐셔’의 영화 속 내정자인 ‘카밀라 로즈’가 누구인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파헤칠 새도 없이, 비밀을 풀어낼 핵심 인물로 ‘다이앤 셀윈’이 지목되면서 시선은 다시 사건의 근원으로 보이는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시에라 보니타에서 만난 그녀는 얼굴도 잘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이미 죽어 있다. 단지 그녀가 금발이라는 것만 눈에 띄게 드러날 뿐이다. 결국 그녀의 존재는 영원히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흘러가고 만 것이다. 이때 헤이븐 허스트의 방(베티의 방) ‘밖에서 리타의 존재 증명하기’ 과업은 갑작스레 중단되고, 베티와 리타, 두 여인에게는 다시 서로만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다시 시선은 두 여인으로 양분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후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서로 합일된다. 그리고 클럽 실렌시오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의 ‘분주한 활동’ 속이 아닌 ‘침묵’ 속에서, 베티는 그의 가방 안에 리타의 열쇠와 맞는 파란 상자를 발견하면서 이야기의 비밀을 밝혀낼 2부로의 길이 열린다. 상자와 열쇠를 맞춰보려는 순간, 베티는 ‘사라진다’. 하지만 상자와 열쇠의 합일처럼, 그녀는 차라리 리타의 안으로 ‘흡수되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2부에서도 두 사람의 합일은 카메라의 이동(혹은, 시선 이동)을 통하여 비춰진다. 놀랍게도 2부에서 베티가 바로 다이앤 셀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다이앤이 부엌에서 손을 씻다 말고 카밀라를 부르자,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실제로 리타이자 카밀라가 서 있다. 1부에서 의문 속으로 사라졌던 카밀라가 리타의 모습으로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마치 리타가 다이앤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재빨리 시선을 바꿔 다이앤을 비춘다. 그리고 카메라가 두 사람을 모두 담으려는 듯 넓게 방을 비추자, 그곳에는 오직 다이앤만이 남아 있다. 1부의 마지막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리타가, 2부의 시작점에서 다시 다이앤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상자들은 다이앤의 청부 살인, 그런 그녀가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꾸는 행복한 꿈(1부), 그리고 자살을 알게 된다. 결국 이야기의 주인공을 찾으려 종횡무진하던 시선은, 마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캔버스 밖의 왕과 왕비가 바로 화가가 그리는 캔버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다이앤으로 수렴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리타, 카밀라, 베티가 모두 흘러 들어가 융화된 다이앤이다. 마치 1부 속 윙키스의 남자(댄)가 “두 개의 꿈을 꾸었으나 차이는 없다”고 말했듯이, 그리고 마치 신처럼 혼자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수화기를 통해 “the same”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것처럼.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결정적인 점에서 다르다. 분명 『시녀들』에서 화가가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의 주인공은 비가시적인 영역에 있는 왕과 왕비이다. 이들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되는 주인공(1)이다. 하지만 이 『시녀들』이란 그림 자체의 진짜 주인공은 물론 그림 중앙에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2)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림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그림 안팎의 화가(3)일지도 모른다. 혹은, 진정한 주인공이란 화가가 열성을 기울여 탄생시키고 있는, 아직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지지 않은, 그림 속 캔버스에 담긴 왕과 왕비(4)일 수도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도 이렇듯 주인공으로 보이는 네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차별점은 이들이 모두 합일된다는 데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주인공들은 서로가 서로의 기억이자 욕망, 또 다른 현재이고, 꿈과 현실이며 주체이자 타자이다.

다시 한번 베티와 리타가 ‘다이앤 셀윈’의 시체를 발견한 후 집으로 돌아온 상황을 떠올려 보자. “당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요. 당신이 누구인지도 알아요.” 베티의 이 말과 함께 빨간 방으로 돌아온 리타는 금발 가발을 쓴 후, 거울 앞에 서서 그 자신을 바라본다. 거울은 자신을 자신에게로 ‘되돌려주는’ 물체이다. 거울은 자신을 적나라하게 벌거벗겨 자신 앞에 드러낸다. 단지 1인칭으로 분주하게 순간을 살아갈 때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는 보여지지 않는다. 오로지 타자만이 그와 분리된 주체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를 타자로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그로부터 독립적인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듯이. 그리고 거울 안의 자기 자신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의 ‘탈자적 구조’처럼 그 자신으로부터 타자로 분리되어, 무섭도록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도래하는 것’이자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자신’이자, 거울을 보고 있는 ‘지금 현재화된 무언가’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과거, 현재, 미래는 애초에 현존재 자신을 ‘빠져나가 뒤섞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곧 근원적인 시간성의 구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원적인 시간성은 우리가 평소 인지하지 못한 ‘최초의 타자’로서 우리를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거울은 이러한 최초의 타자를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낸다. 즉 ‘도래하는 자신’(미래)과 ‘기존의 자신’(과거), ‘지금 눈앞에 현재화된 자신’으로서 거울상은 그 앞에 선 리타에게 되묻는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 될 것인가?” 그리고 리타는 금발을 쓰고 그녀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비가시적인 죽음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 버린 ‘다이앤’을, 동시에 ‘베티’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즉 끔찍한 현실에서 잠든 다이앤과, 배우로서 성공해 가는 베티를 모두 자기 자신의 역사이자 가능성으로서, 혹은 기억이자 욕망으로서 ‘살아 있는 현재’ 안에 불러들이는 것이다.

