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Fifth theorem
§6 다섯 번째 정리
The person cannot ascribe a body to himself without positing it as standing under the influence of a person outside him, and without thereby further determining it
그 개인(Die Person)은 신체를 그 외부의 한 개인의 영향 아래 서 있는 것(stehend)으로 정립하지 않고는,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을[신체를] 보다(weiter) 규정하지 않고는, 어떠한 신체도 자신에게 귀속시킬(zuschreiben) 수 없다
Proof
증명
(I) According to our second theorem, the person cannot posit himself with consciousness, unless he posits that there has been an influence upon him. The positing of such an influence was the exclusive condition of all consciousness, and the first point to which the whole of consciousness was attached. This influence is posited as having been exercised upon the particular person, the individual, as such; for, as we have demonstrated, the rational being cannot posit itself as a rational being in general, but only as an individual; thus an influence that the rational being posits as having been exercised upon itself is necessarily an influence upon the individual, since for itself the rational being is and can be nothing other than an individual.
(I) 두 번째 정리에 따라(zufolge), 그 개인은 자신을 전혀[결코, gar nicht] 의식을 갖고[의식을 가진 것으로, mit Bewußtsein] 정립할 수 없다. 그가[그 개인이] 그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영향(Einwirkung)이 있었다고(sei) 정립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영향의 정립은 모든 의식의 배타적인(ausschließende) 조건이었고, 그것에 의식 전체가 묶이는(angeknüpft) 첫 번째 점이었다[의식 전체의 실마리였다]. 이러한 영향은 그 규정된 개인(bestimmte Person), 그 개체(das Individuum), 그러한 것(als solches)에게(auf) 행사된 것으로[수행된 것으로, geschehen] 정립된다. 제시되었던 바처럼,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을 어떠한 이성적 존재자 일반으로[일반적인 이성적 존재자로, Vernunftwesen überhaupt] 정립할 수 없고, 오직 개체로서만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성적 존재자가 그 자신에게 가해진 것으로 정립한 영향은 필연적으로 그 개체에게 가해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성적 존재자는 그 자신에게 한 개체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According to the proofs carried out above, to say that a rational being has been affected is to say that its free activity has been canceled in part and in a certain respect. Only through this cancellation of its free activity does an object come to be for an intelligence, and only thereby does such an intelligence infer that something exists that is not due to itself (or to its activity).
마찬가지로(gleichfalls) 위에서 수행된 증명에 따라, 한 이성적 존재자에게 작용된다는(gewirkt) 것은[한 이성적 존재자가 작용받는다는 것은] 그의 자유로운 활동성이 부분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관점[특정한 고려, gewissen Rücksicht]에서 지양된다는(aufgehoben) 것을 의미한다. 우선 이러한 지양을 통해서 비로소[이러한 지양을 통해서만] 지성(Intelligenz)에게 객관이 존재하게 되고, 그[지성]에 의해 현존하지 않는 어떠한 것을 추론한다(schließt auf).
Thus to say that a rational being as an individual has been affected is to say that an activity that belongs to it as an individual has been canceled. Now the complete sphere of the rational being's activity, as an individual, is its body; thus, the efficacy in this body, the capacity in it to be a cause merely by means of the will, would have to be restricted, or - more concisely - an influence would have to have been exercised upon the person's body.
그러므로 개체로서 그 이성적 존재자가 작용받는다는 것은, 개체로서 그에게 속한 활동성이 지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 개체로서 그의 활동성의 전체(umfassende) 권역은 그의 신체(Leib)이다. 그러므로 이 신체 안에서의 작용성, 순전히 의욕에 의해 [한] 원인이 되는 그[신체] 안의 능력(Vermögen)은 제한되거나(gehemmt) 혹은 짧게 말해, 그 개인의 신체에 작용되어야만 할 것이다.
If in consequence of this, one were to assume that an action belonging to the sphere of the person's possible actions were canceled or rendered impossible for the moment, then the required influence would be explained.
