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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림으로서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7, 8권 요약 (2022)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역, 《정치학》, 길, 2017. 기반

다분한 오해석

 

제7권 교육과 최선의 정치체제

제1장 행복

최선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탐구하려면 필연적으로 어떤 삶이 가장 바람직한 삶인지 규정해야만 한다. 최선의 정치체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최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1) 모든 개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2) 공동으로 가장 바람직한 삶이 각 개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삶과 동일한 것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탐구해야만 한다.

우선 외적인 좋음, 신체 안에 있는 좋음, 영혼 안에 있는 좋음이라는 세 가지 부류의 좋음들은 모두 축복받은 자들(makariois)에게 속해야만 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양과 상대적인 우월함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대부분 덕(탁월함)은 어느 정도만 가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부, 재화, 권력, 명성과 같은 것들은 무한한 증가를 추구한다. 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외적인 좋음들은 바로 덕들에 의해 획득되고 지켜지며, 행복한 삶은 바람직한 성격과 생각을 갖추고 외적인 좋음의 획득을 절제하는(metriazousin) 자들에게 더 많이 속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또한 논변(logos)에 기초해서 고찰하는 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아본다. 외적인 좋음은 도구처럼 항상 ‘무엇을 위해’ 유용하며, 과다하면 필연적으로 해를 끼치거나 적어도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가지는 반면, 영혼의 좋음들 각각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유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사물 간의 우월함의 관계에 따라 각 사물의 최선의 상태들 간에도 우월함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영혼이 신체나 소유물에 대해서 단적으로 우월한 것이라면 각각의 최선의 상태 또한 이러한 유비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신체나 소유물 등은 언제나 ‘영혼을 위해서’ 가치 있는 것이고 각자가 덕과 실천적 지혜, 그리고 이것들에 따른 활동(prattein)을 가지고 있는 만큼 각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신은, 외적인 좋음들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 본성에 의해서 행복하고 축복받는 것이라는 증인이다.

앞서 말한 것과 연관하여 행복한 폴리스는 최선의 폴리스이자 고귀하게 행하는 폴리스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폴리스 역시 덕 있는 인간들이 그러하듯 용기, 정의, 실천적 지혜라는 힘을, 속성을 담지해야만 한다. 그리고 물론 누누이 말했듯 덕이 외적인 좋음보다 우월하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최선의 삶과 폴리스들에서 집합적인 최선의 삶이 덕에 따른 활동들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외적인 좋음은 충분히 구비해야 한다는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제2장 정치학과 철학

하지만 아직 개별적 인간의 행복과 폴리스의 행복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둘은 동일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이를테면 한 개인이 부유하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한 폴리스가 부유하면 폴리스 전체가 축복받은 것이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두 가지 점을 고찰해야만 한다. 하나는 폴리스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삶, 그리고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차단된 외국인과 같은 삶 둘 중에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가에 대해서이다. 다른 하나는 폴리스에 참여하는 것이 (모두에게든 어떤 사람에게든) 선택할 만한 것인가와는 무관하게 폴리스의 어떤 정치체제가 최선인가에 대해서이다.

최선의 정치체제는 필연적으로 누구든지 그에 따라 최선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축복받고(makarios) 살 수 있는 질서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삶은 덕을 동반한 삶이라는 데 동의한다 해도, 여전히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삶이 선택할 만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외적인 것들에서 해방된 삶이 선택할 만한 것인지 논쟁을 벌일 수 있다. 이를테면 후자는 어떤 종류의 관조적인 삶이며, 어떤 이들은 이것만이 철학자에게 걸맞은 삶이라고 말한다. 예로부터 덕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삶과 철학적인 삶 두 가지 중에서 명확하게 선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주인의 지배와는 달리 부정의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 자신의 안녕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정치적인 삶만이 인간에게 적합한 유일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덕은 공적인 것들을 행할 때 보다 잘 발휘된다고 본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정치체제 중에서도 주인과 참주 형태를 가진 정치체제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것이라고 믿고 이웃에 대해 주인처럼 지배하는 것이 법과 정치체제의 목표(horos)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견들이 갈리는 까닭에 대부분의 법규들이 마구잡이로 제정되었지만, 그럼에도 법들이 어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주목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전쟁만을 염려하여 군사적인 힘을 촉진하는 법들이 있다. 그런데 정치적 삶과 철학적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어도 최선의 정치체제와 관련해서 폴리스에서 단적인 주인의 지배가 정의로울 수는 없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적합한 사람에게는 주인의 지배를 행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치가의 지배를 행해야 한다. 연관하여 폴리스는 단지 전쟁을 위해서만 조직되어서도 안 되고, 최고의 목적인 행복을 위해서 조직되어야 한다. 폴리스, 인간들의 유, 다른 모든 공동체가 어떻게 좋은 삶과 행복을 공유할 수 있을지 통찰하는 것이 입법가의 임무이다. 그리고 최선의 정치체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을 겨냥하는가는 후에 논의될 것이다.

 

제3장 정치적 삶과 철학적 삶: 제2장에 이어

앞서 말한 것처럼 덕에 따른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에 동의하더라도 그 실천 방식에 관해서는 논쟁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정치가의 삶과 다르고, 모든 삶 가운데 가장 선택한 삶이라 믿으며 관직을 거부한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정치적 삶이 최선이라고 믿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가 잘 행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번영은 행복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편이 각각 어떤 점에서는 옳고, 다른 점에서는 옳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한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 주인의 삶보다 낫다는 것은 옳다. 명령 내리는 주인의 삶은 고귀하지 않다. 하지만 폴리스에서 모든 종류의 관직이 주인임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스에는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정치가의 지배가 필요하다는 점은 앞서 논의했다. 그리고 행복은 활동(praxis)이기 때문에, 정의롭고 절제 있는 사람들의 활동은 고귀한 많은 것들의 완전한 성취(telos)를 가져온다. 따라서 활동하지 않음보다 활동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누군가는 행복이 잘 행위함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최선인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가정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최선인 것이 가장 선택할 만한 것이고, 또 잘 행위하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위험한 사상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선택할 만한 것이 강탈하는 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생각은 참이 아니다.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번갈아가며 관직을 맡는 것이 고귀하고 정의로운 것이며, 누군가가 덕에서 우월하고 또 최선의 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에서 우월할 때에만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정의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덕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 있는 힘 역시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활동적인 삶은 전체 폴리스를 위해서도, 각 개인을 위해서도 최선인 것이다. 하지만 활동적인 삶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아니다. 또한 어떠한 외적인 결실을 얻기 위한 행위만이 활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 완전하고, 그 자체를 위한 목적이 되는 관조와 생각들이 훨씬 더 활동적이라 할 수 있다. ‘잘 행위함’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따라서 어떤 종류의 행동들 역시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립된 폴리스들이 필연적으로 비활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 활동들은 폴리스의 부분들 중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폴리스의 부분들에는 서로에 대해 관계 맺는 수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잘 할동함은 고귀한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도 우주도 자신들에게 고유한 내적인 활동들을 넘어서 그 어떤 외적인 활동들도 하지 않으므로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논의한 바에 근거하여 동일한 삶이 필연적으로 인간 각자에게도, 폴리스에게도 최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제4장 인구: 이상적 폴리스의 크기

이제 우리가 최상의 폴리스를 세울 때 반드시 세워야만 하는 가정들에 대해 논의해 보자. 최선의 정치체제는 적절한 자원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이때 상정하는 자원은 최대한도로 바랄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것도 불가능해서는 안 된다.