베티는 1부 내내 리타의 정체를 밝히려 분주하게 돌아다니거나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디션에서 작위적인 사랑을 연기하면서, 꿈에 다가가는 자신과 달리 도리어 리타를 ‘측은함을 갖고 신경 써야 할 존재’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지만, 리타는 그런 베티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김으로써 결국 베티, 리타, 다이앤이 같은 존재여야 함을 자각시킨다. 따라서 리타는 한갓 꿈의 등장인물이지만, 동시에 사실 베티의 실제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존재로서 2부 현실로의 인도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통상 다이앤의 꿈으로 여겨지는 1부에서 자주 잠에 드는 장본인이고, 리타가 잠에 들고 나서 장면이 전환되어 윙키스의 댄이 등장하는 등 꿈을 진행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면서 자꾸만 베티의 실제 모습-다이앤의 현실을 꿈에 누출시킨다. 즉 리타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그림 속 화가와 같은 존재이다. 리타는 꿈이라는 캔버스 속에서 베티의 모습을 그리지만, 그것은 가시적인 베티가 아니라 베티와 캔버스 밖의 다이앤과, 그것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리타와 합쳐진 형상이다. 그러나 그 합일된 모습은 캔버스 속의 캔버스로써 비가시적으로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화가로서의 리타와 꿈이라는 캔버스는 진정으로 완벽해진 그림을 미지의 것으로 남겨 둠으로써, 캔버스 너머에 있는 현실의 다이앤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와 꿈과 현실을 어떻게든 통합함으로써 그 그림을 스스로 완성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이 기억(과거)과 욕망(미래)과 그것이 생동하는 현재의 삼중주, 그리고 꿈과 현실과 타자와 주체(여러 주인공들)가 결정체 이미지처럼 서로 누출되어 합일하는 현상학적 시간성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이다. 그러므로 1부 후반부에 이르러 리타와 베티는 몸을 섞지만, 그것은 ‘둘의 사랑’이라기보다 오히려 작위적인 도피로부터 벗어난 ‘서글픈 자기애’라 불러야 할 것이다. “당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요. 당신이 누구인지도 알아요.” 1부 꿈 속의 리타-베티-다이앤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빨간 상상의 방에서 벗어나 새파란 현실로 내려앉을 채비를 마친다.

 

 

