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역, 《정치학》, 길, 2017. 기반
다분한 오해석
제1권 폴리스와 가정
제1장. 인간적 좋음과 정치적 공동체
아리스토텔레스는 1장에서 폴리스로서 국가의 목적과 폴리스 공동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차이에 대해 논한다. 우선,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좋음’이라 여겨지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된 모든 공동체 역시 특정한 ‘좋음’을 위하여 구성된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들 중에서 최고의 것이면서 가장 포괄적인 공동체인 ‘폴리스’, 즉 ‘정치적 공동체’는 모든 좋음들 중에서도 최고의 좋음인 ‘행복(eudaimonia)’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폴리스를 구성하는 정치가, 왕, 가정경영인, 그리고 노예들의 주인의 역할은 단순히 지배받는 대상의 수의 많고 적음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각각은 종(種)적으로 다른 것이다.
제2장. 폴리스의 기원과 성장, 그리고 목적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의 (역사적) 부분들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하여 폴리스 전체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로 나아간다. 우선 그는 폴리스의 시작(archai)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두 가지 경향이 관찰된다. 자연적으로 (1) 여성과 남성은 생식을 위해 결합하고, (2) 생존을 위해서는 이성이 있는 자가 지배하며 신체가 훌륭한 자들은 지배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편과 아내, 주인과 노예의 두 공동체로부터 ‘가정(oikos)’이 생겨난다. 가정의 형성은 폴리스 공동체로 향하는 과정에서 개별자 이후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다. 이 공동체는 일상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자연스럽게 이러한 ‘필요’ 이상을 충족하기 위하여 여러 가정들로 구성된 첫 번째 공동체, ‘마을’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왕과 같이 모든 가정을 지배하는 연장자가 있다. 나아가, 여러 마을로 이루어진 완전한(teleios) 공동체가 바로 ‘폴리스’이다. 폴리스는 전적으로 자족(autarkeia)에 도달한 것인데, 각각의 것들의 생성이 완결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각각의 본성이라고 부르며, 본성은 곧 목적이고, 자족은 목적이자 최선인 것이므로 즉 모든 폴리스는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폴리스는 ‘공동체’의 진정한 본성 구현으로서, 앞서 존재한 공동체들의 궁극적 목적이며 전적으로 자족하다. 또한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앞서야만 하므로, 폴리스는 마을, 가정, 심지어 개별자인 우리 모두에 대해서도 앞선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이다. 그는 말(logos)을 가졌기에 도덕적 감각을 지니고 이에 따라 폴리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폴리스에서 최고의 좋음인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치 공동체의 심판이자 올바른 심판인 정의의 덕을 발휘해야 한다.
제3장. 가정에 대한 예비적 분석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분에서 전체로 향하는 논의를 계속하여, 우선 폴리스의 기초적 구성 요소인 가정경영(oikonomia)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시, 가정경영(혹은 가정)을 구성하는 부분은 크게 자유민과 노예이며, 이는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에 따라 노예에 대한 주인의 기술, 혼인 관계의 기술, 아이 양육술이 생긴다. 이 세 가지 것들에 더하여, 혹자는 가정경영의 가장 큰 부분으로 재화를 획득하는 기술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룬다. 한편 세 가지 기술에 대하여 같은 종류의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1장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기술들은 종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편,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는 것은 인위적인 규약(법, nomos)의 강제적 힘에 의한 것이므로 자연에 어긋나며, 정의롭지 않은 것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과연 그러한가 역시 후술한다.
제4장. 주인의 도구로서의 노예
재산은 가정의 부분이고, 삶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 없이는 ‘잘 삶’은 물론, 사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재산 획득술’ 역시 가정경영의 부분이다. 기술에는 그에 고유한 도구들이 필요하고, 가정경영술(그리고 그 안의 재산 획득술) 역시 그러하다. 도구들 중에는 영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노예는 일종의 영혼을 가진 소유물(삶을 위한 도구)이고, 모든 보조자는 이러한 도구들을 잘 사용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도구라 부르는 것은 보통 생산(poiesis)을 위한 도구이지만, 노예와 같은 소유물은 활동(praxis)을 위한 도구이다. 그리고 삶은 활동이지 그저 만듦이 아니므로, 가정 노예는 특히 활동을 위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유물은 부분과 같이 전적으로 다른 것에 속하는 것이다. 주인은 말 그대로 노예의 주인이지 노예에게 속하는 것이 전혀 아니지만, 노예는 주인의 노예일 뿐 아니라 전적으로 주인에게 속하는 것이다. 상술한 것이 노예의 본성이자 능력이다. 이로써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는 것이 과연 인위적인가에 대한 논의도 살짝 윤곽을 드러냈다. 인간이기는 하지만 본성적으로 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속하는 자가 자연적으로 노예이자 소유물이며, 활동을 위한 도구이다. 이를테면 그는 그의 소유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부분이다.
