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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림으로서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3권 요약 (2022)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역, 《정치학》, 길, 2017. 기반

다분한 오해석

 

제3권 폴리스와 정치체제

 

제1장. 시민의 정의: 관직과 판결에 참여해야만 한다

정치체제(들)의 본성이 무엇이며 어떠한 특성들을 가졌는지 탐구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폴리스’란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폴리스의 개념은 논쟁적이고, 정치가와 입법가가 다루는 모든 사안은 폴리스와 관련되어 있으며, 정치체제란 폴리스의 질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폴리스는 시민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결국 ‘누가 시민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태생이 아닌 다른 이유로 시민이 ‘된’ 자들인 거류 외국인이나 전성기가 지난 시민인 노인들, 아직 불완적한 시민인 아이들은 논의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요약하자면 ‘단적인’ 시민은 판결과 관직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 정의된다. 이때 이 관직은 임기 제한이 없는 관직에만 한정된다. 정치체제들은 종적으로 서로 다른데, 올바른 정치체제들은 본질적인 반면에 잘못된 정치체제들은 파생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관직에 참여하는 자가 시민인지는 각 정치체제에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숙고하고(심의 및 의결하고) 판결하는 관직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 바로 그 폴리스의 시민인 것이다. 그리고 폴리스는 그러한 사람들이 살므이 자족을 위해 충분한 만큼 모인 집합이다.

 

제2장. 시민의 조건

하지만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시민의 정의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부모가 시민인지, (정치적 힘에 의해서) 부정의하게 시민이 된 자들 역시 시민인지 등의 문제가 시민의 정의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는 조상이 지금의 정치체제에 참여했다면 시민일 것인지를 따지면 되는 문제이고, 후자의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시민 자체가 다른 조건이 아닌 ‘어떤 관직에 참여함으로써’ 정의되기 때문에, 그릇되게 시민인 자 역시 시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3장. 폴리스는 정치체제를 공유하는 시민의 사회

이때 ‘정의롭게’ 또는 ‘정의롭지 않게’ 시민인지에 대한 문제는 정치체제의 변혁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참주정에서 민주정으로 바뀌었을 때, 힘에 의해 지배되던 참주정의 행위 역시 폴리스의 정당한 행위로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같은 문제들 말이다. 이 논의는 언제 폴리스가 동일한 것이고, 언제 다른 것이 되는지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폴리스의 장소와 사람이 달라지더라도 폴리스는 동일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폴리스가 정치체제를 공유하는 시민들의 공동체라면, 그 정치체제가 종(eidos)적으로 변화할 때 필연적으로 폴리스 역시 동일하게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폴리스의 동일성, 정체성은 (전적으로) 정치체제에 의존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폴리스의 정치체제가 변화하였을 때, 이전의 협정을 이행하는 것이 정의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제4장. 좋은 사람의 덕과 좋은 시민의 덕, 그리고 좋은 지배자

그런데 좋은(agathos) 사람의 덕과 훌륭한(spoudaios) 시민의 덕은 동일한가 그렇지 않은가? 물론 개인 각각의 탁월성에 대한 가장 정확한 규정(logos)은 각자에게 고유하겠지만,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에게 적합한 어떤 공통의 규정도 있다. 이를테면 시민들은 모두 ‘공동체의 안전’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공동체는 곧 정치체제를 가리키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정치체제가 있다면 훌륭한 시민의 덕, 완전한(teleia) 덕은 하나일 수 없음이 명백하다. 또한 시민들은 종적으로 서로 다른 요소들로서 각자의 덕을 발휘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사람의 덕, 완전한 덕은 하나라고 말한다. 게다가 최선의 폴리스를 위해서 훌륭한 시민의 덕은 모든 사람에게 속해야 하지만, 좋은 사람의 덕이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이 지니는 덕과 훌륭한 시민의 덕이 구분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좋은 사람의 덕과 좋은 시민의 덕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 것 또한 맞다. 말하자면 시민의 덕은 ‘잘 지배하고 지배를 받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의 덕이란 바로 ‘지배하는 덕’이다. 좋은 사람은 ‘주인의 지배’ 측면에서 노예적으로 지배받는 법을 알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자유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좋은 사람) 자신과 비슷한 자들을 지배하는 ‘정치적 지배’의 측면에서 그들은 번갈아가며 지배하고 지배받는 법 또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때 좋은 사람은 지배하고, (자유인으로서) 지배받는 앎과 능력 두 측면을 모두 가져야만 하므로, 좋은 사람의 덕과 좋은 시민의 덕이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배하고 지배받는 데 적합한 덕은 여러 종류일 것이지만(이를 테면 정의 등의 덕도 지배하는지, 지배받는지에 따라 그 종류가 다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바로 지배자에게 고유한 덕은 ‘실천적 지혜(phronesis)’이고, 지배받는 자의 덕은 ‘참된(올바른) 의견’이라는 것이다.