만약 그 결과로(demzufolge), 누군가 그 개인 자신의 가능한 행위들(Handlungen)의 권역 안에 놓여 있는 [어떠한] 행위가 지양되었다고, 그 순간(Augenblick)에는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전제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요구된 영향(Einwirkung)은 해명될(erklärt) 것이다.
But the person is supposed to attribute this influence to himself; he is supposed to posit the momentarily canceled activity as one of his own possible activities in general - as contained within the sphere of the expressions of his freedom. Thus the person must posit this activity, in order to be able to posit it as canceled; accordingly, the activity must really be present, and by no means can it be canceled. (It would be wrong to say, for instance, that the person could have previously posited this activity as his own, and could now - by running through the sphere of his present freedom - recall that, if his freedom were whole and complete, he would have to possess a further determinate capacity that he in fact does not. For, apart from all the other reasons why this presupposition is untenable, we are dealing with the moment to which all consciousness is attached and prior to which no previous consciousness may be presupposed.)
하지만 그 개인은 발생한(geschehene) 영향을 자신에게 연관시켜야(beziehen) 한다. 그는 그 순간에 지양된 활동성(Tätigkeit)을, 그의 가능한 활동성 일반 중 하나로 정립해야 한다. -그의 자유의 표현들(Äußerungen) 권역 안에 함유된 것으로. 그러므로 그는 이 동일한 것[이 활동성]을 정립해야만 한다. 오직 이 활동성을 지양된 것으로 정립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그 동일한 것[이 활동성]은 현실적으로 현존해야만 하며, 결코(keineswegs) 지양될 수 없다. (누구도, 이를테면 그 개인이 그 활동성을 분명(ja wohl) 이전에(ehemals) 그의 것으로(ihrige) 정립할 수 있었다고, 또한 지금 그의 현존하는 자유의 권역을 관통(Durchlaufen)함으로써[관통할 때, beim],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이[그의 자유가] 완전하다면(vollständig), 또한 [실제로는] 현존하지 않는, 어떠한 확실한(gewisses) 규정된 능력도 현존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러한 전제(Voraussetzung)의 성립 불가능성(Unstatthaftigkeit)에 대한 다른 근거들을 사유하지 않고[이러한 근거들과 별개로], 우리는 모든 의식이 묶이는(angeknüpft), 어떠한 이전의(ehemaliges) 의식도 전제될 수 없는 순간(Momente)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Thus, if consciousness is to be possible, the same determinate activity of the person must simultaneously, in the same undivided moment, be both canceled and not canceled. Our task is to investigate how this can happen.
그러므로, 만약 어떠한 의식이 가능해야 한다면, 그 개인의 동일한, 규정된 활동성은 동시에, 그 분할되지 않은 순간 속에서, 지양되면서도 지양되지 않아야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untersuchen) 한다[탐구할 것이다].
(II) Any activity of the person is a certain way of determining his articulated body; thus, to say that an activity of the person is restricted means that a certain determination of his articulated body has been rendered impossible.
(II) 그 개인의 모든 활동성은 표현된(artikulierten) 신체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규정(Bestimmung)이다. 그러므로, 그 동일한 것[그 개인]의 어떠한 활동성이 제한된다(gehemmt)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표현된 신체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규정이 불가능해진다는 것.
Now the person cannot posit that his activity is restricted, that a certain determination in his articulated body is impossible, without simultaneously positing that the same determination is possible; for the person posits something as his body, only under the condition that it is possible for him to determine it by his mere will. Thus the very determination that is supposed to be impossible (and precisely insofar as it is supposed to be impossible) would have to be posited by the person as possible; and, since the person cannot posit anything unless it is (for him), the person would actually have to produce this determination. But this activity, even though it is actually produced, must remain continually restricted and canceled, for the person produces it precisely in order to be able to posit it as canceled. Thus we can grasp this much for the time being: this determination of the body's articulation is, in a certain way, actually produced by the will's efficacy, and at the same time - in another way — it is canceled by an influence from outside.
