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자유의 모순적 본질, 그에 따른 지양의 운동,
주관적으로는 정치적 심정, 객관적으로는 국가라는 유기체에 이르는 이념의 필연적 전개 과정
헤겔은 스피노자의 『에티카』 제1부 정의 1, ‘자기 원인(causa sui)이란 그의 본성(natura)이 실존하는 것으로밖에는 생각될 수 없다’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변용하여 읽는다. 정신은 그의 즉자적인 존재에서부터 이미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무한히 자기 내 복귀하는 자”라는 데서, 즉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는 자유 내지 활동성(Tätigkeit)을 본질로 하여서만 존립한다(『법철학』 §66 주해). 그렇다면, 정신은 본질적으로 자기의식적이며, 이에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자로서 자유로운 사유이자 또한 자유로운 의지가 된다. 이는 재미있게도, 의욕의 측면에서 볼 때 모든 규정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무를 지양하기 위하여서는 그 자신을 규정함으로써 스스로 한정되어야 하는, 그러면서도 다시 새로운 목적을 통해 그 규정으로부터 탈피하고야 마는 자유의 운명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자유의 개념이 일면적인 규정들과 그에 따른 모순을 발견하고 지양하는 운동을 통하여 무한한 구체성에 도달하는 발전적인 원환의 연쇄이기도 하다. 이에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이성이 ‘자기의식적 정신’이자 ‘현존하는 현실’임을 말한다. 어떻게 그러한가? 앞서 다루었듯 정신이 그로부터 자기 자신에 근거를 둔 것을 찾아 돌아올 수 있는 인류의 사회적, 문화적 삶의 총체로서 자연에 깃든다면, 시간적인 것으로 유한하고 우연적으로 실재하는 현상 속에도, 개념이 표상 속에서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듯이(『법철학』 §2), 참된 현실성(Wirklichkeit) 혹은 이성다운 것으로서 이념성(Idealität)이 역사의 진행에 따라 태양처럼 자기 자신의 새로운 규정성을 비출 것을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종합하면 현상 속의 이념성이란, 침묵하는 자연 속에 짜여져 들어가 신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종국에는 완벽한 구체성 속에서 무규정과 규정, 보편과 특수, 객관과 주관이 합일되어 그 자신이 세계로서 구현되고자 분투하는 자유로운 정신이기도 하다.
헤겔에게서 자유는 무규정과 규정의 자체 내 모순으로 성립하지만, 또한 그 모순으로 지속적으로 붕괴한다. 따라서 사유이자 의지가 자유롭고, 또 자유로워야만 존립하는 한(자아가 규정성 속에 스스로를 정립함으로써 존재하는 의지의 자유가 곧 의지의 실체성, 의지의 중력(Schwere)이다(§7).) 그의 일면적인 규정에서 불안정성, 모순을 발견하고 보다 참된 규정으로 나아간다는 목적은 자유의 개념상 필연적이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렇듯 헤겔에게서 자유의 이념 실현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유와 의지의 불가분한 결합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즉 “의지가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매개하는 활동이자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면서, 또한 개념이 자체 내 모순을 지양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전개 양상 역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념성에서 필연성은 이념 자체 내에서의 이념의 전개다.”(§267) 개념과, 그 밖으로 실재를 향해 나가는 의지의 결속은 마치 라이프니츠가 모든 참된 명제는 분석 명제임을 밝히면서 성립하는 완전개체개념과 그에 따른 의지의 (자유로우면서도) 필연적인 진행을 주장한 것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개념은 그 자신의 맥박으로 운동한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우선 자유가 인격(Person)으로서 “모든 것에 자신의 의지를 집어넣어서 그 물건을 나의 것이 되도록 하는 권리”(§44), 즉 외면적인 것에서 자유의 즉자적 현존인 추상법의 형태로 떠올랐다가, 그러한 자유의 외적 현존을 침해하는 범죄와, 그에 복수하는 정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의지로서 대자적 의지가 요구됨이 드러나며 지양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로써 인격은 행위와 행위의 절대적인 목적인 선(das Gute) 개념과 함께 특수자이면서도 보편자와 관계 맺는 주체(Subjekt)로 고양되면서, 처벌하는 정의를 가능케 하는 도덕성(Moralität) 장으로 이행한다. 하지만 도덕성 역시도 결국, 특수한 규정성에 머물면서 보편성을 요구하는 주체의 양심과 반대로 규정성을 요구하는 절대적 선이 단지 서로에게 대자적으로, 따라서 그 자신 몰규정적인 즉자로서 괴리되면서 다시 지양된다. 헤겔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최종 단계는 도덕성의 다음인 인륜, 즉 “선과 주관적 의지의 구체적 동일성”(§141)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보편 의지와 특수 의지가 합치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주체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결국 이러한 인륜성이 사랑 아래 즉자적으로 통일된 가정과, 이러한 가정의 다수 분산으로 다양한 구성원들의 특수한 욕구가 인격과 재산을 보호하는 형식적 보편성 아래 묶인 시민 사회라는 계기들을 통하여 비로소 국가에 이르면서 궁극적인 이념으로 실현되는 것이라 본다. 