우선 시민들의 수와 영토의 크기에 대해 논해 보자. 이는 준비된 재료가 나을수록 기술자에 의한 생산물이 더 좋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정치가나 입법가에게도 적절한 조건에 적합한 질료가 필요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정치적 기술의 자원 중 폴리스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어야만 하고, 어떤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어야만 하는가? 영토 역시 얼마나 커야만 하고,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어야만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한 폴리스는 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폴리스를 구성하는 수뿐만 아니라 능력(dunamis)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또한 폴리스는 최선의 목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임무(ergon)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최대한으로 성취할 수 있는 폴리스가 가장 ‘큰 폴리스’이다. 말하자면 ‘큰 폴리스’와 단순히 ‘인구가 많은’ 폴리스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폴리스의 크기에서의 우월성은 때로 큰 폴리스의 징표가 되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인구가 많은 폴리스가 잘 통치되기는 어렵고 아마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잘 통치되는 폴리스는 인구의 크기를 잘 조절해야 한다. 법(nomos)은 어떤 종류의 질서(taxis)이고, 좋은 법(eunomia)은 필연적으로 좋은 질서(eutaxia)여야 하지만, 극도로 지나친 수는 질서에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 전체 우주를 함께 붙들어 매는 신적인 힘의 일일 뿐이다. 아름다움 또한 질서와 밀접한 것이고 따라서 폴리스도 한계(horos)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폴리스의 크기는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어떠한 적도(metron)를 가진다. 폴리스는 너무 적은 사람으로 구성되면 자족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으로 구성되면 하나의 정치체제를 갖춘 폴리스가 되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최소한의 폴리스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공동체로서 ‘잘 삶’과 관련하여 자족할 수 있을 만큼의 수로 구성되어야 한다. 수적으로 이를 초과하면 보다 ‘큰 폴리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한정 증대될 수는 없다. 폴리스의 크기가 증대될 수 있는 한계는 폴리스 전체를 한눈에 쉽게 살펴볼 수 있는 범위이다. 폴리스의 활동에서 재판의 사안에 대해 판단하고 가치에 따라 관직을 분배하기 위해 시민들 각자는 다른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아야만 하는데, 폴리스가 너무 커져 시민들이 서로를 알지 못하게 되면 관직 분배나 판단이 나빠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자족성을 줄 수 있고, 한눈에 쉽게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폴리스 인구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5장 영토

영토 또한 비슷한 사안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영토의 종류에 대해서도 가장 자족적인 것을 찬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족적인 영토란 모든 것을 산출해 내면서 아무것도 (외부로부터)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영토는 거주민들이 자유롭고 절제 있는 방식으로 여가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커야만 한다. 이에 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면서 더 정확하게 검토될 수 있다. 또한 영토의 외형은, 적들이 침입하는 것은 어려운 반면 시민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은 쉬워야만 한다. 또한 사람의 수가 한눈에 쉽게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한계 내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바와 같이, 영토 역시 쉽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영토 전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계 내에 있어야 한다. 또한 방어를 위해 모든 지역으로의 접근 통로가 잘 구획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폴리스는 수확된 곡물, 목재 등과 같은 다른 생산품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교통 체계가 원활하게 잡혀 있어야 한다.

 

제6장 시장과 해군의 힘

바다와의 연결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잘 통치되는 폴리스에 유익한지 해로운지에 대해서는 논쟁적이었다.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역 상인들이 수출입을 위해 바다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법 아래서 성장한 외국인들을 허용하게 되는 것은 잘 통치되는 것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만약 인구가 과다하게 되거나, 외국인을 폴리스 내에 허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안전을 위해서도 필수품을 손쉽게 공급받거나 수출하기 위해서도 폴리스의 영토가 바다와 연접해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법률은 어떤 사람들이 서로 간에 섞이지 않아야만 하고 어떤 사람들과 섞일 수 있는지를 규정함으로써 항구를 개방하는 피해를 막아야 한다.

한편 이와 연관된 해군력과 관련해서 그것은 두려운 대상이자 부두 도시 및 폴리스 사람들, 그리고 다른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만약 폴리스가 지도적 위치의 삶과 정치적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러한 삶의 방식에 적합한 해군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폴리스는 반드시 선원들을 시민들로 구성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폴리스가 작다고 해서 선원들도 반드시 적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여 영토, 바다, 해군력과 관련해서 적당히 규정한 것으로 해 두자.

 

제7장 기후와 성격

이제 시민들이 어떤 본성을 가져야만 하는지 논해 보자. 우리는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의 폴리스를 살펴봄으로써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유럽 민족들은 무모한 용기(thumos)는 충만하나 지성(dianoia)과 기예에서 부족하다. 한편 아시아의 민족들은 지성적 영혼과 기예에서는 숙련되어 있어나 기개가 부족해 노예로 머문다. 하지만 헬라스의 종족은 그 양쪽의 기질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자유로우면서 최선의 방식으로 통치되고, 만약 이들이 단일한 정치체제 하에 놓인다면 다른 모든 폴리스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헬라스 내에서도 양쪽 기질이 잘 혼합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서로에 대해서도 지배할 사람과 지배받을 사람이 나뉜다.