이제 그 개인은 결코 그의 활동성이 제한된다고, 그의 표현된 신체 안에서 어떠한 확실한 규정이 불가능하다고 정립할 수 없다. 동시에 이 동일한 것[규정]이 가능하다고 정립하지 않고서는. 그 안의 순전한 의욕에 의해서만 어떠한 규정이 가능하다는, 오직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그 개인은 어떠한 것을 자신의 신체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가능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해야 하는 바로 그 규정을 가능한 것으로 정립해야만 한다. 또한, 그 개인은 (자신을 위해) 현실적으로 산출하지(hervorbringen) 않는다면 어떠한 것도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활동성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산출된다 하더라도(ohnerachtet), 끊임없이(immerfort) 제한되고(gehemmt), 지양된 채 남아야만 한다. [다만, eben] 그것을[이 활동성을] 지양된 것으로 정립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 개인은 이 활동성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Artikulation)의 규정은 -우리는 당장(vorläufig) 이 정도만 알아챌(ersehen) 수 있는데- 의욕의 작용성에 의해 특정한(gewisse) 방식으로 현실적으로 산출되며, 동시에 외부의 영향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지양된다.
Furthermore - in the moment to be described now, the person is supposed to find himself as free within his sphere, ascribing his body entirely and thoroughly to himself. If the person did not posit that it is at least possible for him to reproduce, through his mere will, the given determination of his body's articulation (even in the sense in which the determination is and remains canceled), then to that extent he could not at all ascribe his body to himself or posit that there has been an influence upon himself - and this contradicts our presupposition. The fact that the person does not cancel the given restriction must depend - in accordance with the assumption of such a restriction - on the person's own free will; and the person must posit that it is possible to cancel the restriction.
더하여 – 현재 기술될 순간 속에서, 그 개인은 그의 권역 안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그의 신체를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durchgängig) 자신에게 귀속시켜야 한다. 만약 그 개인이 주어진 표현(Artikulation)의 규정을, 그것이 지양되고 지양된 채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라도, 순전한 의욕에 의해 최소한 재생산(wieder herstellen)이 가능한 것으로도 정립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한 그 개인은 그 신체를 전혀 자신에게 귀속시키지 못하며, 그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영향도 발생했다고 정립하지 못한다. 이는 전제와 모순된다. 그 개인이 제약[제한, die Hemmung]을 지양하지 않는 것은, 그러한 제약의 상정(Annahme)에 따라, 그 개인의 자유로운 의욕에 달려 있어야만(abhängen) 한다. 그리고 그 개인은 그 제약을 지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정립해야만 한다.
How, then, is the person to posit this possibility? Certainly not as a consequence of previous experience, for what is at issue here is the beginning of all experience. Thus the cancellation of the restriction on the body's articulation, insofar as it occurs, would occur only through the person's positing, out of the production of that determination, in the manner in which the determination is actually produced, provided that the person did not restrain his will from canceling it.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개인은 이러한 가능성을 정립해야 하는가? [이는] 결코 어떠한 선행하는 경험의 결과가 아닌데, 여기서 문제는 모든 경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현(Artikulation)에 대한 제한성(Gebundenheit)의 지양은 그것이 발생하는(stattfindet) 한, 그 개인이 이를(dies) 불러일으키려는 그의 의욕을 제지하지 않았다면(zurückhielte), 저 [신체의 표현에 대한] 규정의 산출로부터, 그 규정이 현실적으로 산출되는 방식으로, 그 개인이 정립함에 의해서만 일어날 것이다(erfolgen).
Now what, then, is actually posited in the situation just described? Evidently, a double manner of determining the body's articulation, which for now might even be called a double articulation, or a double organ, the two sides of which relate to each other in the following way: the first organ (within which the person produces the canceled movement and which we shall call the higher organ) can be modified by the will without thereby becoming the other (which we shall call the lower organ). To this extent, the higher and lower organs are distinguished from one another. But furthermore: if the modification in the higher organ is not to lead automatically to a modification in the lower, then the person must also restrain his will from thereby modifying the lower organ: thus the higher and lower organs can also be unified through the will; they are one and the same organ.