즉, 국가는 인륜적 이념의 참된 현실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인륜적 이념은 물론 객관적으로는 정치적 국가라는 실체다. 하지만 인륜이란 바로 개별 주체의 내면, 양심과만 관계했던 추상적 선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생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 측면에서도 여전히 특수 의지와 새로운 주체로 떠오른 국가의 보편 의지와 합치하리라는 기반 있는 확신, 즉 주관적 실체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애국심(Patriotismus)이라는 정치적 심정(politische Gesinnung)이다. 국가라는 실체는 유기체(Organismus)로서 그 자신의 기관들을 분화하여 정치체제[헌법, Verfassung]를 이루면서 개인들의 특수 의지를 보편 의지와의 합치 속에서 보호한다. 그리고 개인들은 정치적 심정을 바탕으로 국가를 신뢰하며 그 안에서 활동한다. 이러한 상호적 지지에 의해서만 국가는, 인륜은, 그러므로 자유는 비로소 참으로 현실적인 것으로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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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과 의지의 점근:
필연적 진행 속에서 개인의 자유의지, 그리고 선형적이고 발전적인 역사 진행에서 ‘열등한’ 공동체
자유로운 의지는 국가를 향해 필연적으로 전개되지만, 또한 ‘자유롭게’ 전개된다는 지점에서 우리는 라이프니츠를 오래 곤혹스럽게 했던 유명한 난제의 변형을 마주하는 것도 같다. ‘어떤 개체의 술어는 모두 결정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또한 자유롭다. 어떻게 그러한가?’, 이 질문을 논의 지평에 맞게 바꾸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설립을 향해 필연적으로 이끌려 간다. 하지만 그 필연성이 곧 자유의지의 전개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우리는 국가에 소속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임의적으로 국가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그것이 우리 개념의 진행 방향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이프니츠와 헤겔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라이프니츠에게서는 술어들이 신에 의해 결정되는 반면, 헤겔에게서는 자유로운 사유이자 의지 그 자체인 주어 자신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데 있다(그리고 물론 헤겔이 우연적인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나 개념과 의지가 서로에게로 무한히 접근함에 따라 자유와 필연성이 서로의 양면이 되고, 자유의지의 (헤겔이 보기에 본질적 부분에서) 다른 분기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또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에 날갯짓을 시작한다고 해도, 지금 다루는 것은 인식론의 측면이 아니라 존재론의 측면이다. 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후에도 보다 자세히 다루겠지만,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의 진행이 선형적일 때, 그리고 자유가 긍정적 가치로서 실현되어야 함을 전제할 때, 그 전개의 초반부에 있는 의지는 후반부의 의지보다 열등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268 인륜성 이념 실현의 가능 조건: 정치적 심정으로서 애국심(Patriotismus)
정치적 심정 즉 애국심(Patriotismus)은 단지 사견이 아니라, 나의 자유가 국가 안에서, 그의 존속을 위한 의무를 다하면서 나의 특수한 이해관심과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합치시킴으로써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에 존립한 확신이다. 이러한 객관적 확신을 단지 ‘비범한 희생과 행위를 하려는 마음 상태’로 이해하여, 희소한 것이라거나, 실체적 기반 없이 그저 주관적 표상이나 사상으로부터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애국심은 공동체를 존중하며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 속에서 개인의 특수한 이해관심을 실현하는 한, 어떤 관계들에 처해도 자신을 항상 입증하고 있는 의식이다. 물론 이제 일반적으로 이러한 애국심은 우리가 관습(Sitte)에 의해 공동체에 결속하듯이 국가에 존립하는 법률과 같은 이성적 질서로서 제도들(Institutionen)의 결과이자, 습관이 되어 버린 의욕이다. 하지만 이는 또한 자유의 개념파악에 의해 내면적 양심과 관계맺는 추상적 선과 구체적 현실의 합치를 위하여 필연적으로 요구됨을 밝혀낸 바, 그러한 객관적 실재성의 연역에 근거해 애국심이라는 결과 속에는 이성다움이 현실적으로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심정은 제도들에 적합한 행위, 즉 국가의 보편 의지와 개인 자신의 특수 의지를 조화시킴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고 또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존속한다.