 

제5장. 노동자와 직공 기술자들도 시민일 수 있는가

그들 없이는 폴리스가 있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시민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진실이다. 단지 폴리스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관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도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방금 논의하였던 시민의 탁월성은 모든 시민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일들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에게만 속한다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정치체제에 따라 고용 노동자 또는 직공 기술자들이 시민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폴리스들에서도 일단 관직에 참여하는 자가 시민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명백하다. 어쨌든 이렇게 여러 종류의 시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좋은 사람의 덕과 훌륭한 시민의 덕이 동일한 폴리스도 있고, 그렇지 않은 폴리스도 존재함 역시 보여준다. 다만 어떤 폴리스든 최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시민이 아니라 정치가임은 분명하다.

 

제6장. 올바른 정치체제와 타락한 정치체제

정치체제는 하나뿐인가, 아니면 여러 다른 정치체제들이 있는가? 만약 여러 정치체제가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정치체제는 폴리스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관직의 조직, 즉 정부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민주정에서는 인민(demos)이, 과두정에서는 반대로 소수의 사람(oligos)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일단 우리는 이 두 정치체제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변형된 여타 다른 정치체제들이 있다.

왜 폴리스들은 구분되는가? 이것은 두 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 (1) 인간은 ‘잘 삶’을 위하여 폴리스가 필요하기 때문에, 본성상 폴리스적 동물이다. 우리는 잘 삶이라는 최고의 목적, 공동의 유익함을 달성하기 위하여 폴리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그저 ‘삶’을 위해서도 폴리스적 공동체를 유지한다. (2) 또한, 지배의 방식 역시 분류될 수 있다. 주인의 지배는 주로 주인의 유익함을 위한 지배이고, 단지 부수적으로만 노예의 유익함을 위한 지배이다. 반면, 가정경영과 같은 (정치적) 지배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양자에게 공통적인 좋음을 위한 것이다. 정치체제가 시민들의 동등함에 토대를 두고 확립될 때, 시민들은 폴리스의 관직들을 번갈아 지배하는 것이 적절하므로 지배하는 자는 또한 자신을 지배받는 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의 유익함을 겨냥하는 정치체제들은 단적으로 정의로운 것을 추구하는 올바른 정치체제인 반면에, 지배하는 자들 자신만의 유익함을 고려하고, 오로지 ‘삶’을 추구하는 정치체제들은 모두 잘못되고 타락한 것들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정치체제들은 주인의 지배에 국한되는 반면에, 폴리스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제7장. 정치체제의 분류

‘정치체제’란 ‘정부(통치 계급)’이며, 정부는 폴리스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이때 필연적으로 1인, 소수, 혹은 다수가 최고의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공동의 유익함(to koinon sumpheron)을 위해 지배할 때 정치체제는 올바르며, 이들이 개인적인 유익함을 위해서(pros to idiom) 지배할 때 그 정치체제들은 타락한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1인지배정(군주정)에서 공동의 유익함을 목적으로 하면 왕정(basileia)이라 부르고, 소수의 지배에서 그러한 것은 귀족정(aristokratia)이며, 다중이 그렇게 통치하는 것은 혼합정(politeia)라고 불린다. 그리고 왕정에서 벗어난, 타락한 정치체제는 참주정이고, 귀족정으로부터는 과두정이며, 혼합정으로부터는 민주정으로 불린다. 참주정은 지배자 1인의 유익함을 위한 군주정이고, 과두정은 부유한 자들의 유익함을 위한 것이며, 민주정은 가난한 자들의 유익함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타락한 정치체제 중 그 어떠한 것도 시민 전체의 공동의 이익(lusiteron)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제8장. 과두정과 민주정을 정의하는 어려움