그렇다면 기술된 것이 정립됨으로써, 이제 [도대체] 엄밀하게(eigentlich) 무엇이 정립되는가? [그것은] 명백하게, 표현(Artikulation)을 규정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이는 그 자체로 이중 표현, 혹은 이중 기관(doppeltes Organ)이라 불릴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서로에 대해 관계맺는다. 전자[첫 번째 기관]는 그 안에서 그 개인이 지양된 운동을 산출하고, 우리가 상위의 기관(höhere Organ)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의욕에 의해 조정[변경, Modifikation]될 수 있다. 그로 인해 다른 하나, 우리가 하위의(niedere) 기관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이 되지는 않으면서. 그러한 한 상위의, 그리고 하위의 기관(niedere Organ)은 구별된다(unterschieden). 하지만, 나아가 상위 기관의 조정(Modifikation)에 의해 하위 기관이 동시에 조정되지는 않아야 한다면, 그 개인은 그에 의해[상위 기관의 조정에 의해] 그것이[하위 기관이] 조정되어야 한다는 의욕을 제지해야(zurückhalten)만 한다. 그러므로 상위의, 그리고 하위의 기관 또한 의욕에 의해 통합되며[통합될 수 있으며, zu vereinigen], 둘은 하나이고 바로 그 동일한(ebendasselbe) 기관이다.
Thus the person's perception of the required influence upon him involves the following: The person must tacitly accept the influence, must give himself over to it; he must not cancel the modification that has been produced in his organ. The person could cancel this modification through his mere will, and - if this is not supposed to happen - he must limit the freedom of his will. Furthermore, he must freely and internally reproduce the modification produced in his organ. We have said that a possible expression of the person's freedom is canceled. This certainly does not mean that the person can no longer act in some particular direction or towards a certain goal; it means only that something has been produced in the person that he himself is able to produce, but that is now produced in such a way that he must ascribe it not to his own efficacy, but to the efficacy of a being outside of himself. In general, nothing is found in the perception of a rational being that it does not believe itself capable of producing, or the production of which it cannot ascribe to itself; the rational being has no sense of anything else, and so everything else lies absolutely outside the rational being's sphere. What has been produced in the person's organ is freely reproduced by him through his higher organ, but in such a way that he does not influence the lower organ; for if he did, the same determination would certainly exist in the articulated body, only not as a perceived determination, but as one produced by the person Umrißhimself; not as a determination arising from an external efficacy, but rather as one arising from the subject's own efficacy. For example, a person cannot see if he does not first accept an influence upon himself and then internally reproduce the form of the object, that is, actively construct the object's outline; [similarly,] there can be no hearing if the sounds are not internally imitated by the same organ that produces those sounds in speech. However, if this inner causality should extend as far as the external organ, then the result would not be hearing, but speaking.
그러므로 여기에서 요구되는 영향(Einwirkung)에 대한 지각(Wahrnehmung)에는 다음이 속한다. 그 개인은 그 영향에 대해 암묵적으로 수용해야[침묵으로 일관해야, stille halten]만 하며, 그 영향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내맡겨야 한다, hingeben]. 그 개인은 그의 기관에서 산출된 조정(Modifikation)을 지양해서는 안 된다. 그 개인은 그의 순전한 의욕에 의해 이러한 조정을 지양할 수 있으며, 만약 그 지양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면, 그는 그의 의욕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한다. 더하여, 그 개인은 그 안에 산출된 [그의] 기관의 조정을, 자유를 가지고 내적으로 재현[모방, nachbilden]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의 자유의 가능한 표명(Äußerung)이 지양된다고 말해왔다. 이는 결코 모종의(irgendeiner) 방향(Richtung)과 특정한 목적으로의 활동성 일반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 그 자신이 산출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그 안에 산출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 개인이 그의 고유한 작용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부의 존재자의 작용성을 [그 외부의 존재자에게] 귀속시켜야만 하는 방식으로 산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이성적 존재자의 지각 속에서 자신이 산출할 수 있다고 믿지 않거나, 자신에게 귀속시킬 수 없는 산출은 어떠한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성적 존재자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각도[의미도, Sinn]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schlechterdings) 그의[이성적 존재자의] 권역 외부에 놓여 있다. 그 개인은 그의 기관 안에서 산출된 것을 상위의 기관을 통해 자유롭게 재현하지만, 하위의 기관에는 개입하지[흘러들지, einfließe] 않는 방식으로 그러한데, 만약 그렇지 않으면 표현된(artitkulierten) 신체에 대한 동일한 규정은 분명 단지 지각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산출된 것으로서, 외부에(fremde) 의해서가 아니라 그 주체의 고유한 작용성에 의해 생겨난(entstanden) 것으로서 현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자는[그 개인은] 우선 영향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그 후 객관의 형식이 내적으로 재현되고 그 윤곽(Umriß)이 능동적으로(tätig) 그려지지[구상되지, entworfen] 않으면 볼 수 없다(gesehen werden). 이성적 존재자는[그 개인은] 말(Sprechen)에서 동일한 소리를 산출하는 동일한 기관에 의해 내적으로 소리가 모방되지(nachgeahmt) 않으면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인과성이 외부의 기관까지 뻗어나간다면(fortgehen),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게 될 것이다.