3.3.  닻을 내리기 – 진정한 ‘이야기’가 도달한 미지의 섬, 현상학적 시간성의 초월

3.3.1.     카밀라’와 현상학적 시간의 함정

하지만, 우리의 논의에서 ‘카밀라’는 어디로 갔는가? 2부를 상기하자면, 다이앤이 카밀라를 부르는 순간 그녀는 리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단순히 이로부터 그녀가 리타, 베티, 다이앤과 합일된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꿈 속에서 그녀 ‘카밀라’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며 착실히 배우로의 길을 닦아 나가는 다이앤의 환상, ‘베티’조차도 이기지 못하는 내정자, “the girl”로 지칭되는 누군가이다. 꿈조차도 그녀를 하찮게 만들지 못하고, 2부의 다이앤을 깨우는 카우보이 역시 그녀를 뒷받침하는 존재이다. 아담 캐셔 역시 베티에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결국 카밀라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2부에서 카밀라는 몸을 섞으려는 다이앤의 요구에 응하는 듯하다가도 다시 다이앤을 밀어낸다. 카밀라는 『시녀들』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공주와 시녀들과 같다. 그녀는 ‘베티’의 롤모델로서, 다이앤의 또 하나 가능성으로서 통합되어야 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그림의 ‘제목’이자 중심부에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끄는 존재로서 남는다. 심지어 캔버스 밖의 다이앤조차 그림 속 그림에서 그려지고 있는 자신을 찾아내기보다 중앙에 그려진 카밀라에 집착하며 애증한다. 결국 다이앤은 카밀라를 죽임으로써 그림 자체를 찢어버리고, 그 후 잠에 들어 자신의 환상 속에 리타로서 카밀라의 껍데기만을 남기고,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는 카밀라는 베티 자신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상한 형태의 합일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꿈 속의 리타는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비웃는 듯 베티와 리타를 다이앤과 동일시함으로써 다이앤을 현실로 끌어내린다. 즉 꿈 속에서만 보았을 때 리타는 현실에서 잠든 다이앤과, 배우로서 성공해 가는 베티를 모두 자기 자신의 역사이자 가능성으로서, 혹은 기억이자 욕망으로서 ‘살아 있는 현재’ 안에 불러들임으로써 현실에서의 다이앤이 그 자신의 정체성을 통합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하지만 카밀라를 죽이는 순간, 애초에 현실의 다이앤에게 베티로서의 가능성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타자로서 리타도 사라져 버렸다. 그녀에게 희망찬 미래라고는 남아 있지 않다. 현실의 다이앤에게는 자신을 통합하는 데 실패하고, 형사들에게 쫓기는 순간순간을 살며 그저 파편화된 현재의 연속으로서 살다가 차디찬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결국 영화는 첫 장면에서 물리적-객관적 시간성을 배격하는 듯 보이면서도 다시 그것으로 회귀하고 만다. 이것은 카밀라를 죽인 다이앤의 자업자득인가? 하지만 다이앤의 실패는 우리에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킨다. 미래와 자신의 존재 의미, 삶의 목표를 지정해 주는 시대를 넘어, 하나의 삶의 기준 아래 자신의 시간성을 재구성하고 그것을 향해서 흔들림 없이 나아갈 책임이 오롯이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현상학적이고, 실존적인 시대는 사실 얼마나 잔인한가? 한데 섞여 난립하는 과거, 현재, 미래, 꿈과 현실 등을 넘어 스스로의 이야기를 구성하기 전까지 현상학적 시간성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우리를 옥죈다. 다이앤은 현상학적 시간성에서도 물리적 시간성에서도 자신의 근원적인 시간 이해와 삶의 실천적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간성의 미로’에 빠졌다. 이러한 미로는 1부와 2부의 시간선에도 비밀스럽게 녹아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꿈을 상징하는 1부는 리타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다이앤 셀윈’의 정체를 밝히러 가기까지의 선형적 시간관을 따르고 있는 반면, 현실을 상징하는 2부에서는 오히려 현재(카밀라를 청부살인한 뒤 죄책감을 느끼다가, 결국 자살함)와 과거(카밀라를 청부살인하기까지의 과정)를 오가는 비선형적 시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첫 장면이 현실에서 물리적 공간성과 선형적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꿈과 중첩되는, 즉 과거-현재-미래가 융합하는 비선형적 시간관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1부와 2부가 보여주는 뒤바뀐 시간관은 어찌 된 일일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감상자가 작품의 시간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2부를 보면서, 혹은 1부와 2부를 모두 보고 난 후, 감상자는 이성적 존재자라면 거의 본성적으로 1부가 사실 현실의 과거-현재를 오가면서 만들어진 상징 덩어리임을 알게 되고, 이에 따라 1부의 선형적 시간관에 현실의 대상들을, 뒤죽박죽이 된 현실의 비선형적 시간을 덧씌우게 된다. 즉 1부의 선형적 시간관은 우리로 하여금 도리어 비선형적 시간관을 욕망하게 한다. 한편, 2부의 비선형적 시간관은 난해한 이야기의 퍼즐을 끼워 맞추려는, 즉 이야기의 구축에서 트릭으로 뒤섞은 시간선을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상적이고 선형적인 시간관에 맞추어 재배치하려는 우리 이성의 자연스러운 요청에 따르게 된다. 즉 2부의 비선형적 시간관은 우리로 하여금 도리어 선형적 시간관을 욕망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기억과 욕망이 뒤섞인 프로이트적 무의식이 자아 아래 통제되고 조화되지 못할 때 불안과 긴장을 겪게 되듯이, 다이앤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으로 뒤섞이는 현상학적 시간성을 감내하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1부에서 댄은 자신에게 누출된 꿈(현상학적 시간성을 따르는)을 친구에게 발설하자마자 마치 그 대가를 받듯이 걸인, 혹은 광인에게 살해당한다. 그는 어쩌면 과거, 현재, 미래, 꿈과 현실, 잠재태와 현실태, 주체와 타자, 모든 대립되는 존재 양태들이 조화되지 못할 때 불현듯 나타나 개인의 통합성을 산산조각내는 광기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꿈과 현실을 오가는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영화에서, 다이앤은 첫 장면(꿈)에서 나오는 춤추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현실로 누출될 때 즉 뫼비우스의 띠가 다시 한 번 순환을 계속하려 할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광인의 모습을 비춘다. 다이앤은 과거, 현재, 미래가 상호 침투하면서 나타나는 불안을 면역하고 새로운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못한다. 그렇게 하기에는, 사랑하는 카밀라를 대상으로 청부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현실은 너무나 잔혹하다. 이 과정에서 하이데거의 실존적 시간은 힘을 잃고 현상학적 시간성은 실천적인 함의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를 향한 욕망이 현재에서 조화되지 못하면서 그녀의 시간성은 오히려 역행하여 꿈과 현실은 다시 분리되고, 현상학적 시간은 객관적이며 우주론적인 시간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게 된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 이 말과 함께 크리스탈 이미지는 깨어지고 현실의 파편만이 남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상적 현실’, 원자화된 순간들만 남은 현실에서도 역시 뿌리를 잃고 떠다니는 불안, 죄책감, 증오, 사랑, 행복했던 기억, 욕망 등을 미치광이처럼 헤매며 피폐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다시 말하듯 그녀는 현상학적 시간성을 감내할 힘 또한 없다. 이에 따라 현실에서 다시 꿈으로 도피하려던 순간(춤추는 사람들의 현실 누출) 그녀는 아포리아에 빠지고 자살한다.[3]