어쨌든 사람들이 입법가에 의해 덕으로 쉽게 인도될 수 있으려면 이처럼 본성적으로 기개 있고 지성적이어야 한다. 수호자들은 아는 자들에 대해서는 애호적이지만 모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나워져야 하는데, 이렇게 할 수 있게 만드는 영혼의 능력이 바로 기개이다. 또한 기개는 지배하는 것이고 굴복당하지 않는 것이기에 지배와 자유로움 역시 기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수호자는 모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나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정의한 사람들에게만 사나워야 한다. (따라서 폴리스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또한 지성적이어야만 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얼마나 있어야만 하고 본성적으로 어떤 성질을 가져야만 하는지, 영토의 크기와 성질을 어떠해야만 하는지 충분히 규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안들에서 이론적 논의(logos)가 필요한 문제들과 같은 정도의 엄밀성(akribeia)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제8장 폴리스의 부분들과 필수 불가결한 것들

폴리스는 최선의 가능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비슷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최선의 것은 행복이고, 행복이란 덕의 활동(energeia)이자 완전한 발현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조금만 혹은 전혀 참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여러 다른 삶과 다른 정치체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폴리스를 위해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것들이라 해도, 그것들이 폴리스의 부분이라는 사실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재산은 폴리스에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리스의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폴리스에 필수 불가결한 것들이 무엇이고 얼마나 있는지 검토해야만 한다. 우리가 폴리스의 부분이라 부르는 것들이 이것들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폴리스의 과업(ergon)들의 수를 확정함으로써 이것으로부터 부분들의 수를 분명하게 도출해야 한다.

우선 폴리스에는 당연히 음식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다. 삶은 여러 도구를 필요로 하니 말이다. 또한 무기 역시 필요하다.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나 그들 자신에게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려는 외부의 적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자신과 전쟁을 위해 필요한 정도의 부, 그리고 종교적 문제에 대한 관장 역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유익한 것과 서로 간의 관계에서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 내리는 과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업들은 모든 폴리스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인데, 폴리스는 아무렇게나 모인 다중이 아니라 삶과 관련해서 자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 빠져 있다면, 이 공동체는 단적으로 자족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폴리스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활동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즉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일정한 만큼의 농민, 기술자들, 군인들과 부유한 자들, 사제들, 여러 필요한 사안들에 대해 판단하고 공공의 유익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제9장 사회적 역할과 재산

이러한 문제들이 규정되었으므로, 이제 (1) 모든 사람이 이 과업 활동의 모든 것을 공유해야만 하는지, 혹은 (2)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각의 과업들에 할당되어야만 하는지, 혹은 (3) 필연적으로 이 과업들 중에 어떤 것은 제한되어야 하고 다른 어떤 것들은 공유되어야 하는지 고찰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앞선 권들에서 계속 검토한 바대로, 이것은 모든 정치체제에서 동일하지 않다. 이것은 정치체제들을 다르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를테면 민주정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참여하지만 과두정에서는 그 반대이다.

또한 우리는 최선의 정치체제를 고찰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최선의 정치체제는 폴리스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고 덕이 없는 행복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게 통치되는 폴리스와 단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을 소유한 폴리스에서 시민들이 비천한 장인이나 상인의 삶을 살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러한 삶은 덕에 반대되는 것이다. 또한 시민이 될 사람들은 농민일 수도 없다. 여가는 덕을 계발하기 위해서도, 정치적인 활동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폴리스는 군사적인 것과 유익한 것 및 정의로운 것에 판단하는 요소를 포함해야 하고, 이것들은 그 무엇보다도 폴리스의 부분임이 명백한데, 이 경우 서로 다른 직무들을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여해야만 하는지 아니면 이 두 가지를 동일한 사람에게 부여해야만 하는지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명백하다. 이 직무들은 어떤 방식에서는 동일한 사람에게 주어져야만 하고, 다른 방식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즉 두 직무들 중 심의하고 판단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고 군사적인 것에는 힘이 필요하므로 각각 정점의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직무들은 이러한 판단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한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지배받는 채로 남아있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러한 이유에서 이 직무들은 동일한 사람에게 주어져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직무 둘 모두를 동일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정치체제를 살펴보면 그것은 꼭 동시적인 것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힘은 자연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속하고 실천적 지혜는 나이가 더 든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식으로 양쪽에 분배하는 것이 유익하고 또 정의로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치(axis)에 따른 나눔이다.

더불어 재산 역시 이들에게 속해야 한다. 이들은 시민이고, 시민들은 충분한 재원을 가져야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폴리스를 행복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폴리스의 모든 부분이 행복할 때인데, 행복은 필연적으로 덕을 동반하지만 기술공과 장사꾼 등은 덕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은 최선의 정치체제의 부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앞서 말한 자들, 즉 군인, 재판관, 심의하는 자들이 시민들이고 이들에게 재산이 속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남아 있는 계급은 사제 계급인데, 이들의 질서 역시 명백하다. 농부도 기술공도 사제로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 신들은 시민들에 의해 영예를 받아야만 하고 시민체는 무기를 지닌 집단과 심의하는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폴리스에 필수 불가결한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이와 구분하여 폴리스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논하였다. 정리하자면 농부들, 기술자들, 임금노동자 전체 계급이 폴리스에 속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폴리스의 부분들은 무기를 지닌 사람들과 심의하는 사람들이다.

 

제10장 공동 식사 제도와 땅의 분배

폴리스가 별도의 계급(genos)으로 나누어져야 하고 군인 계급이 농민 계급과 달라야만 한다는 것은 많은 법 전통에서 발견된다. 또한 공동 식사 제도 역시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은 삶의 우아함과 풍부함에 이바지하는 것들이다.

앞서 토지가 무기를 소유한 자들과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속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어떤 종류의 토지가 얼마나 많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이제 토지의 분배와, 경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종류의 사람이어야만 하는지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그 사용에서는 친구들에게 걸맞은 방식으로 공동의 것이어야 하고, 시민들 누구에게도 음식이 결핍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관련하여 공동 식사는 잘 조정된 폴리스에 속하면 유용하다는 데 동의한다. 이 구체적인 이유는 이후에 설명할 것이다. 더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시민 모두가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신과 관련된 비용도 폴리스 전체가 공동으로 분담해야 한다.

위의 논의에 따르면 영토를 두 부분으로, 즉 하나는 공동으로 소유하고 다른 하나는 사적으로 소유하도록 나누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 각각도 둘로 나누어야만 한다. 공공 토지의 한 부분은 신들을 위한 공적 예배(leitourgia)를 위해 사용되어야만 하고, 다른 한 부분은 공동 식사의 비용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적 토지의 한 부분은 국경에 가까이 있고, 다른 부분은 폴리스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두 구획의 할당 몫이 각자에게 분배되어 양쪽의 땅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야만 동등성을 고려한 정의에 일치하는 것이고, 접경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전쟁한다면 보다 큰 합심을 이루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어떤 곳에서는 이웃하는 사람들과 접하고 사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맞서는 전쟁에 대해 심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적인 이해가 공정한 심의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토지의 분배에 대해 말하였으니 이제 경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상적으로는 경작하는 사람들이 노예여야 한다. 더하여 그들이 모두 하나의 종족이어서는 안 되고, 높은 기백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이들은 유용할 수 있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차선은 그들이 변경 지역에 사는 비헬라스인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본성은 앞서 말한 바와 유사해야 한다.  이들 가운데 사적 토지에서 일하는 사람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사적 재산이고, 공공 토지에서 일하는 사람은 공동의 재산으로 여겨진다.