제5장. 자연적 노예에 대한 정당화
이제 본격적으로 어떤 사람이 자연적으로 노예일 수 있는지 아닌지, 만일 그러하다면 실제로 그가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지 어떤지를 검토해 보자.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공통된 것을 이루는 모든 것에는 지배하는 것과 지배받는 것이 나타난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본성적인 것이다. 또한 영혼은 본성적으로 지배하는 것이고, 신체는 지배받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최선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서 이를 알 수 있는데, 반면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은 신체가 영혼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는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는 주인의 지배라고, 욕구(orexis)에 대한 정신(nous)의 지배(감정적인 부분을 이성적인 부분이 지배하는 것)는 정치가나 왕의 지배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유익하나, 한편 동등하거나 반대인 것으로부터 지배받는 것은 모든 것에 해가 된다. 따라서 동물은 인간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치 그러한 것처럼, 신체와 영혼, 그리고 짐승과 인간의 차이만큼 확연히 구분되는 사람들 중 전자는 자연적으로 노예이다. 즉 그들의 기능(ergon)은 신체의 사용이며, 오직 그로부터 그들 자신에게서 최선의 것(삶에 필수적인 신체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이성(logos)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에 참여하지만, 스스로 이성을 가지지는 못한 자들이다. 따라서 자연은 노예의 신체를 강건하게 만들고, 한편 자유민은 신체적 노동 대신 폴리스적 삶에 쓸모 있게 만드나, 때로는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신체가 마치 신처럼 훌륭한 자들에게 그렇지 못한 자들이 귀속될 만하다는 것이 참이라면, 영혼에 관해서 역시 그러하다는 것도 정당하다. 이로써 어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자유인이고, 어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노예라는 것이 명백하고, 이들에게는 노예제가 유익하고 정의로운 것임이 말해졌다.
제6장. 자연적 노예의 정당화에 대한 논쟁
그러나, 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어떤 방식에서는 옳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적 노예가 아니라 인위적인 법에 의해서도 누군가는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정복당한 사람들은 정복한 사람들에게 속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힘에서만 우월한 사람이 더 고귀한 사람들을 제압하여 지배할 수 있으므로 노예제는 끔찍하고 불법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의란 (정복당한 자들을 노예로 삼지 않는) 선의라 말하는 사람도, 혹은 그저 보다 강한 자가 지배하는 것 자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힘에는 덕이 수반되고, 덕에서 더 나은 자들이 지배하거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덕과 악덕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노예와 자유, 고귀한 태생과 비천한 태생이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이 이를 원한다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고귀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조차 노예가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노예와 주인에게 유익함과 친애(philia)가 있게 되지만, 후자처럼 단순히 법에 따라, 힘에 굴복하여 노예와 주인 관계가 된 경우에는 그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일이다.