이 정치체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참주정은 폴리스 공동체를 노예에 대한 주인의 지배와 같이 지배하는 군주정이다. 과두정은 재산을 많이 가진 자들이 최고의 권위를 행사할 때 생기며, 반대로 민주정은 가난한 자들이 최고의 권위를 행사할 때 생긴다. 그런데 특히 과두정과 민주정을 정의할 때만 생기는 어려움이 있다.

첫째로 다수가 부자이면서도 폴리스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면 어떻게 되는가? 반대로 가난한 자들이 소수이지만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면 이 정치체제는 무엇인가? 누군가가 소수의 부유한 자들이 지배하면 과두정,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지배하면 민주정이라는 식으로 부와 소수를 결합하고 가난과 다수를 결합하여 정치체제를 규정하면 이러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민주정과 과두정 간의 차이를 가져오는 원인은 오로지 ‘가난과 부’에만 있어야 한다. 소수이든 다수이든 간에 어떤 이들이 부 때문에 지배하는 곳은 필연적으로 과두정이며, 가난한 자들이 지배하는 곳은 민주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저 대부분의 폴리스에서 부유한 자들은 소수이고 가난한 자들은 다수일 뿐이다.

 

제9장. 민주정과 과두정에서의 정의 (폴리스의 정의)

그렇다면 과두정과 민주정을 규정하는 특징(horos)은 무엇이고, 과두정적인 정의와 민주정적인 정의(to dikaion)는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자. 애초에 왜 두 정치체제 간의 정의가 나뉘는가? 모든 사람들은 정의를 말할 때 ‘단적인 정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사람들에 대한’ 정의를 찾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주정 옹호자들에게 정의는 ‘동등함, 평등’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실제로 동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그러하다. 한편 과두정 옹호자들에게 정의는 ‘동등하지 않음’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말한 ‘정의로운 것’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정의인 것이다. 그들이 단적인 정의로운 것을 말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다시, 폴리스에서의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폴리스는 단지 소유물을 목적으로 구성되어서는 안 되고, 잘 살기 위해서 구성되어야 한다. 또한 폴리스는 단순히 ‘부정의를 범하거나 당하지 않게 하는’ 일에 대해서만 신경 써서는 안 된다. 또한 폴리스는 (앞서도 말하였듯이) 단지 장소의 공동체도 아니다. 폴리스의 좋은 질서를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폴리스적인 탁월성(덕)과 악덕(kakia)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폴리스는 서로에 대해 정의로운 것만을 보증해서는 안 되고, 시민들을 (전적으로) 좋고 정의로운(agathous kai dikaious) 자들로 만드는 데 힘써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 잘 삶(eu zen)을 위한 공동체로서 폴리스가 존재할 수 있다. 친애(philia)의 산물로 태어난 모듬살이는 목적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폴리스는 완전하고 자족한 삶을 위한 가문들과 마을들의 공동체이며, 완전하고 자족한 삶이란 행복하고 훌륭하며,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따라서 폴리스적 공동체는 훌륭한 행위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단순히 모듬살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가문, 부에서는 동등하거나 우월하지만(동등하지 않지만) 폴리스적인 덕에서 뛰어난 자들이 폴리스에서 더 큰 몫을 가져야만 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제10장. 누가 지배자가 되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정치체제 중에서, 폴리스의 어떤 부분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 옳은가?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부유한 소수의 재산을 나눈다면 폴리스는 파멸할 것이다. 하지만 덕, 정의는 폴리스를 파멸시키지 않는다. 또한 참주가 힘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한편 소수의 부자가 다중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그들만의 이익을 취하는 것 역시 나쁘고 정의롭지 않다. 훌륭한 자 1인이나 훌륭한 자들(tous epieikeis)로 눈을 돌린다고 해도 문제는 발생한다. 그들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폴리스의 관직에서 배제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명예를 박탈당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는 인간은 적어도 영혼에 따라붙는 감정을 가지므로, 법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법 자체도 과두정적이거나 민주정적인 어떤 편견을 가지고 제정될 수밖에 없으므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제11장. 다중의 최고 관직 참여와 최고 권력으로서의 법