 

제11장 시민의 건강과 안전: 폴리스의 위치와 지형

폴리스가 가능한 한 본토와 바다, 전체 영토와 잘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더하여 우리는 이상적인 폴리스의 위치와 지형을 말하기 위해 다음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건강이다. 구체적으로 신선한 공기와 깨끗한 물 등을 포함하고, 동풍 쪽으로 기울어지며 북풍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여 겨울철에 보다 온화한 폴리스 등이 건강한 폴리스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폴리스는 정치적 활동과 군사적 활동에 용이한 곳에 위치해야만 한다. 즉 군사적 수행과 관련해서는 시민들 자신이 쉽게 폴리스 밖을 빠져나갈 수 있으면서도 적들은 접근하거나 폴리스를 에워싸기 어려운 곳에 위치해야만 한다. 또한 전쟁 때를 대비하여 폴리스 안에 자체적인 수원지를 가지거나 충분한 크기의 빗물 저장고를 건설해야 한다. 더불어 잘 계획된 폴리스라면 먹을 수 있는 물과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물을 잘 분리해야 한다.

한편 성채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모든 정치체제에서 공통적으로 유익한 위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언덕 성채는 과두정이나 1인지배정에서 유익하며, 민주정에서는 평평한 지역이 유익하고, 귀족정에서는 여러 개의 강한 요충지를 가지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개인 집의 배치에 관해 말하자면, 폴리스를 구획지어 격자형 도시를 만드는 힙포다모스의 방식은 전쟁을 위한 활동 이외에서는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안전을 보다 고려한다면, 아테네나 네로 황제 이전의 로마 방식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외국군이 폴리스에서 길을 찾아 빠져나가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폴리스는 이 두 가지 배치를 적절이 혼용하는 것이 알맞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전체 폴리스에서 일부 지역은 규칙적으로 잘 구획지어 만들고, 일부는 그렇지 않게 하면 안전(asphaleia)과 아름다움(kosmos)을 모두 신경 쓸 수 있다.

더하여 성벽에 관해서 말해 보자. 용맹한 덕을 내세우는 폴리스들은 성벽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아주 구시대적인 것이다. 성벽이 없는 폴리스들은 외부의 침입으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는 했다. 대등하게 견줄 만한 적에 맞서서 성벽에 의지하는 것은 고귀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공격자의 수적이 우월성이 방어자의 인간적인 덕을 넘어설 수 있기 대문에, 폴리스가 보존되고 해악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면 성벽에 의한 안전을 적절한 전쟁 수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적들이 영토를 쉽게 침입할 수 없도록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벽이 도시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부여하면서도 전쟁의 용도에도 적절한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이 전쟁 수단을 현명하게 이용하고 적들이 공격할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제12장 도시 설계

다수의 시민들이 공동 식사에 할당되고, 성벽에는 파수꾼들의 집이 적절한 간격으로 마련되어야 한다면, 공동 식사 장소 몇몇은 파수꾼들의 집에 구비되어야만 한다. 즉 군인에게는 성벽의 적절한 장소에 공동 식사 장소가 마련되는 것이 좋다.

한편 최고 관직자들과 성직자들을 위한 공동 식사는 사원이 있는 언덕에 있는 것이 좋다. 이 장소는 덕의 위상에 알맞도록 충분히 두드러지는 곳이어야 한다. 한편 이 장소 아래에는 자유로운 아고라가 설립되는 것이 알맞다. 이러한 아고라는 시장이지만 온갖 상거래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아야 하고 물건을 사고 파는 아고라는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이 든 사람의 체육관(gumnasia) 역시 이곳에 위치하여 여러 연령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배자들이 눈앞에 현전하고 있을 때,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진정한 존경심과 두려움을 마음속에 심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덜 중요한 관료들에게는 필수품을 취급하는 아고라(시장) 가까운 곳에 공동 식사 장소가 마련되는 것이 좋다. 이들은 시정 경영(astunomia)이라 불리는 행정적 문제들을 책임지는 자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유인의 아고라는 여가 활동을 위한 것이고, 이 낮은 곳의 아고라는 필수적인 활동을 위해 배치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최선의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으나 행하는 것은 어렵다. 말하는 것은 최고의 바람의 산물이지만, 일어나는 것은 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제쳐 두자.

 

제13장 행복에 대한 논의 재정리

이제 우리는 정치체제 바깥의 문제에서 돌아와 정치체제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폴리스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폴리스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성격의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논해야 한다.

모든 경우에 ‘잘됨’(to eu)을 이루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행위들의 목표(skopos)와 목적(telos)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목적으로 이끄는 행위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들은 항상 서로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그 목표는 잘 세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맞히는 실제 행위해서는 빗나가기도 한다. 한편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목적이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양쪽 모두 빗나가기도 한다. 기예와 학문에서는 이것들 양쪽을 잘 통제하고 있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잘 삶과 행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이룰 수 있는 능력(exousia)이 있으나 운이나 본성 때문에 할 수 없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의 과제는 최선의 정치체제를 탐구하는 것이고, 최선의 정치체제란 폴리스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윤리적 저작에서 행복은 덕의 활동이자 완전한 발현이며, 이때 덕의 완전한 사용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단적인 것이라 정의하였다. 여기서 조건적이라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고, 단적이라는 것은 고귀하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보복과 징벌은 필연적으로 덕스러운 것인데 만약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한편 명예와 풍요를 목표로 하는 행동들은 단적으로 고귀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자와 달리 좋은 것들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적 저작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란 그의 덕을 통하여 단적으로 좋은 것들을 그에게 좋은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가 덕을 사용하는 방식 역시 단적으로 훌륭하고 고귀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의 행복이 외적인 좋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덕에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앞서 말한 것들로부터 어떤 좋음들은 이미 있어야 하고, 다른 좋음들은 입법가에 의해서 공급되어야 함 역시 알 수 있다. 우리는 폴리스의 조직이 운을 통제할 수 있는 좋음들을 확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폴리스의 훌륭함이 운의 과제가 아니라 학문적 앎과 합리적 선택이 되기를 말이다. 폴리스의 훌륭함은 정치체제에 참여한 시민들의 훌륭함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한 인간이 훌륭해질 수 있는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 각자가 훌륭하면 시민들 전체가 훌륭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좋고 훌륭해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본성(phusis), 습관(ethos), 이성(logos)이다. (1)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인간임이라는 본성을 소유해야만 한다. 또한 어떤 종류의 신체와 영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감정과 같은 것은 이후 습관에 의해 변할 수 있다. (2)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경우 본성에 기인한 것은 습관을 통해 나쁜 방향 혹은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중적 경향성을 가진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은 대개 본성에 따라, 소수의 동물들만이 습관에 따라 살아가지만, (3) 인간이 특별한 점은 이성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이성(logos)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인간은 습관과 본성에 거슬러 이성에 따를 수 있다. 이 세 가지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후에는 교육에 대해 논해 보자.