여기서 이렇듯 나의 특수한 이해관계가, 개별자인 나와 관계맺는 타자 즉 국가의 이해관계 및 목적과 합치하는 것으로 그 안에 보존되고 포함된다는 의식으로서 정치적 심정은 나의 자유 실현을 위한 궁극적인 가능 조건으로서 국가에 대한 신뢰이자, 통찰(Einsicht)로까지 이행한다. 이로써 국가 존속을 위한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 속에서 내가 가진, 또한 이성적 존재자로서는 나 자신 자체인 자유라는 권리의 진정한 실현과 같은 것이 되고, 따라서 특수 의지와 국가의 보편 의지가 합치되는 그러한 의식 속에서 국가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나 자신과 합일되어 존재하며, 이러한 의식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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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국가 성립의 필연적 조건인가? 그리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확실한 표지가 주어지는가?
여기에서 헤겔은 애국심으로서 정치적 심정을 ‘주관적 실체성’으로 부르면서, 인륜성의 객관적 측면이 국가라면 주관적 측면은 정치적 심정으로서 자유의 이념 실현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이러한 애국심은 헤겔 자신도 강조하듯이 주관적이면서도 또한 진리에 기반한 객관적 확신이다. 그리고 인륜성이 개인의 양심과 관계하는 추상적 선이 구체적 현실로 드러난 것이라는 점에서, 이 개인의 주관성이 객관적 의지가 드러난 양상이 자신의 특수 의지와 합치함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객관적 의지가 주관적 의지와 통일되어 후자를 품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타자인지 알 길이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긴다.
(1) 자유 실현의 주체로서 개별 구성원들을 통솔하는 국가의 객관적 의지가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분화될지는 애초에 국가의 개념상 그리고 개별 국가가 처한 환경에 따라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주관과 객관이 어떻게 통일되어야 할지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국가를 통하여서만 특수 의지가 보편 의지와 합일될 것이라는 개별 주체의 심정은 잉여적인 것이고, 단지 국가를 안정적으로 존속하는 데만 필요한 것은 아닌가?
(2) 나아가, 애국심이 인륜성의 이념의 가능 조건이고, 또한 애국심 없는 국가도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헤겔적 의미가 아닌 일상적 의미에서) 현실과 합치하는가? 국가만이 특수 의지를 보편과 합일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 신뢰라는 내면적 ‘심정’은 어쨌든 우연적인 것은 아닌가? 당장 내가 미래에 도덕성만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도래하기를 꿈꾼다 해도 당장 나의 특수한 이해관심들을 보호받기에 다만 용이한 국가에 소속되고자 할 수도 있다. 당장 보편 의지와 특수 의지의 조화가 국가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 외에, ‘오직 그럴 수밖에 없다’는 객관적 확신으로 끌고 갈 확실한 표지가 있는가?
§269 인륜성 이념 실현의 가능 조건: 국가라는 유기체(Organismus)
한편 국가라는 유기체의 측면에서는, 보편 의지와 특수 의지를 합치시킴으로써 추상적 선을 현실적으로 생동하게 하려는 인륜적 이념이, 그 참된 구현인 국가라는 보편자가 목적의 유지를 위해 또다시 스스로를 구분지으며 다양한 지체들 내지 기관들을 분화하고 그러한 상이한 기관들의 활동으로 존속하도록 이끈다. 즉 우리의 몸과 기관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국가 역시 끊임없이, 동시에 그 개념의 필연성에 따라 스스로를 산출하면서, 동시에 산출의 전제로서 지속한다. 이러한 객관적 현실성을 가진 구분지(Unterschieden), 기관들이 곧 상이한 정치 권력들[강제력들, Gewalten]이자, 이 강제력들의 직무(Geschäft)이자 활동(Wirksamkeit) 자체이다. 이러한 유기체의 조직이 곧 정치체제(politische Verfassu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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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의지’와 ‘특수한 의지’의 합치로 이야기되는, 국가라는 유기체의 목적은 정말 가능한가?