그러므로 이 영화는 우주론적 시간의 전통 및 기존 영화에서 운동과 시간이해의 불가분한 관계를 비웃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현상학적 시간성이 생활세계의 시간성 자체를 대체하기에는 불충분함을, 특히 실천적 의미에서 현상학적-실존적 이해가 개인에게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 역시 보여 준다. 그리하여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현상학적 시간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그 이면에 물리적 시간의식이 음영처럼 흐를 수밖에 없음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이는 대립적인 존재양태가 크리스탈처럼 공존하며 뒤섞이는 들뢰즈의 시간-이미지의 극단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비연대기적인 시간성 역시 물리적 시간성과 조화될 것이라는 순환에 대한 통찰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떠한 커다란 담론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근대를 지나왔다. 동시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작은 이야기들이 난립하는 다원주의 속에서 불확실성의 불안을 떠안을 현대인에 대한 불온한 전언이기도 하다.

 

 

4.    결론

-리쾨르의 이야기론과 클럽 ‘실렌시오’를 상기하며

이제 이 먼 여정의 끝에 다다라, 우리는 다시 리쾨르의 이야기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리쾨르가 말한 시간의 세 번째 아포리아는 바로 진정한 시간성이란 객관적 시간성과 현상학적 시간성을 넘어서는, 변증법의 ‘합’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한 사상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지 예술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생활세계를 해석적으로 모방한 사건들의 시간을 재구조화함으로써 ‘보이는 것들’을 통해 시간성 이해에 빛을 던져주고, 결국 독자의 삶에 실천적 함의를 가져올 ‘몰락의 에티카’를 요청한다. 즉 이야기는, 시간성, 그리고 그와 불가분한 삶의 의미를 가시화하고, 나아가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우리 삶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시간성과 존재 의미를, 그 오래된 침묵의 입을 틔우는 것이다. 이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글의 분석 대상으로 삼은 궁극적 이유를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얼핏 난해한 듯한 구조와 비현실적인 장면들 속에서 단순한 ‘순간의 연속’으로서 시간을 넘어 ‘현상학적 시간성’을 보이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층위로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초월하여, 객관적/주관적 시간성을 넘어선 진정한 시간성을 모색하는 진정한 ‘이야기’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한 장면을 우리 현재의 의식에 불러오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리타와 베티는 말하지 않는 자노래를 듣는다. 이윽고 심판 같은 낮고 준엄한 음성이 울려퍼진다. “실렌시오! 실렌시오!” 침묵은 고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절망적으로, 베티를 뒤흔든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통하여 시간성과 삶의 의미를 심문할 것이다. 무수한 시간선을 오가며.