 

제14장 동등성과 교육: 시민을 위한 교육

정치적 공동체는 모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뉘기 때문에, 우리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들이 일생 동안 달라야 하는지, 아니면 동일해야 하는지 논해야 한다. 그들의 교육 역시 이 구분에 상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들과 영웅들이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듯 이들 역시 다르다면, 신체와 영혼과 관련해서 지배자들이 지배받는 자들보다 논란의 여지 없이 명백하게 우월하다면, 동일한 사람이 항시 지배자가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항상 지배를 받는 것이 더 나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따라서 (현실 정체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로 번갈아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받는 데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동등함은 동일한 사람들에게 같음(tauton)을 주기 때문에, 정치체제가 정의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면 그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 지배받는 사람들이 반란을 꾀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다면 지배하는 사람들은 이들 모두보다 강할 정도로 커야 할 텐데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배자가 지배받는 자와 어떤 측면에서 달라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입법가는 이것을 어떻게 달성하면서도 그들 서로가 번갈아가며 지배하고 지배받을 수 있을지 고찰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 대해서는 앞서 고찰한 바 있다. 자연은 종적으로 동일한 것이 한쪽은 더 젊은 부분을, 한쪽은 더 늙은 부분을 갖도록 함으로써 선택(hairesis)을 부여했으며, 후자가 전자를 지배하는 것이 적절하도록 했던 것이다. 누구도 나이 때문에 지배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지배자보다 자신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 역시 적절한 나이에 이르면 그들의 복종을 관직으로 보상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우리는 한 측면에서는 동일한 사람이 지배하고 지배받으면서도, 다른 측면에서는 지배자와 지배받는 사람이 다르다고 말해야만 한다. 젊은이는 지배받고 나이 든 사람은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교육 또한 필연적으로 한 측면에서는 같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앞선 권들에서 말했듯이 장차 잘 지배하려는 사람은 먼저 지배받아야 한다. 행위들의 고귀함은 행위 그 자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수행된 목적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동일한 사람이 먼저 지배받아야만 하고 나중에 지배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인간이 좋은 인간이 되고, 최선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 입법가의 과제가 된다.

그런데 영혼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한 부분은 그 자체로 이성을 가지고 있고, 한 부분은 그 자체로 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성에 귀를 기울일 수는 있다. 이 부분의 덕들에 따라서 우리는 한 인간을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인 욕구적 부분은 전자인 이성적 부분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이성을 가진 부분도 이론적 이성, 실천적 이성 두 가지로 구분된다. 최고의 것을 성취하는 것은 둘 모두를 달성하는 것이다.

삶 전체는 일과 여가, 전쟁과 평화로 나누어지는데, 삶의 활동들 중에서 어떤 것은 필연적이거나 유용한 것이고, 다른 것은 고귀한 것이다. 이 문제들에 관해서도 영혼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일은 여가를 위해서, 필연적이고 유용한 것들은 고귀한 것을 위해서 선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보다 나은 것과 그 목적들을 더 많이 고려하여 입법하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 최선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헬라스에서도 법들이 오히려 통속적인 유용함을 위해 기울어져 있다. 또한 주인이 지배하는 방식보다 자유인에 대한 지배가 더 고귀하고, 더 덕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든 공동으로든, 최선의 것들은 절제, 정의, 지혜라는 동일한 것들이고, 입법가는 이것들을 인간의 영혼에 심어 놓아야만 한다. 주인으로서 지배하는 것은 노예가 될 만한 사람들에 대해서만이다.

정리하여 입법가는 여가와 평화를 위해서, 군사적 사안들 및 다른 입법과 관련된 것들을 조정하는 데 신중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폴리스는 전쟁하는 동안에는 보존되지만, 평화가 도래하면 파멸하게 될 것이다.

 

제15장 일과 여가, 습관과 이성

공동체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인간에게 최선의 목적(여가)은 동일하기 때문에, 또한 이와 동일한 목적이 최선의 정치체제에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여가를 위한 덕들이 반드시 폴리스에 속해야만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의 목적은 평화이고 일의 목적은 여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가 활동을 위한 유용한 덕들 중에서 어떤 덕은 여가 속에서 그 기능을 성취하고, 어떤 덕은 여가를 누리기 위해 일하면서 그 기능을 성취한다. 여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많은 필수 불가결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에는 용기와 인내뿐 아니라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일을 위해서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philosophia)이 필요하다. 그리고 절제와 정의는 이 두 활동에 모두 필요한데, 특히 평화와 여가를 누릴 때 보다 필요하다. 전쟁은 인간에게 정의롭고 절제하기를 강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평화 시에, 여가를 누릴 때 인간은 오히려 오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선으로 행위하려는 사람들, 축복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많은 정의와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이들은 풍부한 좋음 속에서 여가를 누리는 만큼 철학과 절제, 정의가 보다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행복해지고 훌륭해지려는 폴리스는 이러한 덕들을 증진시키고 공유해야만 한다. 따라서 라케다이모니아인들처럼 군사적인 덕과 외적인 좋음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여가를 즐길 때 발휘되는 덕을 무시했던 것이다.

앞서 우리는 본성, 습관,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들 중에서 시민이 가져야만 하는 자연적 본성을 고찰한 바 있다. 이제 시민들을 먼저 이성에 의해 교육해야 하는지 아니면 습관에 의해 교육해야 할지 논의해 보자. 이것들은 서로에 대해서, 최선으로 조화로워져야 한다. 인간은 이성과 마찬가지로 습관에 의해서도 잘못으로 이끌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을 기해 이 문제들을 탐구해야 한다.