If the situation is as we have described it, then the human being's articulated body is sense. But as everyone can see, the body is sense only in relation to something present in the body that is the product of an efficacy that could have been the subject's own, but that in the present case is instead the product of the efficacy of a cause outside the subject.
그 관계(Verhältnis)가 기술된 것과 같은 한, 인간의 표현된(artikulierte) 신체는 감각(Sinn)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하다시피(einsieht), 신체는 오직 그 안에 현존하는 작용성의 산물, 즉 주체의 작용성일 수 있었지만 현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주체 외부의 어떠한 원인이 가진 작용성의 산물과의 연관(Beziehung) 안에서만 감각이다.
With this kind of influence upon him, the person remains entirely and perfectly free. The person can immediately cancel what the external cause has produced in him; and he expressly posits his ability to do so and thus posits that the existence of such an influence depends solely on the person himself. Furthermore, if there is to be any influence upon the person, then the person must freely imitate it: thus the person expressly realizes his freedom, simply in order to be able to perceive. (With this, by the way, the absolute freedom of reflection has been described and fully determined.)
그 개인은 이러한 종류의 영향(Einwirkung)에서 완전히(ganz) 그리고 완벽하게(vollkommen) 자유롭다. 그는 그 밖의 원인으로부터 그 안에 산출된 것(Hervorgebrachte)을 즉시(sogleich) 지양할 수 있으며, 그가 그 산출된 것을 즉시 지양할 수 있음을 명시적으로(ausdrücklich) 정립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영향의 존재가 오직(lediglich) 그에게 달려 있음을[의존함을, abhänge] 정립한다. 더하여, 만약 그 개인이 영향받아야 한다면, 그는 발생한 작용성을 자유를 통해 모방해야만(nachahmen)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단지 지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의 자유를 명시적으로 실현한다. (반성의 절대적인 자유는 이미 기술되었고, 상세히(ausführlich) 규정되었다.)
Now in this way, the articulated body of the person has been further determined, as was required. It has been posited as sense; and in order for it to be posited as such, a higher and lower organ have been ascribed to it; of these two, the lower organ (through which the body first enters into relation with objects and rational beings outside it) can stand under an external influence, but the higher organ never can.