짐작할 수 있듯, 국가라는 유기체가 그 개념에 따라 ‘필연적으로’ 분화하면서, 또한 이때 국가의 개념을 ‘전제하면서’ 존속한다는 서술은 다음의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국가가 개별자에 의해 인식되고 의욕되지 않은 시점에서도, 국가는 그 개념상 객관적인, 신적 의지의 이념으로서, 달리 말해 현실화될 것으로서 즉자적으로 이성답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개념을 전제한 정치체의 분화를 가능하게 하며, 또한 국가를 단지 특수 의지의 총체나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수단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분석하였듯 ‘모든 공동체가 노동자와 직업인 사회의 변주’로서 부의 축적이라는 일관된 목적 아래 복무하고, 개인의 이른바 영웅적 자질도 으레 인류사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상품이 되는 데 일조하는 근대 이후의 상황에서도, 국가는 여전히 국민의 기본권과 재산 보호 내지 경제적 개입 주체 이상의 것을 본질로 가진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명령’하는 도덕과 달리 (국가 존속에 필수적인 행위 외에) ‘허용’하는 법은 과연 ‘추상적 선의 구체적 현실화’를 의미할 수 있는가? 애초에, 절대적 선과 자연이 조화되면 소위 ‘목적의 왕국’이나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주어지는 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률 및 제도들로 나타난다는 주장은, 이념을 단지 점근 가능한 것으로 두는 사상보다 정당한가?
§270 아는 자(das Wissende)로서 국가와 학문, 그리고 종교의 관계
지금까지 (i) 우선 국가의 목적은 특수한 이해관계들을 그 실체인 보편적 이해관계 속에 보존하는 것임을 이야기했다. 이것이 국가의 추상적 현실성 내지 실체성이다. (ii) 이러한 추상적 현실성은 국가가 그 개념의 본성에 따라 자신의 구분지들을 나누고, 이 구분지들이 그러한 확고한 객관적 현실성에 기반하는 규정들로서 강제력이 되는 한에서, 국가의 필연성이기도 하다.
(iii) 그런데 이러한 실체성은 또한 추상법, 도덕성과 같은 도야의 형식의 두루 거치고 나서, 자신을 알고, 또 (그 규정을) 의욕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는 단지 믿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는 바를, 구체적인 보편성 속에서 사유된 것으로서 아는 자(das Wissende)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와 종교의 관계는 곡해 없이 정립될 수 있다.
종교가 국가의 기초가 된다는 주장 반박
종교가 국가의 기초가 된다는 주장은 으레 무한자와 관계하는 종교와 달리, 국가는 ‘세상 속에 존립하는 정신’으로서 정신이 그의 여러 요소를 명료하게 의식하고 외화하여 일개 유한자로 나타나는 것, 심지어 자의(Willkür)에 따르는 우연적인 것으로서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에 종속됨으로써 신성해지고 무한자로부터 실체적 기반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이런 사상에서는 또한 국가가 단지 생명과 재산 유지에 기여하는, 교회의 세속적인 수단에 불과하며 진리는 주관적인 종교성이나 기껏해야 이론적인 학문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보고는 한다. 하지만, 이는 일면적인 생각이다. 앞서 논의하였듯 국가는 온갖 구별을 자아내면서도 또한 그 구별을 일체성 속에 보존하는 주체성이다(§270 추가). 국가는 이성적 질서 아래 공동체의 구체적 삶을 마련하고 존속시키는 것, 즉 참된 자유의 실현이라는 이념을 위하여 스스로 유한하게 구별된 것들로 분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신을 삼위일체적이라고 할 때, 유한하게 구별된 것들을 통해 실체적이고 이성다운 신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국가를 다만 유한한 것으로, 자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국가를 조악하고 편협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국가는 그 자체로 구체적으로 드러난 진리, 보편자, 세계 속에서 진행되는 신적 의지이다.