우선,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명백하다. 인간 역시 태어남(genesis)은 출발점이고, 끝은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성과 지성(nous)은 우리 본성(자연)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태어남과 습관의 돌봄은 이 목적을 위해 진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논의한 것과 같이 영혼에는 두 부분이 있고 이 부분들의 품성(hexis) 역시 둘이다. 이성이 없는 부분의 품성은 욕구(orexis)이고, 이성이 있는 부분의 품성은 지성이다. 발생적 관점에서 이성을 갖지 않은 부분은 이성을 가진 부분에 앞선다. 감정, 바람, 욕망은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헤아림(logismos)과 지성은 성장하면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영혼의 돌봄에 앞서 육체의 돌봄이 있고, 그 후에 욕구의 돌봄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에 관해 논하자면 욕구의 돌봄은 지성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신체의 돌봄은 영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제16장 성, 혼인과 아이들: 우생학(Eugenics)

따라서 입법가는 남녀가 결합할 때부터 그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들의 신체적 요소들이 어떻게 최선의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먼저 혼인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그들의 생애 기간에 따라 적절한 시점에서, 구체적으로는 생식 능력의 불일치가 없도록 서로 결합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충돌과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또한 입법가는 부모와 자식 간의 나이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그 간격이 지나쳐도,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그 경우 아이들에게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거나 존경심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더불어 너무 어린 사람들이 서로 결합하면 그 자손들의 신체적 발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지양하는 것이 좋다. 부모의 신체적 상태에 대해 말하자면 너무 격렬하게 힘든 일을 하는 운동 선수와 같은 신체 상태와 일하기 적합하지 않은 병약한 상태의 중간이 유용하다. 이렇게 해야 자유로운 사람들의 행위를 지향하기 알맞은 신체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더불어 폴리스의 안정을 위하여 산아의 수는 제한되어야 한다. 이러한 규정을 어긴 사람들은 그 잘못에 적합한 명예의 박탈을 징벌로 가해야 할 것이다.

 

제17장 가정 내에서의 교육

가정 내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주는 것도 신경 써야 한다. 또한 아이들에게는 적합한 운동을 시키는 것이 유용하다. 하지만 신체의 성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단지 게으름을 회피할 수 있는 정도의 운동과 자유인다운 놀이를 시켜야 하지 어떤 강제적인 일을 부여햐는 것은 좋지 않다. 이는 여생의 과업을 위한 길을 닦는 일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놀이의 대부분은 나중에 진지하게 이루어질 노력의 모방이면 좋다. 또한 아이들이 노예와 어울리지 않도록 주의하여 자유인답지 않은 모습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아이들을 위해 일반적으로 누구든 폴리스에서 부끄러운 말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노예적 근성에 속하는 것이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합당한 불명예라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이와 연관하여 꼴사나운 그림이나 이야기 등도 추방해야 한다. 상스러운 조롱이 허용되는 신들의 구역에는 적절한 나이에 이른 사람들만 허용하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젊은이들에게 나쁜 것들, 사악함이나 적대감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어야 한다.

더하여 5세에서 7세에 이를 때까지 두 해 동안 아이들은 자신이 배울 학과를 참관하고, 그 후 교육은 7세부터 사춘기까지, 그리고 사춘기부터 21세까지의 기간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연의 구분에 따른 것이고 이 시기 교육은 (각 나이대에 필요하지만) 자연스럽게 배울 수는 없는, 결핍된 것들을 채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어떤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돌봄(epimeleia)은 공동의 방식에 위임하는 것이 좋을지, 대부분의 폴리스에서 그러한 것처럼 사적인 방식에 맡기는 것이 유익할지, 그리고 이들이 어떤 종류의 돌봄의 방식이어야 하는지 검토해야만 한다.

 

 

제8권 최선의 정치체제에서의 교육과 무시케

제1장 공교육

이렇듯 복잡하기 때문에 입법가에게 젊은이들의 교육이 최대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폴리스에서는 각각의 정치체제에 알맞게 교육되지 않은 젊은이들 때문에 해를 입을 것이다. 각각의 정치체제의 고유한 성격은 통상적으로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지나치면 오히려 정치체제에 해를 입히게 되지만 일반적으로 보다 나은 성격은 보다 나은 정치체제의 원인이다. 모든 능력과 기예는 각각 그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교육되고 습성화되어야 하는 것처럼, 덕의 실천(praxis) 역시 그러하므로 각 정치체제에 적합한 교육이 필수적이다.

폴리스 전체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교육도 하나여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해야 한다. 또한 돌봄도 공공적이어야 하지, 대부분의 폴리스에서 지금 이루어지는 대로 사적이어서는 안 된다. 각자가 자신의 아이들을 사적으로 돌보고, 자신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개별적인 주제들을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동의 것에 대한 훈련은 반드시 공공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시민도 자신이 자신에게만 속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민 모두는 폴리스의 한 부분이므로 폴리스에 속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각각의 부분에 대한 돌봄(epimeleia)은 전체에 대한 돌봄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제2장 교육의 목표

따라서 교육에 대한 입법이 있어야만 하고, 이에 따라 교육은 공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탐구해야 한다. 이 주제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 젊은이들이 덕을 위해서든 최선의 삶, 즉 행복을 위해 동일한 것을 배워야만 하는가, (2) 정신(dianoia)을 계발하기 위한 것이 혹은 영혼의 성품을 위한 것이 교육에 더 적합한 것인가, (3) 삶을 위해 유용한 것들을 훈련해야 하는가, 혹은 덕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들을 훈련해야 하는가, 아니면 특출난 지혜를 교육해야 하는가, (4) 그런데 덕에 이바지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일치하고 있지 못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덕의 훈련에서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용한 것들 중 필수불가결한 것들을 교육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은 자유인의 일과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일로 구분되기 때문에, 모든 유용한 것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일(banausos)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만큼 유용한 일에만 참여하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어떤 일, 기예, 배움이라도 자유인의 신체 혹은 정신을 덕의 활용이나 실천에 쓸모 없게 만든다면 그것들은 비천한 일로 여겨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체를 나쁜 상태에 놓이게 하는 임노동과 같은 일은 비천하다 부르는 것이다. 이것들은 정신에 여가를 남겨 두지 않으며, 정신을 저질스럽게(tapeinos) 만든다.

그런데 자유인에게 적합한 몇몇 배움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까지는 참여하는 것이 자유인답지만 완전성을 위해 너무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면 이 또한 해악에 빠져들 수 있다. 자신, 친구, 혹은 덕을 위해서 행하는 것은 자유인다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라 동일한 것을 행하는 것은 머슴이나 노예처럼 행위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장 음악의 역할

현재 확립된 학과들은 앞서 말한 바대로 삶에 유용한 것과 덕에 이바지하는 것, 두 방향으로 잡혀 있다. 통상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네 가지이다. 쓰기와 읽기, 체육, 시와 음악, 그리고 그림 그리기이다. 쓰기와 읽기, 그림 그리기는 삶을 위해 유용하기 때문에 가르쳐야 하고, 체육은 용기를 북돋아주기 때문에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무시케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이 발생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서 무시케에 참여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을 교육의 한 부분으로 둔 사람들은 자연 그 자체가 올바른 일뿐만 아니라 고귀하게 여가를 누릴 수 있는 능력까지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고귀하게 여가를 누리는 능력이 모든 것이 목표로 하는 행복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해 다시 논의해야 한다.