제7장. 노예 지배에 필요한 기술
상술한 논의들로부터, 주인의 지배와 정치가의 지배는, 또한 모든 형태의 지배는 서로 동일하지 않음 역시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정치가의 지배는 자연적으로 자유로운 사람과 동등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고, 주인의 지배는 노예를 지배하는 것이자 홀로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나 정치가가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의 ‘앎(에피스테메)’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그와 같은 종류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예와 자유민 역시 그러하다. 물론 주인과 노예, 그리고 보다 세분화된 역할에 따라 고유한 지식이 있기는 하다. 요리술 등의 앎은 노예의 일이고, 주인의 앎은 노예를 어떻게 부리는지 아는 일이다. 주의할 것은 노예를 획득하는 것은 전쟁술과 사냥술의 앎이고, 노예를 사용하는 일이 주인의 앎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앎은 성가신 일이고, 벗어날 만큼의 재산이 있다면 주인은 그의 본성대로 정치나 철학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제8장. 가정경영술과 획득술
이전에 가정경영술의 일부로 여겨졌던, 재산과 재화를 획득하는 기술에 대해 알아보자. 이때 노예는 재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런데 재산이 아닌, 재화를 획득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정경영술의 일부인지, 부차적인 것인지 등 여러 논란이 있을 법하다. 분명한 것은 가정경영술은 사용에 관련되고, 재산이나 재화 획득술은 그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둘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삶에 필수적인 재산 획득술에 관해 살펴보자. 어떤 동물들은 육식성이고 어떤 동물들은 초식성인 것처럼, 동물 간에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 인간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런데,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재산을 획득하기 위한 삶의 방식은 자연적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식물은 동물을 위해 존재하고,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인간을 위한 의복, 식량, 도구가 된다. 따라서 재산 획득술은 삶을 위해 꼭 필요하고 폴리스나 가정을 위해서 유용할 수 있는 자원을 구하는 것이므로, 자연적으로 가정경영 기술에 포함된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재산에서의 자족은 한계가 없지 않다. 부는 가정경영자와 정치가에게 속하는 도구들의 집합인데 어떤 기술도 도구가 무한정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부에는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이제 검토해 보자.
제9장. 교환경제의 기원, 성장, 다양성
이를 위해 특별히 ‘재화 획득술’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논해 본다. 사람들은 특히 이 기술을 앞서 말한 재산 획득술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부와 재산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은 자연적인 것이고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그 사물에 고유하게, 또는 고유하지 않게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특히 ‘교환’에서 사물을 고유하지 않게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넘치게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은 부족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연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필요로 인한 교환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교환술은 자족함을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자연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부적절하다고 언급하려는 재화 획득술도 아니다. 하지만, 교환하는 사람이 서로 충분한 만큼만 얻지 못하는 ‘상업’을 살펴보면 경우가 달라진다. 삶에 필수적인 것들의 교환으로부터 ‘화폐’가 도입되었을 때, 교역 상업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한 기술을 발달시켰다. 이로부터 점점 재화 획득술이 돈(nomisma)을 만들어내는 기술로 여겨지고, 심지어 부는 많은 양의 돈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사실 돈이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고, 단순한 규약(nomos)으로서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화폐를 바꾸기만 해도 이전의 자칭 ‘부’라는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돈을 획득하는 것 자체, 그리고 돈이 향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착각과 탐욕에 빠져 재화 획득에 온 시간을 보내면서 ‘잘 삶’이 아니라 ‘삶’에 몰두하는 것은 전혀 자연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이들은 끊임없이 지나침을 추구하기 때문에 마치 목적에 한계가 없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이는 본성적으로 가정경영술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필수적인 재산과 재화, 부를 획득하는 기술은 가정경영술에 속하는 것이며,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제10장. 획득술과 관련된 가정경영, 교역, 대부(貸付)
말하자면, 재화를 획득하는 기술은 사실 가정경영자나 정치가의 본질적인 역할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의 재화는 이미 (자연에 의해) 수중에 주어져야 하고, 가정경영자나 정치가의 일은 이를 사용하는 것이다. 즉 재화 획득은 보조적인 의미에서만 이들의 일이다. 한편 앞서 말한 것처럼 필수불가결한 재산(재화) 획득술은 칭찬받아야 하지만, 교환과 관련된 일은 자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해관계로부터 오는 일이므로 정당하게 비난받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따라서 이자 놀이를 하는 기술은 특히 가장 정당하게 미움받을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심지어 돈을 본래 목적(교환)대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 돈 자체의 양을 증대시키기 위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는 재화를 획득하는 모든 방식 중에서 가장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다.