 

 


[1] 영원주의에 대하여 –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3계기가 각각 기억, 직관, 기대라는 의식의 3계기에서 성립한다고 말하면서 주관적 시간이해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는 시간이란 공간과 대칭되는 것으로서 인간이 세계를 받아들이는(감성의) 형식이라는 칸트의 시간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칸트의 견해는, 즉 시간을 선험적이고 선형적인 형식으로 보는 것은 시간에 깃든 역사성과 과거, 현재, 미래의 변증법적 운동을 간과하는 것이라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 등의 현상학적 시간이해를 통해 다시금 비판적으로 계승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지금 순간, 즉 현재만이 객관적 세계의 본질로써 점처럼 끝없이 이어지며, 시간은 물리적인 운동을 헤아릴 때만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현재론’의 중요한 지표이다. 근대 물리학에서 시간 개념은 뉴턴의 ‘절대 시간’으로 변형되면서 현재성이 세계의 객관적인 양상이라는 것은 물론 운동 및 변화와 무관하게 흐르는, 절대적인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실재성 역시 주장된다. 하지만 이 글의 초점상 크게 다루지는 않지만, 시간은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일 뿐이라는 라이프니츠의 ‘관계적 시간’을 지나 특수 상대성 이론이 밝혀지면서, 현대는 시간의 비실재성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현재성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관점 상대적일 수 없는데, 그것은 (관성) 지시틀에 따라 상대적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성이 규명되지 않는다면 과거와 미래 역시 실재할 수 없다. 시간은 다만 공간과 유비적인 것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는 마치 공간의 서로 다른 좌표들처럼 똑같은 존재론적 위상을 지니게 된다. 즉,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영원주의는 현재주의 및 현상학적 시간과 여전히 양립 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현재주의와 영원주의를 잇는 또 다른 설득력 있는 논증이 제기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주장한 ‘국소적 현재(local present)’ 개념이다. 인간의 뇌가 인식할 수 있는 시간분해능(식별 가능한 가장 짧은 시간)은 0.1초밖에 되지 않지만 이 동안 빛은 지구 지름을 훨씬 뛰어넘는 거리를 이동하고, 따라서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등한 시간의 진정한 모습을 인식할 수 없다. 즉 현재는 과거, 미래와 구분되게 된다. 이에 따라 로벨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세계에는 ‘국소적 현재’가 존재하며 시간은 흘러간다고 주장한다. 즉 현재론이 주장하는 ‘현재’는 우주적 본질은 아니나 적어도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존재한다. 즉 현재론의 ‘현재성’이 존재자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현재론은 부정되겠고, 만약 그것을 인간의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상정하는 ‘약한 현재론’을 주장한다면 현재론은 영원주의와 양립 가능할 것이다.

또한, ‘시간’이라는 것이 사실 비실재하고,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흐름을 구성하는 것이라 해도, 즉 영원주의가 참이라 해도, 그렇다면 오히려 주관이 시간을 구성하는 과정, 시간에 부여하는 특성, 그리고 그것이 인간 존재의 기반으로서 삶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다르게 말하면 ‘시간의 의미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진다. 즉 ‘지금’은 시간을 ‘구성된 의식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상학적 시간 분석과 그 실천적 적용이 대두되어야 할 ‘시간’인 것이다. 더불어 현상학적 시간 의식을 기반으로 하면 그러한 시간의 비실재성 역시 시간의식을 가진 인간에 의해 타당성을 얻는 것이다.

[2] 한병철, 김태환 역, 『시간의 향기』, 문학과지성사, 2013. p.30.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분석 내용.

[3] 종착지에 가까이 왔으니,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는 이 영화의 구조처럼, 이 글은 또 하나 의문을 제기해 본다. 정말 1부는 다이앤의 꿈이고, 2부는 다이앤의 현실인가? 이와 동시에, 1부는 카밀라의 현실이고, 2부는 카밀라의 꿈일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1부에서 길가와, 베티의 방에서 잠드는 리타를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카메라가 빨간 침대로 빨려드는 연출과 다이앤이 깨어나는 사이의 시간 간격, 그리고 리타가 잠들었다 깨어나는 시간 간격의 차이는 1부와 2부의 편중된 분량 차이로 암시될 수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꿈을 꾸는 주체를 다이앤/카밀라로 상정하는 경우 각각 꿈과 현실은 횡적으로 중첩되고, 만약 다이앤/카밀라의 꿈일 가능성 둘 모두를 열어 놓는다면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꿈과 현실은 (다이앤의 꿈-카밀라의 현실, 다이앤의 현실-카밀라의 꿈) 종적으로도 중첩되면서 또 다른 결정체 이미지를 보여 준다. 더불어,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도 반전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다시금 탈출할 수 없는 미로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