양자가 꼭 필요하지만 여가를 누리는 것이 일보다 더 바람직하며 목적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여가를 누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탐구해야만 한다. 확실히 그것은 놀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놀이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은 수고와 긴장을 동반하고 놀이는 이러한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놀이는 일하는 것에 더 유용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적절한 시점에(긴장이 있을 때에) 놀이를 사용하도록 신중하게 허용해야만 한다.

한편 여가를 누리는 것 자체는 놀이의 조력이 필요하지 않고, 즐거움과 행복과 축복받은 삶을 포함한다. 행복은 일하는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에게 속한다. 일하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것인 반면, 행복은 하나의 목적으로, 모든 사람은 행복이 고통에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에 동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의 성품(hexis)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최선의 사람은 가장 고귀한 것으로부터 온 최선의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여가 속의 활동에 기여하는 것들을 배우거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러한 배움과 가르침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고, 반면 일을 위한 배움들은 필수불가결한 것들로서 그것들 자체 이외에 다른 것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선행자들이 무시케를 교육에 포함시켰던 것은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며 그것이 읽기와 쓰기처럼 돈벌이나 가정경영, 정치적 활동 등을 위해서 유용하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체육이 건강과 용감함을 위해 유용한 것처럼 유용한 것도 아니다. 남아 있는 것은 무시케가 여가 속의 활동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자들은 그것이 여갓거리이고 자유인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교육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로부터 유용하고 필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인답고 고귀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어떤 교육이 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더하여 유용한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아이들에게 교육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단지 유용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많은 다른 배움들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기 역시 신체상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에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어디서나 유용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원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megalopsuchos)과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가장 덜 어울리는 것이다.

또한 앞선 장들의 논의로부터 (플라톤의 논의와 달리) 습관을 통한 교육이 이성에 의해 교육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는 것, 신체의 교육이 정신의 교육에 앞서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따라서 이것으로부터 아이들이 우선 체육술과 신체 훈련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전자는 신체의 상태를 좋은 질적 상태로 만들어 주고, 후자는 신체의 기능(ergon)을 좋은 질적 상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제4장 신체 훈련

그런데 오늘날 아이들을 돌보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폴리스들조차도 아이들의 신체의 모습과 성장을 훼손하여 그들을 운동선수의 체질(hexis)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힘든 훈련이 용기를 위해 가장 유익하다고 믿고서 아이들을 짐승처럼 만들어 놓은 폴리스도 있다. 아이들의 돌봄은 (군사적 덕이라는) 단 하나의 덕을 향해 행해져서는 안 된다. 게다가 용기는 가장 야수적인 자들에게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유순한 기질에 수반한다.

짐승적인 것이 아니라 고귀한 것이 교육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고귀한 위험에 직면해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야생의 짐승이 아니라 좋은 인간이다. 군사적 덕을 위해 아이들을 지나치게 내몰며 정작 필요한 것들을 교육하지 않으면 이들은 아이들을 참으로 좋은 인간이 아니라 비천한 인간(banausos)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 폴리스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체육술은 아이들이 사춘기에 도달하기까지는 가벼운 훈련만을 부과해야 하고,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강제된 음식 조절이나 혹독한 훈련은 금지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체육 훈련은 사춘기에 도달한 후 다른 교과목들을 충분히 배웠을 때 적절해진다. 정신과 신체를 동시에 전력으로 발휘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신체를 전력으로 발휘하는 것은 정신을 방해하고, 반대는 신체를 방해하니까 말이다.

 

제5장 오락, 성품, 그리고 여가

음악이 어떤 종류의 기능을 갖고 있는지, 혹은 어떤 이유로 음악에 참여해야만 하는지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음악은 (1) 수면이나 음주처럼 놀이나 휴식을 위한 것인가(그것은 이들처럼 ‘걱정을 끝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체육이 어떤 성질의 신체를 형성해 주는 것처럼 음악 또한 올바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습관을 들이면 어떤 성질의 성격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2) 따라서 음악이 덕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바지하는 것인가? (3) 아니면 여갓거리와 실천적 지혜에 이바지하는 것인가?

젊은이가 놀이를 위해서 교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배움은 결국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배우면서는 놀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나이의 아이들에게 여갓거리를 부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완전함(telos)은 불완전한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배움에 들이는 진지한 수고는 그들이 어른이 되고 완전해졌을 때, 그들이 가지게 될 놀이를 위해서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이들이 음악을 배워야만 하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을 통해서도 그것의 즐거움과 배움에 참여할 수 있지 않은가? 아이들이 음악을 배워야만 한다면 그들은 또한 요리 역시 배워야 할 텐데 이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이러한 문제는 음악이 아이들의 성품을 더 낫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무시케가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삶의 기쁨과 여가 활동을 진작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더라도 남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다른 사람의 음악 연주를 들으면서 올바른 방식으로 즐기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악가들을 비천하다고 말하고 남자답지 않다고 말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무시케를 교육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무시케의 기능이 교육, 놀이, 여가 활동 중 어떤 영역에 놓여 있는지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아마도 무시케는 이 세 가지 모두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놀이는 휴식을 위해 있고 휴식은 필연적으로 즐거운 것이며, 여가 활동은 고상한(kalon) 것일 뿐만 아니라 즐거운 것이어야 행복이 동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음악이 매우 즐거운 것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이렇게 기쁨을 주는 힘 때문에 음악을 친교적 회합(sunousia)과 여가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음악을 교육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해가 없는 즐거움은 궁극 목적인 행복뿐만 아니라 휴식과도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최고의 목적인 행복에 도달하는 것은 비록 드물지만, 적어도 자주 휴식을 취하고 놀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음악에서 오는 즐거움 속에서 휴식하도록 하는 것이 젊은이들에게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놀이를 잘못된 이유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는 한다. 놀이의 목적이 흔해빠진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고 목적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감각적 즐거움을 놀이의 즐거움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넘어) 음악의 본성(phusis)이 앞서 말한 유용함보다 영예로운 것인지, 음악으로부터 오는 공통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성품과 영혼에도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 보아야만 한다. 음악 때문에 사람의 성품이 어떤 성질을 띠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멜로디들은 영혼을 감화시키며(enthousiastikas), 감화(enthousiamos)가 영혼의 품성에 영향을 끼치는 격정(pathos)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되기 때문이다.