오히려, 국가가 종교에 종속된다면 두 가지 부당한 사태로 흐르게 될 것이다. 종교는 사유와 개념을 통한 인식이 아니라 표상, 믿음(Glaube), 감수성(Empfindung)의 형식을 띤, 절대자와의 관계이다. 즉 종교는 개별 주체들의 내면을 규율한다. 그 안에서 보편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외면적인 법률이 개념상 따라 나올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신실하기만 하다면 자의에 따라 행동해도 되고 이에 따라 부정의가 생기면 종교의 위안에 의탁하도록 하면서, 그로써 인간을 이성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행위하지 못하는 노예나 동물로 전락시키는 부조리한 결과가 등장할 수 있을 터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심정과 견해를 현실에서 근거 없이 타당화하여 ‘자신을 절대자로 아는 의지의 주체성’을 휘두르는 종교적 광신주의가 발생할 공산도 크다.
다만, 종교가 국가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 어떠한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해 속에서이다. (i) 종교는 국가의 기초이지만, 그러므로 단지 기초일 뿐이다. 종교는 무한자와의 관계를 통한 내면의 규율에 머문다. 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의 이념은 그의 참된 규정을 위해 느낌과 표상의 주체성이 아니라 이성적이면서도 구체적 현실을 관장하는 주체성으로의, 내면에서 외면, 개념에서 실재로 향하는 이성 통합[도야, Einbildung][1]의 위대한 초월을 그 전개상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므로 종교가 국가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국가가 이성적 본성에 기초하며, 그 본성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발현되어야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는 한에서는 참이다. (ii) 한편 종교는 반대로 절대자로서의 정신이 법, 도덕, 인륜을 통해 외화되었다가 자기 내로 복귀하여 궁극적으로 참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보다 고차적인 영역으로 이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종교의 절대자는 스스로 전개되며 점점 더 깊어지고 투명해져 자신을 비추는 기원의 샘물로서 국가의 기초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나 객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법률을 창출하는 것은 국가의 개념이며, 종교는 내면을 다스리는 교의를 설파하는 데 스스로의 자리를 가져야 한다. 어느 쪽도 서로에게로 월권할 수 없다.
국가와 종교, 그리고 학문의 관계
(국가와 종교의 상호 지지 및 충돌) 국가와 종교가 상호 인정하는 한에서, 종교는 국가를 통해 자신의 존립 상태(Zuständ)와 외면을 갖출 수 있으며, 국가는 종교를 통해 구성원들 간 내면적 결속을 다질 수 있다. 종교는 소유물과 재산, 그리고 개인들의 봉사가 있어야 종교 제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가는 종교의 목적 달성을 위한 이러한 외면적 요건 충족에 조력하고 종교적 교리의 외면적 표현을 존중 및 보호하며, 이때 종교는 심정의 심층 차원에서 사상의 형식을 띤 국가의 법률, 법칙을 또한 믿고 동의하도록 하면서 국가 구성원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어떠한 종교 공동체가 국가에 대한 특정 의무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때 국가는 충분히 강력(Stärke)한 경우에 인륜과 이성다움의 힘(Macht)을 신뢰하며 관용(Toleranz)을 베풀 수 있다. 이러한 국가는 그 특정 종교 공동체를 시민 사회의 법률에 맡기고, 또한 그들이 반대하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른 의무들로 대체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즉, 구성원들이 충분히 강하게 인륜성으로 결속되어 있는 국가는 합법적 권역 내에서도 ‘헌법적 권력을 공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자제’하더라도 국가의 위력과 구성원들의 신뢰를 잃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강제하지 않음으로써 보다 강한 힘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한에서 국가와 종교는 상호 지지 속에서 존립하거나, 충돌 상황에서도 관용을 통해 공존할 수 있다.