제11장. 획득의 방식과 독점, 그리고 그 방식과 평가
지금까지 재화 획득술에 관한 앎을 충분히 규정했으므로, 그 실천적 적용과 관련하여 논의해 보자. 앎은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해당 앎들에 대한 실천적 경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재화 획득술은 가축 사육, 땅의 경작 등등에 도움이 되는데, 이것들은 재화를 획득하는 기술이 적용되는 가장 일차적이고 고유한 실천적 부분들이다. 한편, 교환의 기술에서 가장 주요한 분야는 상업이다. 그리고 재화 획득술이 실천적으로 경험되는 세 번째 유형은 앞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벌목, 채굴 등이다. 무엇이건 간에 가장 노예적이고 비천한 작업들이란 신체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일이자 덕(아레테)이 가장 덜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재산, 부를 획득하는 기술에서 독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폴리스 중 몇몇은 돈이 부족해질 때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필요해질 무언가를 독점함으로써 재원 수입을 증대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스러운 재화, 부의 획득만을 올바른 것으로 논하였지만 많은 폴리스는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수입을 증대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제12장. 가정의 규칙, 남편과 아버지
우리는 앞서 가정경영술이 세 부분을 가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주인의 기술, 아버지의 기술, 혼인 관계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세 기술은 종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남편이자 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를 지배하고, 둘 다를 자유인으로서 지배하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정치가의 방식으로, 아이에 대해서는 왕의 방식으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때 정치가의 지배는 대부분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동등하기 때문에 번갈아가며 지배하지만, 여자에 대한 남자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같은 방식(남자의 지배)을 가진다. 한편 아이에 대해 왕으로서 지배하는 것은 아버지가 친애(philia)와 나이에 따라 지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연적으로 우월하지만, 혈통적, 종족적으로는 지배받는 아이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이와 나이 먹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제13장. 가정 구성원의 도덕적 탁월성
가정경영술은 생명 없는 재산보다는 인간과, 부의 탁월함보다는 인간의 탁월함과, 노예의 탁월함보다는 자유인의 탁월함과 보다 깊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노예, 여자나 아이는 도구나 종으로서의 덕 외에 이러한 절제, 용기, 정의 등 다른 종류의 품성적 덕들을 가지고 있는가? 즉, 자연적으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들의 덕은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양자 모두 고귀한 도덕적 성품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면, 무슨 이유로 한쪽은 무조건적으로 지배하고 다른 한쪽은 지배받아야만 하는지 물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은 고상한 도덕적 성품을 가지고 다른 편은 가지지 않아야만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만약 지배하는 자가 절제 있고 정의롭지 않다면 어떻게 잘 지배할 것이며, 지배받는 자가 절제와 정의를 획득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잘 지배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양자는 필연적으로 덕을 나누어 가져야만 하나, 그들의 덕에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영혼 안에도 자연적으로 지배하는 부분(이성을 가진 부분)과 지배받는 부분(이성을 가지지 않은 부분)이 있고 이것들의 덕이 다르듯이, 영혼의 부분들은 남자, 여자, 아이에게 모두 내재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즉, 노예는 전적으로 숙고적 부분(이성적으로 헤아리는 부분)이 결여되어 있으며, 여자는 그것을 가지고 있거나 권위를 가지지 못해 주체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한편 아이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지배하는 자는 이러한 도덕적 덕(품성적 덕)을 완전하게 가져야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 각각은 그들에게 속하는 한에서만 품성적 덕을 가지고, 발휘하면 된다. 따라서 용기나 정의 등 같게 부르는 덕도 여자와 남자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지배하는 자의 용기가 있고, 보조자의 용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단순히 덕을 ‘영혼의 좋은 상태’라거나 ‘올바른 행위’라고 규정한 것은 기만적이다. 덕은 그 자신에게 속하는가(지배하는 자), 혹은 주인과의 관계에 속하는가에 따라 다르고, 각자가 자신의 일을 부족하게 행하지 않을 만큼 필요한 것이다. 이로부터 주인은 자신의 노예에게 일을 가르치는 기술을 가지기는 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 노예에게 덕(탁월성)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밝혀졌다. 모든 가정은 폴리스의 일부이고 아이들과 여자들은 가정의 일부이며, 부분의 덕은 전체의 덕과 관련되기에 이들은 언제나 정치 체제를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덕을 잘 발휘하도록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는 자유인의 절반이고, 아이들은 자라서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현재의 논의는 마무리하고, 이후에는 최선의 정치체제에 대해 의견을 표명했던 사람들을 탐구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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