덕은 올바른 방식으로 기뻐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관련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훌륭한 성품과 고귀한 행동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기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하고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리듬과 멜로디에는 화와 온화함, 용기와 절제 등 모든 다른 성품들의 참된 본성과 가장 큰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들을 때 우리의 영혼이 변화를 겪으니 말이다. 이처럼 유사한 것들에서 고통이나 기쁨을 느끼는 것에 습관을 들인 누군가는 참된 실재물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기뻐하는 누군가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누군가가 무언가의 모상을 보면서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것의 형태 때문에 기뻐한다면, 모상이 아닌 바로 그것 자체를 바라보게 될 때에도 필연적으로 즐거워할 것이다. 시각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희미한 비슷함이 있다.

멜로디(melos) 자체에 성격의 재현물(모방물)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선법(harmonia)의 본질은 상이해서, 서로 다른 성향에 따라 청자는 선법에 반응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리듬 역시 어떤 것들은 보다 정적이고 어떤 것들은 보다 동적이다. 이러한 리듬 중 어떤 것은 더 비천하거나 노예적인 감정의 움직임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어떤 것은 더 자유인에 어울리는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

이로부터 음악이 영혼의 품성에 어떤 성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것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음악이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린아이들은 음악으로 이끌어져야 하고 음악 속에서 올바르게 교육되어야만 한다. 또한 이만한 연령의 젊은이들의 본성은 감미로운 것들을 찾고, 음악은 본성상 감미로운 것들 중 하나이기에 젊은이들에게 어울린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선법과 리듬은 영혼과 어떤 친화성(sunggeneia)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이런 까닭에 어떤 현자들은 영혼이 선법이라거나 영혼이 선법을 가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제6장 음악 교육

여기에서 젊은이들 스스로 노래하는 것과 악기를 연주(cheirourgia)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지 아닌지 논의해야만 한다. 누군가가 스스로 연주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성질을 발전시키는 데 큰 차이를 만들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연주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연주에 대해 훌륭한 판단자가 된다(genesthai)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주 행위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교육해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연주에 참여함으로써 음악을 판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연주에 개입하고 나이가 들었을 때는 연주를 그만두며 젊었을 때 배운 것을 통하여 어떤 멜로디가 고귀한지 판단하고 올바르게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또한 음악이 사람을 비천하게 만든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정치적 덕을 위해 교육받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은 어떤 종류의 멜로디와 리듬을 공유하고, 어떤 종류의 악기로 배움을 받아야 하는지 고찰한다면 논박하기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방식의 음악이 앞서 말한 영혼의 감화라는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음악의 배움은 나중의 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고, 신체를 비천한 수공업자의 것으로 만들거나 군사적 및 정치적 훈련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에서 좋은 것임은 명백하다. 그리고 음악 공부에서 학생들이 전문가들 사이의 경쟁처럼 놀랍고도 색다른 연주를 목적으로 열심히 배우려고 애쓰지 않고, 고귀한 멜로디와 리듬을 즐길 수 있는 정도에 이르기까지만 배운다면 말이다.

위의 논의에서부터 어떤 종류의 도구를 사용하여 음악을 교육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아울로스는 도덕적 성품보다는 종교적인 황홀감을 북돋는 것과 보다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관조함은 배움이 아니라 오히려 정화를 가져온다. 또한 키타라와 같은 전문적이거나 꾸밈을 위한 도구들은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 단지 음악 교육은 젊은이들을 좋은 청강생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을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자들이 그들 자신은 앞서 말한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젊은이들과 자유인들에게 그 사용을 거부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부의 축적을 통하여 더 여가를 갖게 되고, 자신들의 덕에서 원대한 마음이 보다 증대되었을 때, 그것들 모두를 추구하게 되었지만 나중에 덕에 이바지하는 것과 이바지하지 못하는 것을 더 잘 판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러한 도구들은 다시 거부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도구와 연주에서의 전문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품위 없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신의 덕을 위해서 배움을 추구함으로써 비속하게 되지 않아야 한다.

 

제7장 화음과 리듬

그러므로 나아가 우리는 선법(화음)과 리듬에 대해서 탐구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모든 선법과 리듬이 교육에 사용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구별되어서 사용되어야 하는지, 또한 교육의 목적을 위해 종사하는 사람에게도 이와 동일한 구별을 세워 놓아야 하는지 탐구해야만 한다. 우리는 즉 멜로디와 리듬을 통해서 생겨나는 음악이 교육에 이바지하는 힘을 빠뜨리지 않아야 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좋은 멜로디나 리듬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음악을 선택하여 교육하여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개략적으로 논의해 보자.

우리는 멜로디를 성격적인 것, 행위적인 것, 도취적인(감화적인, enthousiastika) 것으로 나눈다. 선법들은 고유하게 이 멜로디들 각각에 대해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우리는 음악이 하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유익함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음악은 교육과 정화(카타르시스)를 위해 사용되어야 만 한다. 그리고 또한 여가 시간을 위해, 휴식(anesis)과 긴장의 완화를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모든 선법이 사용되어야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구체적으로 성격에 속하는 것은 교육을 위해서, 활동에 속하는 것(praktikais)과 감화에 속하는 도취적인 것은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한다. 영혼에 강한 영향을 끼치는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만, 사로잡히기 쉬운 어떤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들 모두는 이러한 음악으로부터 일종의 정화(tina katharsis)를 얻게 되고, 마음의 부담감은 즐거움을 동반해서 가벼워질 것이다. 즉 이러한 음악은 해 없는 기쁨을 줄 것이다.

앞선 논의로부터 여러 선법과 멜로디가 극장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경쟁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극장 관객은 두 종류로, 하나는 자유롭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열등하고 비천한 노동자들이다. 두 종류의 관객 각각의 본성에 고유한 즐거움을 주어야 하기에, 이러한 청중 앞에서 경쟁하는 자들에게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선법과 멜로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말교육을 위해서는 도리아 선법과 같이 성품에 속하는 멜로디만을 사용해야만 한다. 종교적인 황홀감에 빠지게 하고 격정적이게 만드는 아울로스, 프뤼기아와 같은 선법과 멜로디들은 교육에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아 선법과 같이 안정적이고, 용기 있는 성품을 보여 주며 극단 사이의 중간(meson)과 같은 본성을 가진 멜로디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가능한 것과 적합한 것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각자는 각자에게 더 가능하고 더 적합한 것을 맡아야 하는데, 이것들도 자신의 인생 단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테면 오랜 세월을 지낸 사람에게 고조된 선법을 노래하게 하기보다는 긴장이 없는 선법을 추천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적합한 선법은 질서(kosmos)와 교육을 줄 수 있는 것, 즉 중용, 가능성, 적합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에 맞는 것으로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