(국가와 종교, 그리고 학문의 본질) 종교는 감정과 믿음, 권위의 형식으로 무한, 진리 혹은 절대자와 관계한다. 한편 §270절 해설의 초반부에서 밝혔듯이, 국가는 자신의 이성적 본성을 알고, 객관적으로 실현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근본적으로 사상의 형식을 띤다. 이에 따라 종교 속에서 어떠한 확신과 권위로 둘러싸여 있는 진리의 주관적인 형태라도 이에 반대하여 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국가만이 보장할 수 있다. 즉, 국가의 편으로부터 사유와 학문의 자유는 발원한다. 이에 학문 역시 자신의 편에서 국가에게, 시대의 총아인 한에서 파악될 수 있는 최대한의 청사진을 제공한다. 학문은 국가와 같이 사상의 형식을 지니며, 학문은 언제나 인식하기뿐 아니라 이렇게 인식된 것이 객관적 진리로서, 이성다운 것 즉 참으로 현실다운 것으로 현재화하기를 염원하면서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법의 개념 전개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의 이념이 실현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법철학의 저술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헤겔 자신의 목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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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종교적인 국가와 실존적 고통 속에서의 정당화
종교의 절대자는 계시받은 자들과 그 계시의 신성함을 믿는 자들을 거느린다. 그러나 결국 이 특수자들의 모임은 보편성을 함께 담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 결합하지 못하기에, 혹은 어떠한 선지자의, 결국 단지 주관적일 뿐인 의지 속에서 광신의 물결이 되기에, 임의적이지 않은 형상으로 신을 세계에 깃들게 하는 데 실패한다. 이러한 사정은 일종의 이성 종교로서 추상적 선의 구체적 규정을 주관 속 갖가지 ‘합리적 계시’의 형태로 마주하게 되는 도덕성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보편이 단지 개별자들 내에서, 그리고 그 합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이 종교가 단지 내면만을 규율한다는 말의 뜻을 (적어도 일부를) 이룰 것이다. 어쨌거나 종교도 현실적으로는 항상 ‘실천’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기관들에 의해 숨 쉬면서도 동시에 그 기관들과 구별되어 그들의 목적을 세우는, 국가라는 유기체에 이르러서야 이성은 보편적이면서도 적절한 규정성을 가진 것으로 현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적절한 규정성’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자주 절망한다. 우리가 유한한 자기의식적 존재자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 앞에서 절망하듯이, 우리의 국가도 역사의 진행 속에서 어떠한 자신이 이성성의 진정한 구현인가를 두고 ‘실존적 고통’을 겪어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국가가 겪는 그 고통은 대개 광범위하고 끔찍하게 객관화된 결과들로 나타난다. 개별 국가들이 구체적인 목적을, 말하자면 특정 이데올로기들을 숭상하면서 나아가는 동안 그 이성성이란 신의 사랑이 깃든 폭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짓밟아 왔는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개별성이 보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국가 내로 포섭되고 또한 이 방향이 자유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옳은 방향’이라고 해서, 바로 국가가 그 옳음의 완전한 구현자로서 ‘아는 자’가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헤매는 개인들로부터 그 실존이 매개되는 것이 바로 완벽한 해결책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종교나 도덕의 주관적인 믿음만큼이나 환상적인 것이다. 국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학문도) 역시 아는 자이기 위해서 우선 무엇이 이성성인가를 계시받는 ‘믿는 자’가 되는 지점에 이를 수밖에 없고, 이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종교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성은 국가가 대규모의 실존적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실패의 역사를 예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믿는 자와 아는 자의 분리로 이야기하는 헤겔의 법철학 270절은, 이를테면 세속 정부와 교회가 외면상 대체로 (그렇지 않은 국가들이 여전히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현대에서도 국가가 여전히 간절히 현실화를 희구해야 하는 이념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은 결국 다시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가가 아는 자가 되는 과정에서 겪는 끔찍한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가?” 즉, 신정론(Theodicy)으로서 헤겔의 역사철학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이성성이라는 희망으로 인류를 사랑하기 위하여 지나간 인류에게 폭력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지점에 와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전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애초에, 무슨 희생을 감수할지 모르는 채로 개인들의 자유 보호 이상의 소위 위대한 목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 여기서 카프카가 실존적 고통으로 낳은 문장들을 길을 잃은 우리의 국가들과, 또 철학하는 우리들이 마주한 사태에 대입해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판단하는 생각은 아픔으로 괴로워했다. 격심한 고통을 더하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마치 완전히 불타 버리는 집에서 건축의 근본 물음을 처음으로 던지는 것과 같다.”
§271 유기체로서 국가, 특수한 민족정신으로서 개별 국가, 그리고 세계정신의 구현으로의 이행
정치 체제는 국가의 유기적 조직(Organisation), 즉 국가가 자신의 계기들, 다시 말해 기관들을 자신 내에서 개념의 본성에 따라 구분하고 현실성을 부여하며 또한 그들을 통해 존속하는, 스스로와의 관계 속에서 꾸려가는 유기적 삶의 과정이다.