이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로 미뤄두고, 우선 소수이고 가장 좋은 사람들(tous aristous oligous) 대신 다중이 최고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살펴보자. 그 근거는 이러하다. 다수는 개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수가 함께 모인 전체 집합으로 보게 되면 소수이고 가장 좋은 사람들보다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개개인 각자는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의 부분만 갖지만, 다수가 함께하면 이들은 마치 많은 발과 손을 가진 한 사람처럼, 성품과 현명함(dianoia)에서도 한 사람처럼 기능하면서 더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훌륭한 자들이 다수의 각 개인과 달리 흩어진 좋은 것들을 하나로 함께 결합시키는 자들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수가 소수의 훌륭한 자들에 대해 우월한가? 짐승과 인간의 차이가 극명하듯이,어떤 인민들에게는 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다중과 관련해서는 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로운 시민들 다수가 갖는 최고의 권위를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유한 자들도 아니고, 덕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들에게는 어떤 권위를 주어야만 하는가? 어떤 몫도, 관직도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폴리스는 필연적으로 적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을 심의하는 일과 판단 내리는 일(krinein)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관직에 있지는 못하지만 관직자를 선출하고, 관직자들에 대한 감사를 청구할 권한을 갖는다. 그들 개별적으로는 불완전하게 판단을 내리는 자들이지만, 가장 나은 자들과 혼합됨으로써 폴리스를 유익하게 한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관직에 있는 자들과 그들을 판단하는 자들이 같은 자들일 수는 없는가? 즉, 의사가 의사들에 의해서 감사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동료들에 의해서 감사를 받아야 하는가? 하지만 우리는 전문적으로 아는 자들 못지않게 그에 대해 교육받은 자들에게도 판단하는 일을 부여한다. 선출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르게 선출하는 일은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 못지않게 전문가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다중이 관직자 선출에도, 감사에도 참여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자로 만들지 않으면 해결된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다중 각자는 전문가들보다 열등할 수 있지만 모두가 함께 모였을 때는 더 낫거나 적어도 열등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둘째, 열등한 자들이 훌륭한 자들보다 더 중요한 일들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아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도 해소된다. 지배하는 것은 개별적인 재판관이나 민회의원이 아니라 법정, 평의회, 민회 등 집합으로서 다수 전체이다. 개인은 이것들의 한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다중이 보다 중요한 일들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 정의로울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와 별개로 올바르게 제정된 법들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만 하고, 그 지배자들은 법들이 엄밀하게 단언할 수 없는 그러한 사안들에 대해서만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감정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은 필연적으로 그 법이 속하는 정치체제와 동일한 방식으로 열등하거나 훌륭하고, 정의롭거나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법은 적어도 정치체제에 알맞게 제정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올바른 정치체제에 따른 법은 필연적으로 정의롭고, 파생된 정치체제에 따른 법은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 역시 따라 나온다.

 

제12장. 정치적 정의, 동등성, 최고의 권위

모든 앎과 기예는 어떤 좋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최고이자 최선의 좋음은 모든 것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앎과 기예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앎과 기예’란 바로 정치적 능력(politke dunamis)이다. 정치적 좋음(politikon agathon)은 정의이고, 정의는 공동의 이익(to koine sumpheron)이다.

많은 사람들은 정의가 어떤 종류의 동등성(ison ti)이라 생각한다. 이 생각은 어느 정도 옳지만, 늘 그것이 ‘무엇에 대한’ 동등함이고 동등하지 않음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에 대한 탐구가 바로 정치철학(philosophia politike)이다.

어떤 사람은 폴리스의 관직이, 다른 모든 것에서 같다면 재산, 명예, 외모 등 어떤 외적인 좋음의 우월성에 따라 동등하지 않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의로운 것과 가치(axia)에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적인 좋음에서 우월한 자들이 정치적 정의와 관련된 어떤 것의 더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훌륭한 아울로스 연주자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기능에서) 더 열등한 연주자보다 나쁜 아울로스를 받는다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처럼 말이다. 부와 태생에서의 우월성은 연주 기능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폴리스의 정치적 정의는, 권위 분배는, 폴리스를 훌륭하게 경영하게끔 하는 정치적 덕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만 한다.