따라서, 이제 그 개인의 표현된(artikulierte) 신체는 요구된 대로 보다 규정되었다. 그것은 또한 감각으로서 정립되었다. 그리고 그것이[표현된 신체가] 그렇게 정립될 수 있기 위해서, 상위의 그리고 하위의 기관이 그 개인에게 귀속되었다. 그 중 하위의 기관은 그것을 통해 신체가 객관과 그리고 자신 외부의 이성적 존재자와 처음으로 연관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어떠한 외부의 유입[개입, 영향, Einflusse] 아래 있을 수 있지만, 상위의 기관은 결코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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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Fifth theorem
§6 다섯 번째 정리
한 개인은 자신의 신체를 그 외부의 다른 개인으로부터 영향받는 것으로 정립하지 않고는, 그러한 한 자신의 표현된(artikulierten) 신체를 상위 기관(Organ)과 하위 기관이 귀속된 ‘감각(Sinn)’으로 보다(weiter) 규정하지 않고는, 어떠한 신체도 자신에게 귀속시킬(zuschreiben) 수 없다
증명
한 개인의 의욕 아래 신체의 배타적인 귀속과, 자기의식의 유일한 가능 조건인 외부의 영향은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I) §1 첫 번째 정리에 따라,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는 그 개념상 자신을 제약하는 것으로 정립한 객관을, 특정한 방식으로 지양하고자 하는 목적 정립에 따라, 자유로운 작용성을 가하는 한에서만, 한계지어진 동시에 자유롭다고 불릴 수 있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와 같은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를 상정한다면, 자아의 제한성을 만드는 객관의 정립과, 자신 안에 목적이라는 최종 근거를 두고 객관을 향하는 자유의 작용은 상호 불가분한 것으로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달리 말해,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자기의식의 조건은 객관에게 가해지는 것으로서 작용성과, 작용성이 가해지는 것으로서 객관의 동시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에게 어떠한 작용성을 귀속시키지 않는 한 어떠한 객관도 정립할 수 없지만, 또한 그러한 작용성이 가해지는 어떠한 객관이 정립되지 않는 한 어떠한 작용성도 자신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는 순환적인 그림을 낳는다. 피히테는 이 귀결이 논리적 동시성의 차원에서 자기의식의 발생적 차원으로 넘어간다면 시간축이 들어오면서, 지금 시점의 객관이 선행하는 작용성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그 선행하는 작용성은 객관과 함께 정립되었을 수밖에 없으며, 다시 그 객관은 선행하는 작용성에 조건지어지는 식의 무한 퇴행의 문제에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에 따라 그는 §3 두 번째 정리에서, 한 주체에 가해지는, 주관과 객관의 종합을 요구하는 객관의 충돌, 객관이지만 또한 주체의 자유로운 작용성을 열어 보여주는 타자의 영향만이 주체로 하여금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로서 최초의 자기의식을 가능케 할 수 있음을 논증한다. 주관과 객관의 종합, 즉 자신이 한계지어지는 동시에 그것을 지양하기 위한 작용성을 행사해야 한다는 요구만이 무한 퇴행을 종결하는, 자기의식이 가능해지는 최초의 점일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한 개인’이 외부로부터 받는 최초의 ‘영향’이다. 또한,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일 것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이러한 영향의 사태는 이성적 존재자들 사이에서만 비로소 가능할 터이다. 즉, 영향이 가해지는 대상과 그 영향의 원인은 이성적 존재자여야만 한다. 따라서 §1과 §3에 따라, 한 개인은 그 외부의 이성적 존재자로부터의 영향을 정립하지 않고는 자기의식을 정립할 수 없다. 그러한 영향의 정립은 의식 전체가 묶이는 배타적인 가능 조건이다.