그런데, 한 국가는 한 민족[인민]의 정신으로서 다시 배타적인 일자고, 이 일자는 특수한 민족정신으로서 다시 타자, 즉 또 다른 특수한 민족정신으로서 타 국가와 대자적으로 관계맺는다. 따라서 한 국가 내에서도 그 이념에 따라 또한 필연적으로 내부의 규율을 향하는 구분지와, 군대와 같이 외부를 향하는 구분지가 정립된다. 따라서 자유의 이념 전개의 필연적 과정을 좇기 위해서는 앞으로 내적 정치 체제와 외적 국가법을 나누어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민족정신들이 투쟁하는 세계사 속에서 다시 보편적 세계정신이 현실화되고 계시될 것이다(§33). 이 세계정신의 법[권리]가 궁극적으로 최고의 법[권리]으로 서게 되리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
발제를 마무리하며:
자유로운 정신의 발전사로서 진보하는 세계사
의 바깥에 서 있는 자들
여기서 헤겔은 자유의 실현을 위하여 나아가는 정신의 과정, 구체적으로는 국가로 대변되는 그 자신 보편자이면서도 특수한 민족정신들의 운동이 세계사이며, 그 속에서 세계정신이 결국 현시하게 되리라 내다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주장에서 읽어낼 수 있는 주요한 징후들은 자유라는 가치의 절대화를 수반하는 절대적인 진보의 믿음, 국가주의적 역사관, 역사의 정신화, 그리고 세계의 축소이다.
자유라는 이념을 참되게 실현하는 방향으로 역사는 흘러간다. 이는 자유가 보편적으로 긍정되는 가치이며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인 이상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진보를 의미한다. 동시에 헤겔에게서 자유의 개념은 필연적인 전개를 가진다. 세계사의 서술 주체는 국가이다.
그렇다면 ‘선사’ 속으로 빨려들어간 우리의 국가 없는, 혹은 국가 잃은 시대는 역사의 타자인가?
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민족 혹은 공동체가 『오래된 미래』라는 식으로 단계적인 역사 고찰에 입각해 서구의 신비로운 잊힌 과거로 취급되는 것은 정당한가?
한편,
자유의 실현 과정에 ‘열등한’ 민족을 편입시키는 식민지화는 정당한가? 또한 현대에는, 보편적 자유와 인권 개념에 입각해 제3세계 여성 등에 대해 ‘구원’과 ‘근대화’의 서사를 쓰는 것은 정당한가(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참고)?
비서구권의 역사 서술은 선사의 영역에서 ‘세계사’에 편입되는 과정의 기술로 획일화될 수밖에 없는가? 이를테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있던 우리,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인도의 역사가들은 고유한 ‘선사’를 복권시키지 않고 역사를 단지 식민 국가로 가는 과정과, 독립 후 포스트식민주의 국가로의 이행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가? 역사의 무대는 누구의 것인가?
라나지트 구하는 그의 저서 『역사 없는 사람들』에서 헤겔이 ‘세계사’ 개념을 통해 정신의 역사화를 역사의 정신화로 탈바꿈했다고 비판한다. 즉 헤겔이 ‘정신의 발전사’를 실제 역사의 과정으로 잘못 확대시켰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의 표지는 왜곡되면서 국가 없는 이들은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되고, 다시 그의 구획에 맞는 방식으로 재단되어 구원이나 근대화의 미명 아래 끌어당겨진다. 이로써 아도르노가 ‘계몽’에서 ‘아우슈비츠’를 발견했듯이, 구하는 서구권 바깥에서, ‘자유’로부터 새로운 ‘제국주의’를 발견한다. 또는 벤야민이 말한 ‘승리자만을 대변하는 역사’를 발견한다. 헤겔의 ‘자유로운 정신의 발전사’, 또는 국가가 주체가 되는 세계사는 이렇듯 타자화의 폭력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이러한 헤겔의 역사 규정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어떤 태도를 취하면 좋을까?
[1] 영역본에서는 ‘incorporation’이라는 역어를 사용했다. 한편, 서정혁 선생님의 『법철학』 번역본에서는 도야와 상상이라는 역어를 병기했다. 전자는 개념이 실재 속으로 함께 짜여져 들어가 ’통합되어’ 스스로를 현시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한편, 후자는 개념으로부터 실재로의 도약이 주관에게 주어진 것 밖으로 나가는 신성한 ‘초월’임을 눈앞에 보여주는 역어다. 더하여, Einbildung의 사전적 정의 중 ‘unbedingt haben wollen’은 이성이 세계에서 그의 참된 실현을 ‘간절히, 혹은 무조건적으로 의욕한다’는 의미 역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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