게다가 앞서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좋은 것은 측정 가능하고 다른 모든 것과 비교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크기와 신장은 일정량만큼의 덕이나 질적인 우월성과 동등하다는 말인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외적인 좋음의 동등하지 않음에 따라 정치적 관직에 대해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논쟁은 그 차이(diaphora)가 명예를 얻는 특정한 기능에 대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태생이 좋은 자, 자유인, 부유한 자들은 ‘폴리스를 구성하는 것들로서’ 모두 이치에 맞게, 동등하게 관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와 자유가 폴리스에 필요한 것들이라면, 정의와 정치적 덕 또한 그렇다는 것은 분명하다. 폴리스는 전자 없이 존립할 수 없고, 후자 없이는 훌륭하게 경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제13장. 정치적 관직에 대한 요구

앞서도 말했듯이, 폴리스의 존립과 관련해서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적어도 어떤 이들은 정치적 관직 부여와 관련한 논쟁에서 올바른 요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좋은 삶과 관련해서 덕(탁월성)을 가진 자들이 가장 정의롭게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한 가지에서 동등한 자들이 모든 점에서 동등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한 가지에서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든 점에서 동등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정치체제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타락한 정치체제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는 정의롭게 요구하지만, 단적으로 정의롭게 요구하지는 않는 것이다. 부자들도, 태생이 좋은 자들도, 덕 있는 자들도(정의,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덕은 폴리스 공동체에 본질적인 덕이므로), 다수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관직을 요구한다. 도대체 누가 지배해야만 하는가?

각각의 정치체제에는 누가 지배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결정 사항이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 태생이 좋은 자들, 정치적인 다중이 동일한 시점에 한데 있다고 할 때, 그때는 누가 지배하는 것이 정당한가? 정치적 관직에 대해 논쟁하는 자들 모두와 관련된 어려운 문제가 있다. 부나 가문, 태생 때문에 지배하기를 요구하는 자들은 정의롭지 않다. 누군가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다면, 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지배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것이 귀족정과 관련된 덕의 경우에서도 일어난다. 누군가가 정부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보다 더 낫다면, 이 사람이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horos)들 중 그 어느 것도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 기준에 입각하여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지배할 수 있다고 요구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 지배받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중 역시 그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논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소수보다 더 나은 집합의 예를 들어서 말이다.

그러므로 더 나은 자들과 다수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는 쪽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때, 그렇다면 입법은 더 나은 시민의 유익함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니면 다수의 유익함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때 ‘올바른 것’은 ‘동등하게 올바른’ 것, 공정한 것이므로, 입법은 전체 폴리스의 유익함을 위하여, 즉 시민들의 공동의 유익함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은 앞서도 언급하였듯 각각의 정치체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지배하고 지배받는 데 참여하는 자이다. 그리고 최상의 정치체제에서 시민은 덕(탁월성)에 따른 삶을 목표로 하여 지배받고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자(dunamenos)이며, 또한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자(prohairoumenos)이다.

하지만 이때 덕의 우월성의 측면에서 너무나도 특출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들 중에서 신(theon en anthropois)’이라 불릴 만하며, 나머지 사람들과 동등하다고 여겨져서는 안 되고 폴리스의 부분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입법은 필연적으로 태생과 능력에서 동등한 사람들에 대해서 있어야 한다. 이 너무나도 뛰어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이 법이다. 여러 민주정 폴리스에서 도편추방제(ostrakismos)를 시행한 것은 특출나게 강력한 자들을 폴리스에서 쫓아냄으로써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것에는 동등함과 관련한 어떤 정치적인 정의의 요소가 있다. 물론 입법가가 애초에 이러한 치료가 필요치 않도록 정치체제를 세웠다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타락한 정치체제들에서 도편추방이 사적으로 유익하고 정의롭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적으로 정의롭지는 않다. 최선의 정치체제에서는 덕(탁월성)에서 특출한 자일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해서 그들을 폴리스의 ‘영속적인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제14장. 왕권의 유형

이제 논의의 방향을 돌려서 정치체제 중 하나인 ‘왕정’에 대해서만 고찰해 보자. 왕정은 폴리스를 잘 경영하는 데 유익한가 아닌가, 아니면 어떤 경우에만 유익한가, 혹은 다른 어떤 정치체제가 더 유익한가?