이때, 이러한 영향은 ‘일반적인’ 이성적 존재자가 아니라, 한 ‘규정된’ 개인에게 행사된 것으로 정립되어야만 한다. 이성적 존재자는 그 자신에게 한 특정한 개체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일 수 없으므로, 자신을 이성적 존재자 일반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개체로서만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이성적 존재자가 그 자신에게 가해진 것으로 정립한 영향은,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 개체에 가해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를 전제로 하여, 한 개인이 영향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성(작용성)이 어떠한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지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개인이 이성적 존재자로서 가진 절대적 자유의 이러한 지양에 의해, 비로소 자아에 의해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서 객관이, 그리고 앞서 서술한 것처럼 개인의 자유로운 작용성 역시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5에서 연역한 바에 따라, 상호 인정하는 각 주체에게 자유로운 활동성의 전체 권역은 구체적으로 객관의 속성인 물질적 제한성을 지니면서도, 한 주체의 의욕에 의한 배타적이고 무한한 가변성을 지닌 그의 신체(Leib)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영향받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여 이 신체 안에서의 작용성, 순전히 의욕에 의해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원인이 되는 그의 능력(Vermögen)이 제약된다(gehemmt)는 것이며, 그 개인의 가능한 행위들의 권역 안에 놓여 있는 어떠한 행위가 적어도 그 순간에,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자기의식을 위해 요구되는 영향의 전모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개인이 영향이 발생함과 동시에 그 영향을 자신의 활동성과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개인은 그가 외부의 이성적 존재자로부터 영향받는 바로 그 순간에, 그의 가능한 활동성 일반 중 하나를 오로지 정립되는 동시에 지양되기 위하여 정립해야 한다. 그 누구도 이 특정한 활동성이 지양되기 ‘이전에’ 그 개인의 활동성으로 정립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개인이 외부 이성적 존재자로부터의 영향을 정립하는 바로 그 순간은, 어떠한 이전의 의식도 전제될 수 없는, 모든 의식이 묶이는 가능 조건으로서 그 구체적 개인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자기의식이 가능하다면, 즉 어떠한 개인이 그 외부의 이성적 존재자로부터 영향받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개인의 특정한 활동성은 한 동일한 순간 속에서 지양되면서도 지양되지 않아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역설이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를 탐구할 것이다.
지각을 가능케 하는 상위 기관과 하위 기관, 양자가 귀속된 감각(Sinn)으로서의 신체, 역설의 해결
(II) 한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성의 권역은 그의 신체와 동치이며, 그의 자유의 표명은 곧 그의 신체의 표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한 개인의 활동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다시 쓸 수 있다. 한 개인의 모든 활동성은 표현된 신체의 특정한 규정이다. 그러므로, 그 개인의 어떠한 활동성이 제약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표현된 신체의 어떠한 특정한 규정이 불가능해진다는 것. 하지만 (I)의 내용에 따라, 그 개인은 동시에 그의 어떠한 활동성, 즉 표현된 신체의 특정한 규정이 가능하다고 정립하지 않고는 그러한 규정이 불가능하다고 정립할 수 없다. 그는 오직 그 활동성을 지양된 것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동시에 이 활동성을 현실적으로 산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활동성은 그 개인에 의해 현실적으로 산출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제약되고, 지양된 채 남아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표현된 신체의 이 특정한 규정은 그 개인의 작용성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적으로 산출되며, 동시에 외부의 이성적 존재자의 영향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지양된다.
하지만, 한 개인은 어떤 것이 그의 순전한 의욕에 의해서 규정 가능한 한에서만 그것을 자신의 신체로 귀속시킬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기술되는 순간 속에서 그 개인이 자신을 그의 행위들의 권역 안에서 배타적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즉 그의 신체를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 자신에게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그 개인에게 어떠한 활동성, 표현된 신체의 특정한 규정이 지양된 채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최소한 자신의 순전한 의욕에 의해 재생산(wiederherstellen) 가능한 것으로 동시에 정립해야만 한다. 즉, 그 개인은 외부의 영향에 의한 활동성의 제약을 지양 가능한 것으로 정립해야만 하며, 그 제약을 지양하지 않는 것은 그 개인의 자유로운 의욕에 달려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개인은 자유의 권역으로서 그의 신체를 자신에게 귀속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어떠한 자유로운 활동성도 산출할 수 없고, 결국 그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영향도 발생했다고 정립하지 못할 터이다. 정리하자면, 이는 앞서 말했듯이 어떠한 선행하는 경험의 결과가 될 수 없는, 모든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을 다룬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자기의식은 신체의 표현에 대한 특정한 규정이 그의 순전한 의욕에 의해 현실적으로 산출되는 동시에 지양됨으로써, 또한 동시에 그러한 제한성을 지양하지 않는 것, 또는 다시금 지양하는 것이 그의 순전한 의욕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정립됨으로써 발생한다.