사실 왕정은 지배 방식에서 여러 유형을 포함한다. (1) 가장 참된 유형으로 보이는(dokein) 왕정은 모든 사안들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왕)가 영토 밖으로 나갔을 때 왕이 전쟁과 관련된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신들과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서 말이다. (라코니케 왕정) 이 왕정의 유형은 일종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 종신의(aidions) 장군직과 흡사하다. 왕은 (군사적으로) 비겁하거나, 긴급한 사안에 대해서만 생사여탈권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정 가운데 어떤 것들은 가문에 따른 왕정이고, 다른 것들은 선출된 왕정이다. (2) 다른 유형의 1인지배정은 각 군주가 참주정들과 비슷한 권력을 가지면서도, 법을 따르고, 세습적인 것이다. 이러한 왕정들은 노예에 대한 주인의 지배를 행하기에 참주정적이지만, 세습적이고 법에 따르기 때문에 안정적이다. (3) 세 번째 1인지배정은 선출된 참주정으로, 단지 세습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만 두 번째 1인지배정과 다르다. 이러한 1인지배정들은 주인 지배적이기 때문에 참주정적이었지만, 선출되고 피지배자들이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왕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4) 네 번째 1인지배정은 왕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피지배자들이 자발적이고, 왕위가 세습적이며, 법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왕정의 다섯 번째 유형이 있다. 이것은 마치 가정경영술이 가정에 대한 왕정인 것처럼, 한 사람이 모든 일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절대적인 왕정이다.

 

제15장. 왕정과 법

검토되어야 할 것은 첫 번째(라코니케 왕정)와 다섯 번째 왕정이다. 왜냐하면 다른 왕정들 대부분은 이 두 왕정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의 왕정들은 절대적 왕정보다 최고의 권위를 더 적게 갖지만, 라코니케 왕정보다는 최고의 권위를 더 많이 갖는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한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최선의 사람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더 유익한가, 아니면 최선의 법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더 유익한가? 전자를 믿는 자들은 법들이 단지 보편적인 것을 말할 뿐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명령 내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법이 지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 법보다 잘 숙고한다는 것이다. 한편, 후자를 추구하는 이들은 지배자들에게도 보편적인 이성이 있어야 하는 것과 별개로, 애초에 정동적인 요소가 전적으로 배제된 것이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정동적인 요소가 본래 내재해 있는 인간이 지배하는 체제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법들이 필연적으로 제정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법들이 최선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한에서는 법들이 최고의 권위를 갖지 않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법이 온전히 잘 결정할 수 없는 그러한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최선의 한 사람이 지배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지배해야만 하는가?

군중이 어떤 한 개인보다 많은 것들을 보다 잘 판단할 수 있다는 논의는 앞서 진행되었다. 또한 다수가 좋은 사람들이자 좋은 시민들이라면 다수가 소수보다 덜 타락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들 몇몇의 지배를 귀족정(aristokratia)이라 간주하고, 한 사람의 지배를 왕정이라 한다면, 좋은 사람들을 얻을 수 잇는 조건에서는 귀족정이 왕정보다 한층 더 선택할 만할 것이다. 하지만, 덕에서 아주 특출한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왕정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정을 견디지 못하고 부를 명예로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과두정이 생겨났다. 과두정은 일반적으로 참주정으로, 참주정은 민주정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획득에 대한 탐욕이 권력을 소수의 손아귀에 집중시키면서 참주정이 생겨나고, 이에 견디다 못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민주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왕정에 대해서는, 왕의 자손들이 특출나지 않고 여느 사람들과 같다면 그들에게도 왕정이 적용되는 것은 폴리스에 해로울 것이지만, 세습하지 않는 것에는 굉장히 큰 덕이 필요하기에 이러한 결정이 현실에 존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불어, 왕정으로 지배하려는 자는 법에 따라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더라도, 그러한 법을 지켜내고 복종을 원하지 않는 자들을 강제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제16장. 절대적 왕정

이제 제멋대로 모든 것을 행하는 왕에 대한 논의를 해 보자. 사실상 법에 따르는 왕정은 본질적으로 정치체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없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도 종신 장군직이 존재할 수 있고, 다수가 한 사람에게 폴리스를 통치하기 위한 최고의 권위를 부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적 왕정은 다르다.

자연적으로 모두가 비슷한 사람들인 경우, (번갈아 지배하지 않고) 단지 한 사람만이 지배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이야기된다. 또한, 시민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보다는 법이 다스리는 것이 선택될 만하다. 법은 가장 정의로운 의견에 따라서 제정되고 경험에 의해 개선된다. 또한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법이 지배하는 것은 신과 지성(nous)만이 지배하도록 명령하는 것인 반면, 인간이 지배하는 것은 최선의 인간조차 무너뜨릴 수 있는 짐승적인 욕망(epithumia) 또한 덧붙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법은 욕구(orexis) 없는 지성이다. 성문법을 따르는 자들은 중간(to meson)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지배하는 인간이 성문법보다 개별적인 사안들을 판단하기 용이하므로 보다 안전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관습에 기초한 법들보다는 덜 안전한 것이다.

또한, 법의 지배를 옹호하더라도 심의가 요구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입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따라서 법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 그 어떤 사람도 특정한 사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심의가 요구되는 사안들에 대해 판단하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어서 만약 지금도 군주가 그 자신에게 친애를 주는 자들을 자신의 또 다른 눈, 손, 발로 만들어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그들을 동료-지배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동등하고 비슷한 자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지배해야 한다는 데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제17장. 최고로 탁월한 자가 왕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본성상 정의롭고 유익한 어떤 것은 주인에 의한 지배, 왕에 의한 지배, 정치가에 의한 지배인 경우에 존재하지, 참주 지배나 다른 타락한 정치체제의 경우에는 본성상 정의롭고 유익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치체제는 자연에 반해서(para phusin)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분명히 논의된 것은 비슷하고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 사람이 모든 것들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은 유익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이 있든 없든, 그가 좋은 사람이든 좋지 않은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다.

여러 정치체제에서 각각 정의롭고 유익한 것들 중 각 정치체제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적합한지 알아보자. 다수가 정치적인 지도력에서 적당한 덕을 가진 우월한 가문을 만들어내는 경우에는 왕정에 적합하다. 한편, (자유인들) 다수가 ‘정치적 지배(politike arche)’에서 적당한 덕을 가진 가문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경우에는 귀족정에 적합하다. 부와 힘에 따라 관직을 나눠주는 법에 따라 지배하고 지배받을 수 있는 군사적인 다수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경우에는 혼합정에 적합하다.

그런데, 어떤 한 개별적인 사람의 덕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덕보다 우월할 정도로 특출날 경우, 이 가문은 왕정의 가문으로서 모든 것들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고, 바로 이 개별적인 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다. 앞서도 말하였듯이 이러한 사람을 도편추방하거나 번갈아가면서 지배를 받도록 주장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분이 전체보다 우월한 것은 자연스럽지 않지만, 어쨌든 이런 일은 이 자연스러움조차 이길 정도의 엄청난 우월성을 지닌 자가 있을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나타나면 유일한 길은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그는 단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

 

제18장. 왕의 교육과 이상적인 정치체제

올바른 정치체제들은 세 가지(군주정, 귀족정, 혼합정)이고, 이 중 최선의 정치체제는 최선의 사람들에 의해 경영되는 것이다. 즉 덕이란 측면에서 다른 모든 나머지 사람보다 우월한 한 특정한 사람 또는 소수(가문), 또는 다수가 지배하는 것이고, 가장 선택할 만한 삶을 위해 지배하고 지배받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한 인간의 덕은 필연적으로 최선의 폴리스의 시민의 덕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훌륭해지는 방식과 수단은 특히 왕이나 귀족에 의해 지배되는 최선의 폴리스를 세우게 될 방식이나 수단과 동일하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교육과 습관은 정치가 혹은 군주답게 만드는 교육이나 습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