이로써 비로소 신체의 표현을 규정하는 두 가지 방식이 정립된다. 동시에 이들은 이중 기관(doppeltes Organ)이라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에 대해, 그리고 신체와 의욕의 연결, 그 개인의 모든 활동성을 위해 복무한다. 하나는 이를테면 상위 기관(höhere Organ)으로서, 지양되는 운동을 산출하고, 순전히 의욕에 의해 조정[변경, Modifikation]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위의 기관(niedere Organ)이라 말할 수 있으며, 신체를 외부 객관 및 이성적 존재자와 연관 맺게 하는 최초의 접점으로 어떠한 외부의 유입[개입, 영향, Einflusse] 아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에 따라 하위 기관이 상위 기관과 동시에 조정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이는 결코 하위 기관이 의욕과 무관하게 외부의 영향 아래 온전히 놓여 있음을 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떠한 신체는 한 개인의 순전한 의욕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그 개인의 신체일 수 있다는 개념에 따라, 그러한 상이한 조정 역시 그 개인이 하위 기관을 함께 조정하고자 하는 ‘의욕을 제지하는 데’ 달려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상위 기관과 하위 기관은 근본적으로 의욕에 의해 분리되는 동시에 의욕에 의해 통일될 수 있는 바로 그 동일한 기관이다.
그러므로 외부의 영향에 대한 한 개인의 ‘지각(Wahrnehmung)’이란 다음을 의미한다. 그 개인은 우선 외부의 이성적 존재자로부터의 영향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 즉 그 영향을 지양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수용한다는 것. 그 후 객관의 형식을 내적으로 자유롭게 재현한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그 개인은 자신의 의욕에 의해 그러한 외부의 영향을, 다시 말하여 외부의 이성적 존재자에 의해 그의 하위 기관에 산출된 조정을 지양할 수 있으며, 다만 그의 의욕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한하여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앞서 말한 역설을 재조명한다면, 한 개인의 어떠한 자유의 표명(Äußerung)이 지양된다는 것은 그에게 특정한 목적으로의 활동성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개인이 고유한 작용성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방식 대신 그 외부의 작용성을 그 외부의 존재자에게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어떠한 작용성을, 즉 그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영향(Einwirkung)을, 현실적으로 산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이성적 존재자의 지각 속에는 자신에게 귀속시킬 수 없거나 귀속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산출은 어떠한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즉,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이성적 존재자의 권역 외부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는 그의 하위 기관에서 산출된 것들을 상위의 기관을 통해 자유롭게 재현하지만, 동시에 하위 기관의 조정에는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상위 기관을 그렇듯 조정함으로써, 그 개인의 고유한 작용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산출된 것으로서 ‘영향’을 산출한다. 즉, 한 개인이 외부에 의해 산출된 것으로서 그 자신 산출한 작용성이 바로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지각’이다. 따라서 상위 기관과 하위 기관이라는, 신체의 표현을 규정하는 두 상이한 방식이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로서 그 개인의 산출 아닌 산출을, 그 개인의 산출이면서 동시에 외부 존재자의 산출로서 지각을 가능케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외부의 영향을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그 객관의 윤곽이 내적으로, 능동적으로 그려지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또한, 우리는 말을 산출하는 그 동일한 기관에 의해 내적으로 소리가 모방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한편, 의욕에 의한 이러한 내적 인과가 외부 존재자의 기관에까지 뻗어 나가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우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의 표현된 신체는 이렇게 보다 규정된다. 신체는 감각(Sinn)이다. 지각을 가능케 하는 상위 기관과 하위 기관이 귀속된 것으로서. 오직 주체로서 한 개인 외부의 어떠한 원인이 가진 작용성의 산물, 즉 외부의 영향(Einwirkung)으로서, 그 개인이 가진 기관의 조정(Modifikation)과의 연관 하에 있는 한.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개인은 이러한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그 외부 원인에 의해서 그 안에 산출된 것을 즉시 지양할 수 있고, 지양하지 않기로 의욕을 제지하는 것 역시 그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즉 그 영향의 존재 자체가 그 개인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개인은 단지 지각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도 외부 영향, 즉 제한성 안에서의 절대적 자유라는 긴장을 초극하고,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책무를 명시적으로 실현해야 하며, 이를 통해 비로소 의욕과 표상의 결합으로서 개인의 자아는,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자기의식은 존재하기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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